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웹진기사 기획연재

[기획연재] 냉전시대 경계인의 고군분투기, 조명훈 평전 ⑨_예대열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11.04 BoardLang.text_hits 44
페이스북으로 공유 X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웹진 '역사랑' 2025년 10월(통권 68호)

[기획연재] 
 
 

냉전시대 경계인의 고군분투기, 조명훈 평전 ⑨

 


예대열(현대사분과)

 
 
2021년 제정된 「여순사건특별법」은 제2조 ‘정의’에 사건의 시기를 “1948년 10월 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 1일까지”로 규정했다. 이 법은 「제주4・3특별법」이 사건의 종료 시점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1954년 9월 21일로 정한 것을 준용해,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 1일로 정했다.
 
하지만 두 특별법은 사건의 기점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제주4・3특별법」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사건, 즉 1947년 3월 1일 관덕정 앞에서 벌어진 시위의 연장선상에서 4・3을 규정한다. 반면 「여순사건특별법」은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 1948년 10월 19일”을 기점으로 정하고 있다. 「제주4・3특별법」이 4・3 사건을 해방 공간의 연속선상에서 규정한다면, 「여순사건특별법」은 기점을 “일부 군인들”의 “명령 거부”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물론 특별법 조문이 학문적 연구의 범위와 시야를 제한할 수는 없다. 특히 국가에 의한 과거사 청산은 국가 폭력에 대한 책임을 명시한다는 의의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성격 자체가 국가의 기억 속에 편입되거나 국가주의 내러티브 안에 포섭될 위험성이 존재한다. 그간 여순사건의 ‘기억투쟁’은 14연대 봉기를 지역 사회와 분리시키는 것에서 출발했지만, 진상규명 과정에서 ‘항쟁론’이 대두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확대되어 왔다. 그런 점에서 여순사건 연구는 특별법의 규정에 구애받지 않고 제주 4・3과 같이 최소한 해방 직후 시기부터 함께 들여다볼 필요성을 제기한다.
 
실제 1948년 10월 20일 14연대 군인들이 순천에 입성하자, 지역 내 좌익들은 남로당 순천군당의 방침을 어기고 공개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여순사건 당시 순천의 상황은 남로당의 조직 장악 능력의 한계치를 넘어서서 도저히 조절할 수 없는 봉기 국면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렇다면 해방 공간 순천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비록 중학생 조명훈의 한정된 경험이기는 하지만, 당사자성이 반영된 일기를 통해 해방 공간 순천을 들여다볼 필요성이 있다.
 
조명훈은 『순천의 경제상황』을 작성하며 사회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는 해방 이후 순천에 생겨난 정당과 사회단체들을 일일이 방문하여 강령과 규약을 수집했다. 그가 조사한 정당과 사회단체는 공산당, 한민당, 애국당, 인민당, 인민위원회, 노동조합, 농민위원회, 노동청년동맹, 청년추진동맹, 프로예술동맹, 학도대, 소년군 등 총 12개였다. 그는 12개 정당・사회단체 강령을 분석해 이념과 지향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① 한민당, 청년추진동맹 →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지
② 인민위원회, 농민위원회, 공산당, 학도대, 노동조합, 노농청년동맹, 인민당 → 인민공화국 지지
③ 애국당, 소년군, 프로예술동맹 → 각자 독특
 
 
당시 조명훈은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이념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각당・각파로 분열되어 있는 모습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정당・사회단체에 대한 「비평」 말미에 “그런다고 우리는 임시정부 지지도 아니요, 또 인민공화국 지지도 아니다. 우리 학생은 참으로 공부 하나다. 정치 방면에는 아무 접촉도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적어도 그는 『순천의 경제상황』을 작성하던 1945년 말까지는 좌우 어느 편에 서지 않고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럼에도 그가 바라봤던 해방 당시의 정치 인식은 사뭇 날카로웠다.
 
 
각 당파를 돌아봐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인상은 단 한 곳도 튼튼한 당파는 없었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단원도 흐지부지하고 “강령이 있다냐?” 하고 그때 서야 힘들게 찾아서 준 데도 있었다. (…) 신탁 관리까지 나왔는데 12단체는 그대로 있다. 최후 목적이 같은 단체는 전부 통합하면 오죽 좋을까. (…) 내가 각 단체를 조사해 볼 때 간판들은 크지만, 속은 사무실 한 칸인데도 많이 있었다. 이렇게 전부 세계에 조선은 당파가 많이 있다고만 알려주는 것과 같다. 또 강령이 좋지 않은 데는 한 곳도 없다. 그러나 실제 그 행위는 강령과 적합할까?
 
