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타협운동과 합법운동의 모호한 경계
“식민지 조선의 상황은 일본 본국에 비해 억압의 정도가 훨씬 심했다. (중략) 일제하 한반도 내에서는 국외보다 더욱 활발히 다양한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중략) 이들 운동은 대부분 비록 반제국주의와 절대 독립을 표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운동의 주요한 부분을 이루었다. (중략) 일제 본국과 차별되는 식민지 조선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고 차별적 식민 통치에 대한 도전이었다.”
49쪽
이 책에서는 일본 본국과 다른 식민지 조선의 처지를 직시하는 동시에 그런 엄혹한 상황에서 벌어진 다양한 민족운동의 의의를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찍이 나미키 마사히토(並木真人)가, 국외 운동에 정통성을 두고 국내 운동 및 사상을 철저하게 단죄하는 경향을 ‘망명자 사관’이라고 비판한 것과 상통한다(並木真人, 2003, 2쪽).
이런 관점에서 “1920년대 동아일보 계열을 비롯한 국내 민족주의 세력의 민족운동을 일제에 타협하는 자치운동의 범주가 아니라, 민족운동의 일환으로서 사회개혁 운동 또는 합법적 정치운동의 범주에서 파악해야 한다.”(563쪽)고 주장한다. 그리고 1922년 동아일보가 “문화정치하의 중앙정치는 우선 조선총독부의 예산이 세금을 납부하며 직접 생활에 영향을 받는 조선인에게는 아무런 발언권도 주지 않은 채, 일본 국회에서 일방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에서 조선인에게 자유와 권리가 전혀 보장되지 않는 것으로 무단정치와 변함이 없다”(『동아일보』 1922년 1월 13일)면서 정치적 자유의 허용을 주장한 것을 소개한다.
이 책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을 막론하고 민족운동의 지도자들과 민족 엘리트들은 광범한 대중을 민족운동에 동참시키기 위해 언론을 비롯한 각종 합법적 기관들을 설립하고 이를 이용해서 대중의 당면한 일상적 이해와 제반 민주주의적 권리를 실현하는 합법적 정치운동을 전개했다.”(50쪽)고 평가한다. 아울러 “1920년대 전반 민족주의 세력의 운동을 자치운동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 획득을 위한 사회개혁 운동 및 정치운동으로 파악해야”(566쪽)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개혁 운동’은 다른 문제이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합법적 정치운동’은 ‘타협적 자치운동’과 얼마나 다른가. 자치운동이야말로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 획득”을 위한 것 아닌가. ‘합법적 기관’을 이용해 ‘당면한 일상적 이해와 제반 민주주의적 권리를 실현’하는 운동은 민족적이고, ‘타협적 자치운동’은 반민족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도 “합법적 정치운동은 그 합법적 형식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식민권력과의 협상과 타협을 필수적으로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565쪽)고 밝혔다. 적어도 식민지 조선 국내에서는 합법, 타협, 자치가 서로 얽혀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6. 신간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책은 “1920년대 중반 ‘민족적 중심단체’ 건설 주장”에 대해, “이러한 움직임은 타협적 자치운동을 위한 것보다는 합법적 대중정치 운동론의 전개 과정과 관련되어 있는 것”(331쪽)이라고 분석하고 신간회를 “일제 지배의 틈새를 비집고 합법적 영역을 최대한 이용하여 창립된 정치운동 단체”라고 평가했다. 다만 신간회가 “비타협주의와 기회주의 배격을 표방했지만, 그 형식은 일제의 승인을 받은 합법적 운동단체로서 조직되었다.”(363쪽)고 설명하고, “합법운동 조직을 모색하는 이상 그들에게 있어 타협과 비타협의 문제는 선차적인 것이 아니었다”(367쪽)고 덧붙였다.
