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웹진기사 서평

[서평] 식민지에서 비타협적 정치는 가능한가?_홍종욱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9.03 BoardLang.text_hits 68
페이스북으로 공유 X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웹진 '역사랑' 2025년 8월(통권 66호)

[서평] 
 
 

식민지에서 비타협적 정치는 가능한가?:

윤덕영, 2023 『세계와 식민지 조선의 민족운동: 한국 자유주의의 형성, 송진우와 동아일보』, 혜안
 


홍종욱(근대사분과)

 
 
 
 
1. 김성수, 장덕수 그리고 송진우
 
이 책은 『세계와 식민지 조선의 민족운동: 한국 자유주의의 형성, 송진우와 동아일보』라는 긴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일제하 송진우와 동아일보의 이념과 실천을 다루는데, 핵심은 한국 자유주의 특히 사회적 자유주의에 있고, 이는 식민지 조선의 민족운동을 세계사적 맥락에서 고찰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는 뜻이라고 이해된다.

저자 윤덕영은 이 책 외에 같은 2023년에 김종식, 이태훈과 공저로 『일제의 조선 참정권 정책과 친일세력의 참정권 청원운동』(동북아역사재단)을 펴냈다. 이어 2025년에는 『또 다른 사회주의: 한국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역사비평사)도 출간했다. 잇달아 발표된 연구는 식민지에서 정치의 가능성을 묻는다. 식민지의 정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 가려져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 저자는 오해와 편견을 넘어, 합법 공간에서도 비타협적 활동을 벌인 정치와 운동의 실태에 접근했다.

이 책은 식민지 정치의 핵심적 주체로서 송진우라는 인물을 주목했다. 이승렬은 『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그물, 2021)에서 한국 자유민주주의 역사적 연원으로서 기독교 세력과 더불어 호남의 상층 지주 김성수를 주목했다. 또한 한국 현대 정치사 연구의 거장 심지연은 『장덕수 연구』(백산서당, 2025)에서 항일과 친일의 경계를 넘나들고 해방 후에도 이상과 현실의 영역을 오간 대표적인 인물로서 장덕수를 주목했다.
1910년대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부터 해방 직후 격동기까지 평생 동지로서 함께한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를 다룬 연구가 잇달아 나온 것이 그저 우연일까. 산업화와 민주화의 고비를 힘겹게 넘은 뒤 자칫 길을 잃은 우리 현실이 장덕수와 송진우의 ‘사회적 자유주의’를 역사 속에서 소환하고 있다(홍종욱, 2025).

류시현은 서평을 통해 이 책을 “진지전의 돌파구 제시”라고 평가했다(류시현, 2024). 송진우의 사회적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서 앙상한 혁명을 넘는 두터운 진지전을 떠올린 것이다. 김영진은 이 책이 “식민지 정치사상사 연구의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서울대 규장각 저작 집담회(2025.6.29.) 발제문). 이 책에 대한 체계적인 소개는 위 서평에 미루고 아래에서는 이 책의 주요한 주장을 음미하면서 평자 나름의 의견을 덧붙이는 것으로 하겠다.
 
 
2.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타협적 민족주의’ 비판
 
 
“동아일보 계열의 1920년대 초반부터 신간회 창립 시기까지의 주장과 동향을 살펴보면서, 민족주의 세력을 타협과 비타협으로, 또한 좌파와 우파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여러 측면에서 실증적으로 자세히 밝힐 것이다.”
25쪽
 
 
저자는 타협, 비타협을 기준으로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구도를 비판했다. 송진우를 타협적 민족주의자로 간주하는 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다.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우파론이 자리 잡은 계기는 박찬승의 『한국 근대 정치사상사 연구』(역사비평사, 1992)다. 박찬승은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를 타협적 민족주의자라고 규정했다. 다만, “타협적인 경향도 민족주의운동 내부에 포함시켜야 한다”며 그 계급적 기초를 예속자본가가 아닌 민족자본가 상층(1924년 이후는 최상층)이라고 파악했다.

1966년에 북한의 김희일은 민족개량주의의 계급적 기초는 예속부르주아지이며 따라서 전면적으로 반대하여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반해, 허장만은 민족개량주의는 민족부르주아지 상층을 계급적 기초로 했으며 예속부르주아지의 대변자로 변절하는 것은 1930년대 이후라며 민족개량주의는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고립화의 대상이라고 주장했다(홍종욱, 2014a, 197~198쪽).

