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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북한 인물열전 시리즈 ④_박창희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10.03 BoardLang.text_hits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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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9월(통권 67호)

[기획연재] 
 
 

북한 인물열전 시리즈 ④:

북한 선전-선동의 설계자 김창만
 


박창희(현대사분과)

 
 
이 글의 주인공은 김창만(金昌滿: 1912~?)이라는 인물이다. 사망 시점은 불명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에 종사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북한의 선전-선동(Propaganda-Agitation) 부문을 이끌었다. 김일성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서열 5위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하던 때에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의 실종 혹은 실각에 관한 기록은 ‘숙청’의 가능성을 가리키지만, 정작 북한의 공식 역사에서 숙청의 경위는 물론 살아생전의 활동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김창만은 북한의 역사에서 완전히 ‘배제’된 유령과 같은 존재이다. 박헌영과 남로당 출신들한테는 ‘미제 간첩 도당’, 최창익을 비롯한 연안계 인사들과 박창옥 등의 소련계 인사들에게는 ‘반당 종파분자’, 그리고 박금철‧이효순 등의 갑산파에게는 ‘부르주아‧수정주의 분자’라는 낙인을 찍으면서 역사에 기록한 것에 비추어보면, 이례적이다.
 
김창만이 실각한 시기는 1966년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대표신문 『로동신문????을 추적하면, 김창만은 1965년 11월 17일 ‘한일조약 분쇄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주석단의 서열 1위로 참석했다. 그러나 그 후 1966년 내내 당과 정부의 공식 행사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1967년의 러시아(당시 소련) 문서에는 김창만이 ‘친중국’적 활동 때문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제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66년은 북한과 중국 사이의 불화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이처럼 숙청의 경위는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지만, 역사에서 배제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하여 이 글에서는 북한이 역사에서 지워버린 김창만의 행적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김창만은 1912년 함경남도 영흥군의 중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중동학교에 다니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종사했다. 항일운동 초기에는 이상조 등과 함께 김구 진영에서 활동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구 진영에서 이탈하여 조선민족혁명당과 지하조직인 조선청년전위동맹에 가담했다. 1938년 10월 김원봉의 주도하에 창설된 조선의용대에 합류하였으며, 화북으로 옮긴 조선의용대와 함께했다. 1939년에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42년 7월 화북조선독립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지휘부에서 활약했다. 김창만의 항일운동 경력에서 특징적인 점은 유동선전대장, 정치조 활동선전주임, 정치위원, 적구공작반 선전책임자 등과 같은 ‘선전’ 계통의 간부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김창만은 그해 12월 화북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 동지들과 북한으로 귀국했다. 무정, 박일우, 허정숙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에 입당했다. 1946년 2월 북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선전부장으로, 8월에는 신민당과 합당하여 탄생한 북조선로동당(이하 북로당)의 초대 선전선동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1966년에 실각(숙청)당할 때까지 20년 동안 주로 선전-선동 부문의 지휘자로 활동했다.

여기서 잠시, 선전-선동이란 무엇인지 간략하게나마 짚어보자. 사회주의자에게 선전-선동은 대중을 혁명 주체로 이끄는 작업을 의미한다. 선전이 배움 또는 이론이라면 선동은 실천에 해당한다. 즉 선전-선동은 대중을 사회주의적 지식 체계와 사상으로 무장시켜 혁명 활동에 종사케 할 때 완성된다. 그렇다면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던 시기에 김창만이 생각한 선전-선동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해방 이후 조성된 혁명적 정세와 당의 노선‧정책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결부시켜 이해하고 실제 사업에서 창조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조선 혁명의 주체(전위)’를 양성하고자 했다.

김창만은 38선 이북의 국가건설 시기 당 선전선동부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선전-선동의 토대를 구축하고 체계화하는 데 주력했다. 그가 구상한 선전-선동의 체계화는 크게 세 가지 방면으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는 당 선전선동부가 내각, 언론출판, 문학예술, 사회단체 등을 총괄적으로 지휘하는 위계적인 선전-선동 사업체계를 구축하는 것, 두 번째는 당원들의 조직-사상적 통일을 담보하는 당원교육제도를 확립하는 것, 세 번째는 조선의 독자적인 혁명노선을 만드는 것이었다.

세 가지 중에서 주목할 부분은 당원 교육과 조선 혁명에 관한 독자적 이론화 작업이다. 김창만은 이 두 가지가 ‘조선 혁명의 주체’를 양성하는 데 있어서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선전선동부에서 작성한 ‘유일 제강’(교수강령)에 따라 제작한 교재로 전체 당원을 교육하는 제도를 확립하였다. 유일 제강의 내용은 ‘민주개혁’이 상징하는 북한의 혁명적 경험(현실)과 마르크스-레닌주의와의 조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었다.