실제 송진우는 ‘타협적 자치론자’인 최린과 천도교 신파를 신간회에 끌어들이고자 했다(360쪽). 또한 “현실 생활에서 기초한 정치운동이 ‘구차한 타협’ 또는 ‘협조’라고 하는 것에 상관없이 움직일 수 없는 ‘엄숙한 사실’이라고 주장”(『동아일보』 1926년 11월 12일)(370쪽)하며, 사회주의자에게 현재 민족주의 세력이 추진하는 현실 정치운동 조직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표되는 사회주의자의 ‘정우회 선언’을 예고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이 책은 “1930년 당시 신간회 지도부가 합법적 운동 경향을 보인 것, 또한 청총(조선청년총동맹)의 간부를 비롯해서 일군의 사회주의자들이 합법적 운동 경향성을 보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합법운동을 중요시하는 운동 경향이 일제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타협적 자치운동과 연결되어 전개되었는가하는 의문이 제기된다.”(406쪽)고 밝히고 “합법적 영역에 있는 합법적 대중정치 운동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일제 관헌은 이러한 움직임을 독립운동이 아닌 자치운동으로 파악하고 있었다.”(322쪽)고 설명했다.
다만 동아일보는 일찍이 “일본인의 보선(보통선거-인용자)운동이 민중의 자각에 기초한 국가 생활의 ‘자결 자치’를 의미한다면, 각 민족의 해방운동도 역시 “동일한 자각에 기본한 민족적 단체생활의 자결 자치를 의미”(『동아일보』 1922년 2월 16일)(305쪽)한다고 주장했다. 이광수는 1924년 1월에 발표한 〈민족적 경륜〉에서 조선인에게 ‘정치적 생활’이 없는 이유로 총독부의 탄압과 아울러 “일본의 통치권을 승인하는 조건 밑에서 하는 모든 정치적 활동, 즉 참정권, 자치권 운동 같은 것은 물론이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독립운동조차도 원치 아니하는 강렬한 절개 의식”의 존재를 들었다.
신간회 설립 과정에서 동아일보가 제시한 “‘민족적 훈련’을 통해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에 헌신할 수 있는 민족적 대감정을 가지게 하고, 혁명을 완성하는 자유·평등·박애의 대사상과 현대 입헌정치의 ‘훌륭한 제도’를 수립할 수 있는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의 대이상을 배워나갈 때 가능한 것”(『동아일보』 1926년 10월 17일)(366쪽)이라는 주장은 이광수가 제기한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민족적 경륜(2)」, 『동아일보』 1924년 1월 3일)(257쪽)는 주장과 과연 얼마나 다른가.
7. 지방 의회 선거와 참여 전술
1931년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동아일보는 1930년 9월 16일 평양에서 시작하여 1931년 4월 4일 군산을 마지막으로 전국 31개 도시에서 동아일보 지국 주최로 지방 발전 좌담회를 개최했다. 이태훈은 동아일보가 사실상 선거유세라 할 수 있는 순회좌담회를 통해 지방선거 국면에 개입하여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 한 것으로 평가했다(이태훈, 2011, 151쪽)(427쪽).
그러나 이 책에서는 제1회 평양 좌담회를 보면 참가자 모두 서북 기독교 세력 그리고 그와 연결된 인물이었는데 그들 중 1931년 지방선거에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부회나 읍회, 도회는 전혀 논의조차 되지 않은 사실에 주목했다(427~428쪽).
아울러 1930년 3월에 조선총독부가 ‘조선 지방자치권 확장안’을 일본 각의에 제출하면서 지방행정제도 개정의 구체적 내용이 알려졌을 때, 동아일보가 이를 강력히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한 점을 소개했다(401쪽). 무엇보다 지방선거 개편안이 확정되었을 때 동아일보가 “유권자 수에도 조선인이 일본인에 대등치 못한 제도를 만든 지방자치제에 대하여서는, 오인은 더구나 관심이 적어짐을 금치 못한다.”(『동아일보』 1931년 1월 29일)(403쪽)고 밝힌 점을 들어, 동아일보는 지방선거에 관심이 없었다고 분석했다.