지수걸은 위 박찬승 연구에 대한 서평에서, 자본 규모를 기준으로 민족자본가 상층과 하층을 구분하는 것은 과도한 경제결정론이라고 비판했지만, 타협적 경향도 민족주의운동의 일부로 파악하는 건 ‘탁견’이라고 평가했다. 지수걸은 박찬승의 주장이 북한의 허장만과 유사하다고 언급했다(지수걸, 1992, 361~363쪽).

저자는 송진우와 동아일보 그룹을 타협적 민족주의로 규정했다고 박찬승을 비판했다. 다만 타협적 민족주의자를 예속부르주아지라고 비난하는 것을 넘어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라는 범주를 통해 민족주의운동의 일부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저자와 박찬승의 문제의식은 공통되는 면도 있지 않을까.
 
 
3. 타협 대 비타협, 민족 대 반민족이라는 구도
 
 
“동아일보 계열을 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의 전형으로 그 시초부터 그 종말에 이르기까지 외세와 타협했다고 보는 역사적 표상의 문제를 검토할 것이다.”
62쪽
 
 
송진우와 동아일보 계열을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타협적 민족주의자’라고 파악하는 기존 연구에 대한 비판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다. 그를 위해 동아일보가 “내정 독립은 조선의 독립과는 그 ‘성질’과 ‘정신’에서 ‘천양의 차’가 있다고 판단”(『동아일보』 1922년 10월 30일)(264쪽)한 점 등을 소개하고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당시 자치운동으로 일제가 일괄해서 파악하던 정치운동도 친일 정치세력이 인식하는 것과 민족주의 세력이 인식하는 것에는 넘을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다. 이런 차이를 간과하면 친일 정치세력의 정치운동과 민족주의 세력의 합법적 정치운동이 동일선상에서 다루어지게 되며, 이후 일제하 민족운동 전개, 더 나아가 신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민족 내부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두 가지 흐름에 대한 실체적 접근이 어렵게 된다. 잘못하면 일제하 민족 대 반민족의 기본적 대립 구도가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265쪽
 

그러나 송진우가 타협적 민족주의자가 아니었음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협 대 비타협, 민족 대 반민족을 고착된 속성으로 보는 구도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이 책에서는 “민족주의 좌·우파론에서 특징적인 것은 정치세력을 구분하는 기준이 사상과 이념, 강령과 정치노선도 아닌 타협과 비타협이라는 정치적 태도와 활동 양태라는 점”(23쪽)을 비판적으로 보았지만, 일찍이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 가지무라 히데키는 대자본을 ‘예속자본’, 중소자본을 ‘민족자본’으로 파악하는 일반적인 경향을 비판하고 둘 사이의 구별을 고도의 ‘정치적 범주’로서 이해했다(홍종욱, 2014b, 174쪽). 지수걸도 위 서평에서 ‘타협적 민족주의자’에 대해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들과 이들이 본질적으로 유사한 존재였다는 점을 더 강조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4. 비식민화와 식민지의 정치
 
 
“일제의 1910년대 무단통치와 1920년대 이후 문화정치를 과도하게 구분하여, 사이토 총독 시기 일제와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조선에 자치 정책, 곧 조선 의회로 상징되는 중앙정치 차원의 자치 정책을 추진했다는 주장을 극복해야 한다.”
554쪽
 
 
무단통치와 문화정치의 차이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정치와 사회를 분석할 수 있지 않을까. 1910년대 무단통치는 헌병경찰로 대표되듯 그야말로 군사적 강점에 가까웠다. 3·1운동 이후 문화정치로 전환은 더 이상 무단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본도 인정했음을 뜻한다. 문화정치는 제1차 대전 이후 세계적인 비식민화(decolonization) 흐름의 한국적 표현이었다. 문화정치는 독립, 자치, 동화라는 비식민화의 방향을 둘러싼 각축이었다. 3·1운동 이후 1930년대 초반까지는 불충분하나마 점진적으로 정치적 자유가 확대되었다(홍종욱, 2019).

