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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일제시기 철도에 투영된 근대의 욕망들 ⑩_박우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11.05 BoardLang.text_hits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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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10월(통권 68호)

[기획연재] 
 
 

일제시기 철도에 투영된 근대의 욕망들 ⑩:

'반도유일의 횡단철도' 평원선은 왜 36년이 걸려서야 완공되었을까? ③

 


박우현(근대사분과)

 
 
1. 시작부터 삐걱대는 평원선 부설
 
예상을 뒤엎고 1922년 제국의회의 승인을 받았던 평원선 부설은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이 글의 소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평원선 부설은 시작부터 순조롭지 못했다. 1923년 초부터 제국의회에서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식민지 조선에 이해관계가 없었던 한 중의원 의원은 평원선은 이익이 나지 않는 노선인 데다가 원산에는 경원선이 이미 있고, 평양은 진남포항을 인접하고 있는데 왜 부설해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와다 이치로(和田一郞) 조선총독부 재무국장은 동서해안 연락과 연선 개발을 위한 부설이라고 답변했지만, 재정이 궁핍한 시기에 조선철도만 예산이 방만하다는 비판으로 돌아왔다.1) 철도는 일본 대장성이 조선에 사용되는 사업공채를 발행해 부설하는 것이기에 식민지에 이른바 중복투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실제 평원선 건설은 진척이 있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승인 다음 해인 1923년에 개정된 향후 조선사업공채 추가발행계획부터 평원선은 삭제된다. 제국 단위의 이유를 먼저 언급하자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반동공황의 여파가 점차 심각해지면서 조선 재정에도 긴축 요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선 내 인프라 구축과 관련해서 보자면 1922년에 종료될 예정이었던 함경선 건설이 1923년에도 완공하지 못하고 1928년까지 연기되었다는 점을 이유로 들 수 있다. 함경선 부설에 관해 1923년에 수정된 계획을 보면 1923~1924년에 100만 엔 이하의 건설비 추가가 확정되었고, 1926~1927년에 900만 엔이 넘는 금액을 집중적으로 추가하도록 했다. 그만큼 1923년 당시 일본 경제가 반동 공황의 여파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고, 3년 후부터는 식민지에도 공채발행을 늘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볼 수 있다.2)

언론은 평원선 부설이 당분간 연기되었다고 보도했다.3) 하지만 함경선과 비교해 보면 단순히 연기되었다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연기되었다고 한다면 함경선처럼 수정된 추가계획에서 삭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정 추가계획에서 삭제되었다는 점은 부설을 승인받은 지 1년 만에 평원선 부설은 사실상 무기한 중단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추가된 금액이 없을 뿐이지 기존에 책정된 건설비는 집행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아래 표는 1922~1930년 조선총독부 소속 주요 철도의 건설비 결산표이다. 이미 1922년부터 평원선에 책정된 건설비가 계획대로 집행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평원선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22년 조선총독부 예산으로 책정되었던 사업공채 전체 결산도 예산액의 70.4%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반동공황의 여파를 거스르고 예산을 책정했으나, 하반기로 가면서 자금 조달이 더 어려워졌던 상황을 반영한다.4) 공채 발행을 통한 재정 자금 조달은 식민본국이 발행부터 인수, 소화까지 전 과정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일본의 경제 상황과 독립적으로 운용될 수 없었다.
 
 
표 1. 1922~1930년 주요 노선 건설비 결산표
출처: 朝鮮總督府 鐵道局, 각년판 『朝鮮鐵道狀況』
 
 
1922년에 책정된 약 4만 엔은 고작 일부 노선에 대해 측량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5) 평원선이 부설을 승인받은 이후에도 조선철도 부설은 여전히 함경선에만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1923년 이후 계속 줄다가 1926년 이후 늘어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경제 상황과 연동되는 흐름이다. 함경선도 지연되는 상황에서 부설을 승인받았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여전히 반론이 나왔던 평원선이 우선권을 주장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평원선 부설의 희망을 더욱 낮추는 사건이 발생했다. 1923년 9월 일본에 발생한 관동대지진이다. 일본의 수도를 강타한 지진은 일본 재정정책의 중심을 본국의 재해복구로 집중시켰고, 철도부설 자금을 포함해 식민지에 발행하기로 한 사업공채계획을 대부분 축소하거나 축소시켰다. 1923년 조선사업공채 발행예산이 2천만 엔이었음에도 실제 결산액은 약 33%에 불과한 약 659만 엔6)에 머물렀던 것은 하반기에 발생한 지진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했는지 실감케 해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원선 부설을 재개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애물단지처럼 여겨졌던 평원선은 다시 연기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고, 1924년 1월 1일에도 부설을 승인받았으나 착공조차 하지 못한 노선으로 취급받게 되었다.7)
 
 
2. 새로운 경쟁자의 등장, 흔들리는 지역 공조
 
1925년이 되자 평원선 부설을 시작은 할 수 있을지 불안하게 만드는 주장이 돌기 시작했다. 이른바 ‘국경노선 우선론’이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평원선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노선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주장의 골자는 경의선을 타고 평양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위치한 신안주(新安州)에서 동쪽으로 사설철도 노선인 개천철도를 타고 가면 도착하는 개천(价川)에서 다시 북쪽으로 강계(江界), 만포(滿浦)에 이르는 만포선을 우선 부설하자는 것이었다.