다만 1926년에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1926년 11월 20일 전후에 실시예정인 부협의회에 대해, 부협의회가 결정권이 없고 관선 임용의 제도라는 근본적인 한계를 갖지만, 부협의회가 부민들의 현실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므로 ‘청렴하고 곧은’ 공정한 인물을 추천하여 보내자고 주장”한 데 대해, 이 책에서는 이를 ‘식민지 통치 체제에 대한 참여 전술’(371쪽)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렇다면 1926년과 1931년의 차이는 무엇일까. 1930년대 내내 동아일보는 지방선거에 관심이 없었는가. 참고로 1939년 실시된 지방 의회 선거에서는 전국적으로 일본인 우위가 무너져 조선총독부가 긴장하기도 했다(김동명, 2018, 127~128쪽).
8. 정치운동과 문화운동, 민족과 계급
장덕수가 쓴 것으로 보이는 동아일보 1920년 6월 논설에서는 “조선 청년이 혹종 정치적 목적을 달코자 함은 왜인가. 그로 인하여 조선의 신성한 기초를 확립하며 원만한 문화를 수립코자 함이니 연즉 그 희망과 목적의 최후 도달점은 문화에 있고 정치에 있지 아니하며 또한 혹종의 정치적 목적을 달하랴 할지라도 그 방법에 문화의 힘이 절대로 필요함을 깨달으니 이 의미에 있어 문화는 알파요 오메가라 함이 가하도다.”(「學友會巡回講演」 『동아일보』 1920년 6월 29일)라고 밝혔다.
1923년 4월에 미국으로 떠난 장덕수는 12월에 동아일보에 보낸 글에서도 정치운동보다는 문화운동에서 사회운동으로의 전환에 주목했다. “일본 사람 아래 정권을 의지하여 우리 조선 사람의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적 운동은 다소간 있었다고 할는지 모르나 별로 드러내놓고 말할 만한 거리가 없고 그 반대로 조선 사람도 배워야 하겠다 먹고살아야 하겠다는 표어 아래 각종 단체도 조직이 되고 각색 운동도 일어난 것은 오늘날까지의 조선 사회의 현저한 특색이라 할 수가 있는 것 같소이다. 이것을 통칭하여 말하면 문화운동이라 하겠지요. 그리고 작년 이래로 현 사회제도의 근본 경제조직의 불합리를 간파하고 복멸을 노동계급의 전력으로 실현하려 하는 동시에 실상 우리 조선의 형편이 배우려 할지라도 배울 자력이 없고 먹고살려 할지라도 그 길이 이미 끊어진 것이 사실이 아닌가 하는 점을 고조하는 사회운동이 점차로 우리 청년계에 대두한다고 할 수가 있는 것 같소”(장덕수, 「미국 와서(3)」 『동아일보』 1923년 12월 3일).
한편 장덕수가 떠날 무렵부터 식민지 조선에서는 정치운동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1923년 5월 잡지 『개벽』에는 “그동안 추진한 문화운동만으로는 조선 문제의 해결을 볼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정치운동의 추진이 필요하다”(『개벽』 35, 1923. 5.)는 기사가 실리는데, 이 책에서는 이를 동아일보에서 주장한 정치운동, 민족적 중심 세력 결집 주장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평가했다(252쪽). 신간회가 실패로 돌아간 뒤 송진우는 문화운동에 주목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운동의 ‘기본운동’이자 ‘준비운동’”으로 인식했을 따름이다(474쪽).
해방 직후 “1945년 한민당의 정강 정책과 12월에 있었던 송진우의 한민당 정견 연설에서는 토지의 국유개념과 토지개혁의 실시, 진보적 민주주의에 입각한 사회경제 정책의 실시 등이 구체적으로 명시”(543쪽)되었지만, 송진우 사후 한민당은 장덕수 주도하에 보수화했다. 한민당이 중심이 되어 우익 진영이 결집한 임시정부 수립 대책협의회에서 미소공위에 제출한 답신안은 지주의 토지에 대해서 무상몰수도 유상매수도 반대하여 토지개혁 의지를 보이지 않는 등 반공주의가 두드러졌다.
송진우가 민족과 정치를 중시했다면, 장덕수는 사회, 문화, 계급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유진오는 송진우에 대해 “철저한 정치우월론”적 경향을 지녔다고 회고한 바 있다(『양호기』, 53쪽)(2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