일제가 취한 정책이 동화인지 자치인지도 따져야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1910년대까지를 무단통치로 자기비판하고, 3·1운동 이후의 국내외적 새로운 상황을 인정한 위에 동화나 자치 정책이 진지하게 고려되었다는 점이 아닐까. 자치라는 말이 여기저기 나오지만 정식으로 그런 정책을 취한 적은 없다고 설명하기보다는, 그전까지 헌병경찰을 동원해 억누르던 것과 달리 3·1운동 이후에는 일제 스스로 동화나 자치를 입에 담으면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5. 타협운동과 합법운동의 모호한 경계
 
 
“식민지 조선의 상황은 일본 본국에 비해 억압의 정도가 훨씬 심했다. (중략) 일제하 한반도 내에서는 국외보다 더욱 활발히 다양한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중략) 이들 운동은 대부분 비록 반제국주의와 절대 독립을 표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운동의 주요한 부분을 이루었다. (중략) 일제 본국과 차별되는 식민지 조선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고 차별적 식민 통치에 대한 도전이었다.”
49쪽
 

이 책에서는 일본 본국과 다른 식민지 조선의 처지를 직시하는 동시에 그런 엄혹한 상황에서 벌어진 다양한 민족운동의 의의를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찍이 나미키 마사히토(並木真人)가, 국외 운동에 정통성을 두고 국내 운동 및 사상을 철저하게 단죄하는 경향을 ‘망명자 사관’이라고 비판한 것과 상통한다(並木真人, 2003, 2쪽).

이런 관점에서 “1920년대 동아일보 계열을 비롯한 국내 민족주의 세력의 민족운동을 일제에 타협하는 자치운동의 범주가 아니라, 민족운동의 일환으로서 사회개혁 운동 또는 합법적 정치운동의 범주에서 파악해야 한다.”(563쪽)고 주장한다. 그리고 1922년 동아일보가 “문화정치하의 중앙정치는 우선 조선총독부의 예산이 세금을 납부하며 직접 생활에 영향을 받는 조선인에게는 아무런 발언권도 주지 않은 채, 일본 국회에서 일방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에서 조선인에게 자유와 권리가 전혀 보장되지 않는 것으로 무단정치와 변함이 없다”(『동아일보』 1922년 1월 13일)면서 정치적 자유의 허용을 주장한 것을 소개한다.

이 책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을 막론하고 민족운동의 지도자들과 민족 엘리트들은 광범한 대중을 민족운동에 동참시키기 위해 언론을 비롯한 각종 합법적 기관들을 설립하고 이를 이용해서 대중의 당면한 일상적 이해와 제반 민주주의적 권리를 실현하는 합법적 정치운동을 전개했다.”(50쪽)고 평가한다. 아울러 “1920년대 전반 민족주의 세력의 운동을 자치운동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 획득을 위한 사회개혁 운동 및 정치운동으로 파악해야”(566쪽)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개혁 운동’은 다른 문제이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합법적 정치운동’은 ‘타협적 자치운동’과 얼마나 다른가. 자치운동이야말로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 획득”을 위한 것 아닌가. ‘합법적 기관’을 이용해 ‘당면한 일상적 이해와 제반 민주주의적 권리를 실현’하는 운동은 민족적이고, ‘타협적 자치운동’은 반민족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도 “합법적 정치운동은 그 합법적 형식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식민권력과의 협상과 타협을 필수적으로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565쪽)고 밝혔다. 적어도 식민지 조선 국내에서는 합법, 타협, 자치가 서로 얽혀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6. 신간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책은 “1920년대 중반 ‘민족적 중심단체’ 건설 주장”에 대해, “이러한 움직임은 타협적 자치운동을 위한 것보다는 합법적 대중정치 운동론의 전개 과정과 관련되어 있는 것”(331쪽)이라고 분석하고 신간회를 “일제 지배의 틈새를 비집고 합법적 영역을 최대한 이용하여 창립된 정치운동 단체”라고 평가했다. 다만 신간회가 “비타협주의와 기회주의 배격을 표방했지만, 그 형식은 일제의 승인을 받은 합법적 운동단체로서 조직되었다.”(363쪽)고 설명하고, “합법운동 조직을 모색하는 이상 그들에게 있어 타협과 비타협의 문제는 선차적인 것이 아니었다”(367쪽)고 덧붙였다.
 