 
미군 제69군정중대도 정당・사회단체의 활동을 비롯한 순천의 정치 상황에 주목했다. 그들은 1945년 10월 주둔하면서 특정 정당과 단체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시위나 소요 등의 발생 가능성을 우려했다. 하지만 12월까지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자, 순천을 위시한 관할구역 정치 조직들이 대부분 중앙과 연락망을 갖추지 못한 지역 조직에 불과하다고 판단 내렸다. 다만 한민당만이 전국적 영향력과 연결된 유일한 정치 단체로서 의미 있는 조직이라고 파악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69군정중대는 한민당을 가장 ‘합리적’인 정치 세력으로 간주하며 반인민위원회 입장을 드러냈다. 군정중대는 한민당 출신 김양수(金良洙)를 군수로 임명하고 이종수(李宗洙)를 경찰서장으로 유임시키는 등 우익 중심으로 지역 정치를 재편해 나가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순천의 좌우 갈등은 다른 지역에 비해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군정중대가 우익 세력을 직접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자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당시 대표적 좌우 갈등 사례는 이종수 경찰서장이 농민조합 대표인 정태중(鄭泰重)과 정홍모(鄭弘模, 鄭洪模)를 구금시킨 사건이었다. 1945년 12월 4일 ‘순천군 식량문제 타합회(打合會)’가 김양수의 주재로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농민조합 대표들은 다음과 같은 명분을 들어 소작료 3・7제를 주장하였다.
 
 
우리들은 처음에는 불납까지 결의하였었다. 그러나 민족 통일의 현 단계에 있어서 지주의 입장과 이익을 생각하고 또 일반 소비 대중의 식량문제에 노력하고 있는 미군정에도 협력하기 위하야 3・7제로 납입키로 100% 양보한 것이다. 그리고 3・1제와 3・7제는 3분(分)3리(厘)에 불과하니 최고를 3・1제로 제정한 군정 방침에 결코 위반된 것이 아니고, 이 3・7제는 전 조선 대중이 결의 지지한 것이다.
 
 
그런데 이종수 경찰서장은 농민조합 대표들의 주장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곧바로 구금시켜 버렸다. 순천지역 12개 정당・사회단체는 이종수의 사퇴를 요구하는 성토대회를 예정하고, 인민공화국 중앙위원회에 전달하기 위한 진정서를 작성하는 등 크게 반발하였다. 미군정도 순천에서 서울로 보낸 진정서를 중간에서 가로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며 수습에 나섰다. 결국 이 사태는 이종수가 반성의 취지로 사과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 시기 또 다른 좌우 갈등 사례는 1946년 1월 21일 벌어진 광복군 순천지부 소속 우익 청년들의 좌익 단체원들에 대한 테러였다. 이정열(李正烈, 한민당 소속)을 필두로 한 광복군 출신 20여 명은 당일 새벽 순천청년연맹을 습격해 연맹원 김일역(金日譯)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검시 결과 그는 일본제 7.7mm 소총에 총상을 입고 두 군데 자상을 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이 알려지자 시신이 안치된 장례식장 주변에는 400~500여 명의 군중이 몰려들었고, 해산시키기 위해 동원된 한민당원이 폭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조명훈이 해방 초기 순천에서 벌어진 격동의 정치 변화 속에서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현재로서 알 수는 없다. 현재 남아있는 해방 이후 일기가 1946년 7월 10일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다만 일기에 담긴 속마음은 『순천의 경제상황』을 조사하며 좌우 어느 편에 속하기보다 공부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했던 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자신의 꿈을 향해 정진하던 청년의 삶에 어떤 파문이 일었던 것일까?
 