함경선만 완공되면 다음 노선은 평원선이라고 생각했던 지역 자본가들에게는 깜짝 놀랄 소식이었다. 가뜩이나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일본 정부가 식민지 철도부설에 자금 조달을 축소하는 상황에서 함경선 완공 이후 2개 노선을 동시에 부설할 가능성은 없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평원선은 새로운 경쟁자를 만난 셈이었다. 1925년 시점의 언론 보도는 혼란스럽다. 만포선이 더 경제성과 국경 치안 유지에 중요하다는 주장과, 평원선이 군사수송에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 혼재했다.8)
 
 
그림 1. 1942년 현재 평원선 및 만포선 노선도
그림에서 10번 노선이 평원선, 11번 노선이 만포선이다. 서쪽 아래 평양에서부터 올라가는 2번 노선이 경의선이다.
출처: 朝鮮總督府 鐵道局, 1942.11 『朝鮮鐵道狀況』 33
 
 
평원선 부설에 힘을 쏟았던 지역 자본가들은 다시 부설운동에 나서야 했다. 평양, 원산, 진남포의 자본가들은 원산에서 개최되는 조선상업회의소연합회에 맞춰 「평원선 속성요망의 건」을 제출하고 기성회를 개최했다. 철도부설을 실제로 성사시킬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정부나 제국의회 그리고 조선총독부에도 청원서를 다시 제출하기 시작했다.9)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이미 제국의회에 부설 승인을 받은 노선에 대해 다시 부설운동을 펼쳐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26년이 되어서야 평원선은 비로소 노선 건설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의회 승인을 받은 지 4년 만이었다. 하지만 착공했다는 사실이 완공까지 순조롭게 이어질 수 있음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평원선은 착공하자마자 다시 만포선과 얽히게 된다. 1925년만 해도 평원선 우선이 원칙이라는 입장을 밝혔던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1년 뒤가 되자 만포선이 더 중요하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동서를 연결하고자 했던 평원선은 한반도 북부에서 만주로 향하는 만포선 구상에 번번이 발목을 잡히는 모양새였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만포선 주변에 자원이 많다는 점도 있었지만, 평원선은 평양과 원산에는 자원이 많아도 노선의 중앙 지점에는 공사도 어렵고 자원도 적은데 완공할 필요가 있냐는 의견을 제시했다.10)

시점을 1년 앞당겨 보면 당시 새롭게 조선총독부 철도국장에 부임했던 오무라 타쿠이치(大村卓一)의 행적이 눈에 띈다. 1925년 10월 4일 오무라 철도국장은 철도국 인사들과 함께 평양에 도착한다. 언론은 이 시찰을 두고 평원선과 국경 부근 예정 노선의 실지답사로 내년도부터 착수될 평원선 공사를 위한 작업이라고 보도했다.11) 이들이 평양 북쪽 순천(順川)에 들어가 정황을 조사한 것이 알려지자, 평원선이 순천을 통과한다는 소문이 돌아 순천 읍내 주민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보도도 이어졌다.12)
 
그런데 자세히 보면 당시 언론 보도처럼 평원선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의문시되는 부분이 많다. 자세히 보면 오무라의 동선은 평원선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언론 보도를 보면 오무라 일행은 평원선 예정지인 평원-순천을 거쳐 평안북도 만포진으로 향했다.13) 1942년 현재 조선철도망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림 1을 보면 평양과 개천 사이에 평안남도 순천이 있다. 이 지도는 두 노선이 모두 완공된 이후이므로 확인이 가능한 상황인데, 순천은 평원선과 만포선이 교차하는 역이다. 다시 말해 오무라 일행이 평양과 순천을 시찰하고 만포진으로 갔다는 사실은 사실상 만포선 예정 노선만을 답사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언론은 이를 두고 익숙하게 예정되어 있던 평원선을 언급했으나 이는 철도국의 속내와 달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역의 움직임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1925~1926년 당시 제국철도협회는 물론 조선상업회의소연합회까지 나서서 조선 철도망 계획 실현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때 각 지역 상업회의소의 철도부설 요구안을 보면 진남포와 평양상업회의소는 만포선 부설을 요구했다.14) 물론 평원선은 이미 제국의회의 승인을 받았고, 지지부진하지만 부설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 노선이었기에 상업회의소의 요구대상이 아니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이 평원선 부설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고, 만포선 우선론이 대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남포와 평양의 운동 방향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이러한 움직임들은 실체가 없는 허상이 아니었다. 1927년 4월 공포된 조선철도12년계획으로 실체를 드러냈다. 만포선은 이 계획의 신규 부설 노선으로 선정되었다. 물론 평원선도 해당 계획에 따르면 기존 계획노선 중 서둘러 부설해야 할 노선이었다. 그러나 평원선 부설을 원했던 지역의 입장에서는 이제부터 철도 부설이 더 어려워졌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전까지는 긴축정책에 따른 예산삭감이나 함경선 완공이 먼저라는 논리와 싸워야 했다면 이제는 12년에 걸쳐 부설한다고 하는 대규모 철도계획에 포함된 5개 신규 노선과 사업공채 발행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평원선 부설이 난항을 겪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올 정도였다.15) 실제로 평원선은 부설을 승인받은 지 4년만인 1926년에 착공하면서 1932년에 준공할 계획이었지만, 조선철도12년계획에 포함되면서 1935년 준공으로 연기되었다. 1922년에 제국의회의 승인받았을 당시 준공예정연도가 1930년이었으니, 두 번째 준공기한 연기였다.16)
 