김창만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일어난 변화가 조성한 혁명적 정세(현실)는 기존의 혁명이론이나 다른 나라의 경험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특히 북한에서 추진된 민주개혁을 “풍부한 내용과 경험으로서 가득 찬 역사적 변혁”으로 규정하고, 이것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여 “역사적 경향과 법칙성, 교훈을” 도출하여 향후 투쟁의 “거울”로 만드는 사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곧 북한의 혁명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독자적인 혁명노선을 만들자는 의미였다. [김창만, 「북조선 민주개혁의 력사적 근거와 그 사회적 경제적 의의」 『인민』, 1949년 12월호] 이 측면에서 보면 자체적으로 설정한 제강에 따라 교재를 만드는 일은 독자적 혁명노선을 이론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그림 1. 김창만, 1947 『모든 것은 조국 건설에』, 로동당출판사 표지와 목차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김창만의 독자적 혁명노선의 정립 시도는 문화건설 노선인 ‘민주주의 민족문화’론으로 이어졌다. ‘민주주의 민족문화’론은 문학예술인 단체 북조선예술총연맹의 조직적 역량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김창만은 문화선전을 전담하는 당 문화인부(부장 한설야, 부부장 안막)를 통해 문학예술인 역량을 선전-선동 체계 속에 끌어들였다. 해방 조선의 새로운 문화건설의 방향과 내용을 둘러싼 논의는 격렬한 논쟁을 벌인 것이라기보다는 합의된 대강의 틀 속에서 이루어졌다. 합의된 대강은 ‘민주주의적’인 내용에 ‘민족적’ 형식을 의미했다. 민족문화의 방향에 대해 전체적인 견지에서 논하는 동시에 문학, 연극, 미술, 음악과 같은 부문 예술에 관한 논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논의가 전개되던 시기에는 토지개혁을 위시한 ‘민주개혁’의 추진, 북로당의 창당, 북조선인민위원회 선거와 같은 혁명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민족문화건설을 주제로 한 논의는 이러한 정치・경제・사회적 격변에 호응하는 이북 문학예술계의 자발적인 대응이기도 했다.
 
 
   
그림 2. 『문화전선』 2집(좌)과 5집(우)의 목차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북한에서 문화건설에 관한 논의를 주도한 안막, 안함광, 윤세평 등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고 있었지만, 소련식 사회주의 문화의 단순한 수용이나 이식을 통해 해방 조선의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려고 하지 않았다. 안막은 “우리들의 맑스-레닌주의 학습은 추상적인 공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맑스-레닌주의 학습이어야 하며, 조선의 구체적인 환경에 적응한 민족형식을 통한, 다시 말하면 ‘맑스-레닌주의 조선화’를 위한 학습이어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윤세평 역시 “우리는 마땅히 맑스주의의 보편적 진리와 조선 혁명의 구체적 실천을 완전히 정당하게 통일하여야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민주주의 민족문화’론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소련공산당이라는 강력한 권위와 영향력 아래에서도 조선의 ‘민족적 특성’을 반영하는 독자적인 사회주의 문화를 건설하려는 의지가 투영된 문화건설 노선이었다.

그런데 선전선동부문에서 김창만과 함께 지도적 지위에서 활동하고 있던 소련계 인사들은 김창만이 주도하는 독자적 혁명노선 정립 시도에 대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소련공산당을 무시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소련계 인사들은 당 기관지 『근로자』의 지면을 통해 김창만의 시도를 “정치적으로 뒤떨어진” “무지에 기인한” “자존과 자만성”이라고 비난하면서, 스탈린의 저서 『소련공산당(볼쉐위끼)』에는 “세계에서 가장 위신 있고 권위 있는 정당인 레닌-스탈린당의 다년간의 영예스러운 모든 역사적 도정과 경험이 실려 있으며 또 과학적으로 해명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김창만에 대한 명백한 반대였다. 결국 김창만의 시도는 소련공산당의 권위를 앞세운 소련계 인사들의 반대에 부딪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고, 김창만은 좌천되었다.
 
 
그림 3. 『쏘련공산당(볼쉐위끼)력사 학습재료』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제동이 걸렸던 김창만의 독자적 혁명노선의 정립 시도는 1950년대 중반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1955년 김일성이 ‘사상 사업에서 주체’를 제기한 후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김창만은 조선로동당 부위원장으로 부활하였다. 그에게는 선전-선동 및 교육에 관한 총지휘 권한이 주어졌다. 1961년 4차 당대회에서도 부위원장직과 선전-선동에 관한 권한은 유지되었다. 1955년 ‘주체’ 제기 이후 1965년 ‘주체사상’이라는 용어가 『로동신문』에 공식적으로 등장할 때까지, 10년 가까이 김창만이 사상 사업이 핵심인 선전-선동 부문의 최고 책임자였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무엇일까.

1962년에 『조선 혁명 수행에서 김일성 동지에 의한 맑스-레닌주의의 창조적 적용』(1962년 4월, 과학원출판사)이 출판되었고, 1964년판 『대중정치용어사전』에서는 ‘주체’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졌다. 사전에 따르면, 주체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일반적 원칙과 다른 나라의 경험을 자신의 실정에 창조적으로 적용하여 혁명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체사상은 북한의 독자적인 혁명노선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여기에 “김창만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학과 예술에서 민족주의와 교조주의적 시각을 퍼뜨리는 데 일조한 민족적인 구호인 ‘주체(самобытность)’의 창시자”라는 1963년 소련공산당의 기록과 김창만의 행적을 연결할 때, 그가 북한 역사에서 ‘배제’된 까닭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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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로동신문』
1957‧1964 『대중정치용어사전』, 조선로동당출판사 
강만길‧성대경 엮음, 1996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창작과비평사 
국사편찬위원회‧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1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소장 북한 인물 자료 Ⅱ』, 민속원
김창만, 1947 『모든 것은 조국건설에』, 로동당출판사
박창희, 2021 「해방 직후 북한의 선전선동체계와 군중문화사업(1945~1950)」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서동만, 2004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 선인
이종석, 2001 『북한-중국관계 1945~2000』,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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