청년 조명훈의 삶이 변화하게 된 계기는 순천중학교에서 참여한 학생운동의 경험 때문이었다. 그는 ‘일심회(一心會)’라는 좌익계열 학생운동 조직에서 활동하면서 1946년 ‘국대안 반대 투쟁’과 1947년 ‘3・1절 시위’ 등에 참여했다. 결국 이러한 경험은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벌어졌을 때 “명훈이가 가담하지 않으면 누가 가담했겠느냐”며, 학교를 퇴학당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조명훈을 학생운동으로 이끈 사람은 소설가 김승옥의 외삼촌이기도 한 중학교 선배 윤현(尹玄, 1929~2019)이었다. 윤현은 본인 회고에 따르면 당시 순천 지역 학생운동의 리더였다. 그는 집에 사회주의 관련 서적만 200~300여 권이 있을 정도로 이론에 해박했고, 19세이던 1947년 조선공산당 후보 당원에 오른 이력을 갖고 있었다. 그를 당원으로 추천한 사람은 순천중학교 지리 선생님으로, 일제 말기 학병으로 출정했다가 옌안(延安)으로 도망쳐 팔로군 장교가 된 사람이었다.
 
윤현은 여순사건 당시 순천 학생동맹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14연대 군인들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가 하산을 선택해 한국전쟁기 미군 통역관으로 복무했다. 그는 휴전 이후 신학 공부를 시작해 목사가 되었고, 1970년대 ‘오적(五賊) 필화 사건’과 ‘『다리』지 필화 사건’ 등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해외 인사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 1972년 국제 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 한국지부를 창설하지만, 냉전 해체 이후에는 1996년 ‘북인인권시민연합’을 설립해 북한민주화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조명훈은 1946년 5월 윤현을 처음 만났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 학생들이 순천중학교를 떠나게 되었고, 결원이 생긴 만큼 한국인 학생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윤현은 일본 오사카 태생으로 해방이 되자 아버지 고향인 순천으로 돌아와 순천중학교에 편입했다.
 
조명훈은 윤현의 잘생긴 외모와 큰 키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첫인상을 “love나 하고 편지나 주고받고 하는 건방진 청년”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조명훈은 폭력적인 ‘풍기부(선도부)’에 당당히 맞서는 모습을 보고 그를 동경하게 되었다. 조명훈은 어느 날 일기에 정치가가 가져야 할 요소로 “교양, 언변, 영도력, 무력, 외모”를 꼽았는데, 윤현은 그것을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
 
조명훈은 윤현의 인간적 매력에 빠지자 그와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윤현 또한 머리 좋고 영민한 조명훈을 눈여겨봤다. 그러던 어느 날 윤현이 조명훈을 불러 말했다. “우리는 모아서 서로 공부하여 가세. 모르는 데는 서로 묻고”. 그날 이후인 1946년 6월 2일 학내 “every class의 best boy”들이 윤현의 집에 모였다. 학생들은 결성식을 진행하며 모임의 이름을 ‘일심회’라고 정했다. 그리고 학교가 아닌 순천 시내에 솟아 있는 “죽두산(竹頭山, 죽도봉)”에서 주기적으로 회합하며 결의를 다졌다.
 
 
 
----------
참고문헌
 
조명훈, 『Mind』 13, 1946년 7월 10일 ~ 1947년 3월 13일
趙明勳, 1946 『順天의 經濟狀況』
『光州民報』, 『大邱時報』, 『全國勞動者新聞』
 
Headquarters, 69th Military Government Company, 2001 「Military Government History(1946.5.23)」 『美軍政期 軍政團・軍政中隊 文書』 5,  國史編纂委員會
General Headquarters, 1945~1948 「G-2 PERIODIC REPORT(1946.1.23.)」, USAFIK: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김득중, 2009 『‘빨갱이’의 탄생-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선인
북한인권시민연합, 2020 『윤현, 인권의 수레바퀴를 돌리다』, 생명과 인권
 
김미영, 1999 「인권운동의 한길, 윤현 목사」 『시대정신』 9・10
순천대 10·19연구소, 2021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    법」 『시선 10・19』 4
우종창, 1988 「“平壤 다녀왔다” 在西獨 정치학자 趙明勳 박사는 누구인가」 『週刊朝鮮』     1006
예대열, 2024 「‘망각(忘却)’과 ‘비등(沸騰)’의 공존: ‘여순 10・19사건’ 이후 전남 동부 지역민    들이 ‘기억투쟁’ 고찰」 『탐라문화』 72
임송자, 2019 「여순사건과 순천지역 좌・우익 세력의 동향」 『역사학연구』 73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2003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최원식・임규찬 엮음, 2002 「좌담: 4월혁명과 60년대를 다시 생각한다」 『4월혁명과 한국문학』,     창작과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