실제 송진우는 ‘타협적 자치론자’인 최린과 천도교 신파를 신간회에 끌어들이고자 했다(360쪽). 또한 “현실 생활에서 기초한 정치운동이 ‘구차한 타협’ 또는 ‘협조’라고 하는 것에 상관없이 움직일 수 없는 ‘엄숙한 사실’이라고 주장”(『동아일보』 1926년 11월 12일)(370쪽)하며, 사회주의자에게 현재 민족주의 세력이 추진하는 현실 정치운동 조직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표되는 사회주의자의 ‘정우회 선언’을 예고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이 책은 “1930년 당시 신간회 지도부가 합법적 운동 경향을 보인 것, 또한 청총(조선청년총동맹)의 간부를 비롯해서 일군의 사회주의자들이 합법적 운동 경향성을 보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합법운동을 중요시하는 운동 경향이 일제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타협적 자치운동과 연결되어 전개되었는가하는 의문이 제기된다.”(406쪽)고 밝히고 “합법적 영역에 있는 합법적 대중정치 운동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일제 관헌은 이러한 움직임을 독립운동이 아닌 자치운동으로 파악하고 있었다.”(322쪽)고 설명했다.

다만 동아일보는 일찍이 “일본인의 보선(보통선거-인용자)운동이 민중의 자각에 기초한 국가 생활의 ‘자결 자치’를 의미한다면, 각 민족의 해방운동도 역시 “동일한 자각에 기본한 민족적 단체생활의 자결 자치를 의미”(『동아일보』 1922년 2월 16일)(305쪽)한다고 주장했다. 이광수는 1924년 1월에 발표한 〈민족적 경륜〉에서 조선인에게 ‘정치적 생활’이 없는 이유로 총독부의 탄압과 아울러 “일본의 통치권을 승인하는 조건 밑에서 하는 모든 정치적 활동, 즉 참정권, 자치권 운동 같은 것은 물론이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독립운동조차도 원치 아니하는 강렬한 절개 의식”의 존재를 들었다.

신간회 설립 과정에서 동아일보가 제시한 “‘민족적 훈련’을 통해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에 헌신할 수 있는 민족적 대감정을 가지게 하고, 혁명을 완성하는 자유·평등·박애의 대사상과 현대 입헌정치의 ‘훌륭한 제도’를 수립할 수 있는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의 대이상을 배워나갈 때 가능한 것”(『동아일보』 1926년 10월 17일)(366쪽)이라는 주장은 이광수가 제기한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민족적 경륜(2)」, 『동아일보』 1924년 1월 3일)(257쪽)는 주장과 과연 얼마나 다른가.
 
 
7. 지방 의회 선거와 참여 전술
 
1931년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동아일보는 1930년 9월 16일 평양에서 시작하여 1931년 4월 4일 군산을 마지막으로 전국 31개 도시에서 동아일보 지국 주최로 지방 발전 좌담회를 개최했다. 이태훈은 동아일보가 사실상 선거유세라 할 수 있는 순회좌담회를 통해 지방선거 국면에 개입하여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 한 것으로 평가했다(이태훈, 2011, 151쪽)(427쪽).

그러나 이 책에서는 제1회 평양 좌담회를 보면 참가자 모두 서북 기독교 세력 그리고 그와 연결된 인물이었는데 그들 중 1931년 지방선거에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부회나 읍회, 도회는 전혀 논의조차 되지 않은 사실에 주목했다(427~428쪽).

아울러 1930년 3월에 조선총독부가 ‘조선 지방자치권 확장안’을 일본 각의에 제출하면서 지방행정제도 개정의 구체적 내용이 알려졌을 때, 동아일보가 이를 강력히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한 점을 소개했다(401쪽). 무엇보다 지방선거 개편안이 확정되었을 때 동아일보가 “유권자 수에도 조선인이 일본인에 대등치 못한 제도를 만든 지방자치제에 대하여서는, 오인은 더구나 관심이 적어짐을 금치 못한다.”(『동아일보』 1931년 1월 29일)(403쪽)고 밝힌 점을 들어, 동아일보는 지방선거에 관심이 없었다고 분석했다.