지역은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아직 기공조차 하지 못했던 원산 측 인사들의 반발이 거셌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평원선 부설을 둘러싼 지역 인사들의 단일대오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앞서 평양과 진남포 상업회의소의 철도부설 요구안에서 균열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지역의 이해관계는 지역별로 다르게 존재했고, 대체재가 등장한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은 이윤극대화를 위한 공조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예상되듯이 커다란 사건이 터지지 않는 한 만포선과 평원선의 갈등은 점차 한쪽으로 무게추가 기울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이후 평원선과 만포선을 둘러싼 1930년대 각축전은 다음 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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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1923.02.09. 「第四十六回帝國議會衆議院 朝鮮事業公債法中改正法律案外二件委員會議錄 第二回」
2) 內閣, 1923 「朝鮮事業公債法 台湾事業公債法 樺太事業公債法中ヲ改正ス」 『公文類聚 第四十七編 大正十二年 第二十五巻』
3) 「鮮鐵事業方針 平元線은延期」 『동아일보』 1923년 5월 25일 
4) 박우현, 2019 「1920년대 조선사업공채 정책 변화와 재원조달의 부실화」 『한국사연구』 185, 135쪽
5) 1922.08.06. 「平元線路 實測」 『매일신보』 1922년 8월 6일 ; 「緊急한 鐵道網完成」 『매일신보』  1922년 1월 03일
6) 박우현, 2019 앞의 논문, 141쪽
7) 「朝鮮鐵道의資金 平元線은延期」 『동아일보』 1923년 9월 16일 ; 「明年度鐵道事業(上)」 『매일신보』 1924년 1월 1일
8) 「鐵道敷設 新計劃, 平元線보다 新安州 滿浦鎭 間이 緊急함을 說하는 者도 有」 『매일신보』 1925년 5월 30일 ; 「平元線과 國境線 資金考慮가 必要」 『시대일보』 1925년 6월 2일
9) 「平元鐵速成要望で」 『朝鮮新聞』 1925년 7월 10일 ; 「平元線期成大會」 『朝鮮新聞』 1925년 7월 12일 ; 「平元鐵を速成せよ」 『朝鮮新聞』 1925년 8월 13일 ; 「平元線速成運動, 兩地相呼應して沿線住民の調印を取る」 『朝鮮新聞』 1925년 8월 21일 ; 「平壤よりも東上委員-平元線運動に兼ね」 『釜山日報』 1925년 9월 7일
10) 「平元線 第一期線 十五年度에 工事着手 中間區는 一時中止?」 『매일신보』 1926년 2월 10일 
11) 「平元鐵道豫定線, 踏査に向つた大村鐵道局長一行」 『朝鮮新聞』 1925년 10월 6일
12) 「平元鐵と順川地方民, 鐵道局長の踏査に熱望」 『朝鮮新聞』 1925년 10월 7일
13) 「平元鐵道豫定線, 踏査に向つた大村鐵道局長一行」 『朝鮮新聞』 1925년 10월 06일 ; 「平元鐵と順川地方民, 鐵道局長の踏査に熱望」 『朝鮮新聞』 1925년 10월 7일
14) 전성현, 2011 『일제시기 조선 상업회의소 연구』, 선인, 297~304쪽
15) 전성현, 2017 「일제강점기 東海線 3線과 지역」 『석당논총』 69, 281쪽
16) 1927.02.23. 「第52回朝鮮事業公債法改正法律案外二件委員会議錄 第8号」,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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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朝鮮新聞』, 『매일신보』, 『시대일보』, 『동아일보』
『朝鮮鐵道狀況』
 
內閣, 1923 「朝鮮事業公債法 台湾事業公債法 樺太事業公債法中ヲ改正ス」 『公文類聚 第四十七編 大正十二年 第二十五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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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현, 2011 『일제시기 조선 상업회의소 연구』, 선인
 
박우현, 2019 「1920년대 조선사업공채 정책 변화와 재원조달의 부실화」 『한국사연구』 185
전성현, 2017 「일제강점기 東海線 3線과 지역」 『석당논총』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