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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냉전시대 경계인의 고군분투기, 조명훈 평전 ⑧_예대열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10.03 BoardLang.text_hits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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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9월(통권 67호)

[기획연재] 
 
 

냉전시대 경계인의 고군분투기, 조명훈 평전 ⑧

 


예대열(현대사분과)

 
 
조명훈은 해방된 조국에서 자신의 성격과 재능을 고민하며 청운의 꿈을 하나씩 키워나갔다. 그는 언어에 천재적 감각을 지녔고 문학, 미술, 음악 등에도 소질을 드러냈다. 그가 남긴 중학 시절 일기나 편지를 보면 상당 분량을 영어로 썼고, 일기 곳곳에 혹은 별도의 문집을 만들어 시, 수필, 기행문 등을 남겼다. 그는 ????순천의 경제상황???? 결론에 다음과 같은 다짐을 적으면서 시대의 흐름에 의탁하며 자신의 성공을 갈망했다.
 
 
Whatever talent a man may possess is of no use to him unless that talent is the servant of his character. Men who would succeed must be abreast of the times.
(재능을 가졌는가 안 가졌는가 하는 것은 그의 재능이 성격에 맞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다.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아야만 한다.)
 
 
중학생 조명훈의 꿈은 외교관이었다. 그는 향후의 인생 계획을 나이에 따라 구체적으로 세울 만큼 신국가 건설에 이바지하겠다는 목표는 물론 입신에 대한 욕망도 컸다. 그는 향후 인생 계획을 21세(1951년) 서울대 정치학과 입학, 25세(1955년) 동 대학원 입학, 27세(1957년) 외교부 입사, 53세(1983년) 외교부 장관 취임 등 구체적으로 설계했다. 그는 이 계획을 세우며 “조국에 일생을 다하겠다”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3천만 (동포)에게 맹세!!”했다.

이즈음 조명훈은 자신의 호를 ‘야루가람’이라고 지었다. ‘야루가람’은 Yalu River 즉 압록강을 뜻한다. 그가 호를 ‘야루가람’으로 정한 이유는 압록강이 ① “우리나라를 꾸준히 지켜준다(=애국심)”, ② “수풍발전소에서 전력을 보내준다(=인민의 행복 도모)”, ③ “유유낙관의 경치는 우리로 하여금 침착한 마음을 길러준다(=침용沈勇)”는 의미 때문이었다. 이때 만든 ‘Yaru’는 이후 조명훈이 미국, 프랑스, 독일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의 영문 이름 “M.Y.Cho”의 middle name으로 사용되게 된다. 후일 그는 위에 새겨진 의미 외에도 고향 순천이 한반도 남단에 있는 도시인 만큼, ‘Yaru’ 안에는 남북의 양끝단을 잇는 통일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림 1. 조명훈, 『Mind』 13, 1947년 2월 16일
 
 
조명훈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일기장 사이에 책갈피처럼 끼어 있는 성적표를 보면, 그는 인근에서 수재들이 모인다는 순천중학교에서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특히 그는 학교 수업뿐만 아니라 독서 활동에 열정을 보였다. 순천은 1911년 일본인에 의해 근대적 의미의 도서관이 처음 만들어졌고, 1925년에는 농민들이 소작쟁의 과정에서 ‘민중도서관’을 설립하는 등 “도서관의 도시”라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해방 당시에도 순천에는 ‘옥천서점’, ‘대중문화사’, ‘향토문화사’, ‘보문당’, ‘삼신당’ 등 책을 구해 읽을 수 있는 곳이 많았다. 조명훈은 이곳에서 언어와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다방면의 주제에 관해 독서하면서 생각의 힘을 키워나갔다.

그렇다면 조명훈은 어떤 책을 읽었을까? 그는 언어에 소질이 있었던 만큼 한글학자 최현배(崔鉉培)가 쓴 『한글갈』(1940), 『우리말본』(1937), 『글자의 혁명』(1947) 등을 찾아 읽었다. 그는 해방 이후 출간된 『글자의 혁명』을 읽은 후 일기장에 “더욱 한글 가로쓰기의 필요를 느낀다”는 감상을 남겼다.

최현배가 주장한 가로쓰기란, ① 음절을 세로줄(縱書)이 아닌 가로줄(橫書)로 쓰는 것이요, ② 모든 글자를 낱소리(字母)로 풀어서 쓰는 것을 말한다. 즉 가로쓰기는 단지 옆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풀어서 쓰는 것, 쉽게 말해 ‘감’이 아니라 ‘ㄱㅏㅁ’으로 표기하는 것이다. ‘가로쓰기(풀어쓰기)’는 조선어학의 창시자인 주시경(周時經)이 제안한 것으로, 당시 남북의 많은 언어학자들이 유력시하던 한글의 최종적인 발전 형태였다.

남북의 대표적 언어학자 최현배와 김수경(金壽卿)이 가로쓰기를 주창한 이유는 훈민정음이 한자 한 글자에 대응하도록 조립되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즉 조선어 문자 체계가 사각형 모양이 된 것은 역사적 경위의 산물이지, 그 필연성이 언어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문제의식이었다. 그래서 최현배는 “정치적 해방을 얻어 자주적 문화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한자를 버리고 한글을 써야 하며, 한글을 쓸 때는 ‘가로쓰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명훈은 최현배의 주장에 공명해서인지 일기장에 중요한 단어를 쓸 때나 습작한 문학작품의 제목을 표기할 때 자주 ‘가로쓰기’를 했다. 그와 친구들은 해방 공간이 계몽과 연대의 시대였던 만큼 최현배의 책을 같이 구해 함께 읽으며 “풀어쓰기에 대하여 얘기”했다. 이러한 경향은 1946년 당시 국립도서관(현 남산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된 책이 『한글마춤법통일안』(조선어학회, 1946)과 『우리말본』(최현배, 1937)이었다는 점에서 전국적으로 마찬가지였다.

한글은 일제 식민 통치로 국가가 부재한 상태에서 표준화되지 못한 채 1920~1930년대를 거치며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주시경을 위시한 한글학자들의 작업이 민족운동 차원에서 지속되었지만, 그 권위는 현실적으로 민간의 임의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해방 이후 한글의 사용은 당위에도 불구하고 쓰는 방법에 대한 혼란이 지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명훈의 최현배 읽기는 단지 언어적 감각이나 재능을 넘어선 ‘민족적’ 문제에 대한 관심의 표출이었다.

한편 조명훈은 시, 소설, 수필 등 문학작품을 즐겨 읽었다. 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독서 목록은 이광수(李光洙)의 『젊은 꿈』(1914), 민태원(閔泰瑗)의 『청춘예찬』(1929), 이기영(李箕永)의 『민촌』(1927)과 『고향』(1933), 임화(林和)의 『우리 오빠와 화로』(1929), 김기진(金基鎭)의 『청년 김옥균』(1937), 이태준(李泰俊)의 『사상의 월야』(1941), 박장희(朴章熙)의 『국문학선』(1946), 박종화(朴鐘和)의 『청자부(靑磁賦)』(1946), 윤백남(尹白南)의 『조선의 마음』(1946) 등 필자와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특히 조명훈은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이기영, 임화, 김기진, 이태준 등 일제하 카프(KAPF) 혹은 해방 이후 좌익 계열에서 활동했던 문인들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그는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를 읽고 나선 “눈물이 나온다”는 짧은 감상을 남겼고, 이기영의 『민촌』을 읽은 날에는 “오늘은 비가 아주 쏟아붓는다. 우리 사랑하는 농민들은 아마 춤을 추고 있을 것”이라며 기뻐했다. 어느 날에는 학교에서 이태준의 소설을 읽다가 우익 교사에게 걸려 독서를 금지당하자, 일기장에 “착취란 닭에다가 늘 모이를 주곤 그 닭이 알을 낳으면 그것을 내 것으로 한다”는 말을 적어놓기도 했다.

조명훈이 카프 계열 소설을 즐겨 읽었다고 해서 편향된 독서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여타의 학생들처럼 연애, 모험, 괴기, 탐정물 등 대중적 취향의 통속물에서부터 인간 본연의 심연을 다룬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서를 통해 예비 지식인으로서 교양을 쌓았다.

다만 조명훈이 읽은 책은 여전히 일본어로 되어 있는 것이 많았다. 그가 읽은 작품은 오카모토 키도(岡本綺堂)의 『修禪寺物語』(1918), 요시다 겐지로(吉田絃二郞)의 『人間苦』(1920), 기쿠치 유요(菊池幽芳)의 『彼女の運命』(1923), 고가 사부로(甲賀三郞)의 『幽靈犯人』(1929), 하기와 슈타로(萩原朔太郎)의 『人生讀本』(1936) 등이었다. 또한 대학 수험생들을 위한 잡지 『螢雪時代』도 빠지지 않고 읽었다.

일제하 조선인은 한글, 한자, 일본어를 모두 알아야 온전한 문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조명훈과 같은 해(1931년)에 태어난 소설가 박완서(朴婉緖)는 독서를 좋아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책이란 응당 일본어로 된 것인 줄 알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소학교 때 일본어로 번역된 서양 동화를 즐겨 읽었고,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일본어로 된 로맨스물을 탐독하며 문학적 소양을 쌓았다. 일본어를 통한 문화적 세례와 성장은 해방 후에도 이어져 한국전쟁 이후 정신적 곤궁함을 메워주었던 것도 일본어로 된 문학작품이었다고 한다.

박완서와 동년배인 조명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박완서가 자신의 문학적 체험과 언어 감각 속에 들어있는 일본을 예민하게 인식하고 청산 혹은 극복했던 것처럼, 조명훈도 일본(어)을 통해 쌓은 지식을 자기 안에서 소화시켜 신국가 건설의 자양분으로 삼고자 했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지배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관습을 수용하고 학습하는 과정이지만, 독자 스스로 그 의미를 일상의 공간에서 재구성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작가의 의도는 읽는 사람의 독서를 통해 실현되고, 작품의 온전한 사회적 의미는 수용자의 사회적・주체적 조건 속에서 본질적으로 규정된다. 그런 점에서 중학생 조명훈에게 독서는 역동하는 시대의 징후이자 낡은 세상의 모순을 돌파하기 위한 무기였다. 그것은 이후 그가 보인 행동과 실천에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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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조명훈, 『Mind』 13, 1946년 7월 10일 ~ 1947년 3월 13일
조명훈, 『Mind』 14, 1947년 3월 14일 ~ 1947년 5월 7일
조명훈, 『Mind』 15, 1947년 5월 8일 ~ 1948년 1월 23일
조명훈, 『Mind』 17, 1948년 11월 29일 ~ 1948년 12월 27일
趙明勳, 1946 『順天의 經濟狀況』
「김윤걸 인터뷰」, 서울역 부근 카페, 2024년 5월 8일
 
강성호, 2024 『대한민국 도슨트 순천』, 북이십일
박완서, 2002 『두부』, 창작과비평사
이타가키 류타 지음, 고영진・임경화 옮김, 2024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
천정환, 2003 『근대의 책 읽기』, 푸른역사
최현배, 1947 『글자의 혁명』, 군정청 문교부
 
고영진, 2025 「최현배의 문자개혁론-『글자의 혁명』을 중심으로-」 『동방학지』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