다만 1926년에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1926년 11월 20일 전후에 실시예정인 부협의회에 대해, 부협의회가 결정권이 없고 관선 임용의 제도라는 근본적인 한계를 갖지만, 부협의회가 부민들의 현실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므로 ‘청렴하고 곧은’ 공정한 인물을 추천하여 보내자고 주장”한 데 대해, 이 책에서는 이를 ‘식민지 통치 체제에 대한 참여 전술’(371쪽)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렇다면 1926년과 1931년의 차이는 무엇일까. 1930년대 내내 동아일보는 지방선거에 관심이 없었는가. 참고로 1939년 실시된 지방 의회 선거에서는 전국적으로 일본인 우위가 무너져 조선총독부가 긴장하기도 했다(김동명, 2018, 127~128쪽).
 
 
8. 정치운동과 문화운동, 민족과 계급
 
장덕수가 쓴 것으로 보이는 동아일보 1920년 6월 논설에서는 “조선 청년이 혹종 정치적 목적을 달코자 함은 왜인가. 그로 인하여 조선의 신성한 기초를 확립하며 원만한 문화를 수립코자 함이니 연즉 그 희망과 목적의 최후 도달점은 문화에 있고 정치에 있지 아니하며 또한 혹종의 정치적 목적을 달하랴 할지라도 그 방법에 문화의 힘이 절대로 필요함을 깨달으니 이 의미에 있어 문화는 알파요 오메가라 함이 가하도다.”(「學友會巡回講演」 『동아일보』 1920년 6월 29일)라고 밝혔다.

1923년 4월에 미국으로 떠난 장덕수는 12월에 동아일보에 보낸 글에서도 정치운동보다는 문화운동에서 사회운동으로의 전환에 주목했다. “일본 사람 아래 정권을 의지하여 우리 조선 사람의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적 운동은 다소간 있었다고 할는지 모르나 별로 드러내놓고 말할 만한 거리가 없고 그 반대로 조선 사람도 배워야 하겠다 먹고살아야 하겠다는 표어 아래 각종 단체도 조직이 되고 각색 운동도 일어난 것은 오늘날까지의 조선 사회의 현저한 특색이라 할 수가 있는 것 같소이다. 이것을 통칭하여 말하면 문화운동이라 하겠지요. 그리고 작년 이래로 현 사회제도의 근본 경제조직의 불합리를 간파하고 복멸을 노동계급의 전력으로 실현하려 하는 동시에 실상 우리 조선의 형편이 배우려 할지라도 배울 자력이 없고 먹고살려 할지라도 그 길이 이미 끊어진 것이 사실이 아닌가 하는 점을 고조하는 사회운동이 점차로 우리 청년계에 대두한다고 할 수가 있는 것 같소”(장덕수, 「미국 와서(3)」 『동아일보』 1923년 12월 3일).

한편 장덕수가 떠날 무렵부터 식민지 조선에서는 정치운동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1923년 5월 잡지 『개벽』에는 “그동안 추진한 문화운동만으로는 조선 문제의 해결을 볼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정치운동의 추진이 필요하다”(『개벽』 35, 1923. 5.)는 기사가 실리는데, 이 책에서는 이를 동아일보에서 주장한 정치운동, 민족적 중심 세력 결집 주장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평가했다(252쪽). 신간회가 실패로 돌아간 뒤 송진우는 문화운동에 주목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운동의 ‘기본운동’이자 ‘준비운동’”으로 인식했을 따름이다(474쪽).

해방 직후 “1945년 한민당의 정강 정책과 12월에 있었던 송진우의 한민당 정견 연설에서는 토지의 국유개념과 토지개혁의 실시, 진보적 민주주의에 입각한 사회경제 정책의 실시 등이 구체적으로 명시”(543쪽)되었지만, 송진우 사후 한민당은 장덕수 주도하에 보수화했다. 한민당이 중심이 되어 우익 진영이 결집한 임시정부 수립 대책협의회에서 미소공위에 제출한 답신안은 지주의 토지에 대해서 무상몰수도 유상매수도 반대하여 토지개혁 의지를 보이지 않는 등 반공주의가 두드러졌다.

송진우가 민족과 정치를 중시했다면, 장덕수는 사회, 문화, 계급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유진오는 송진우에 대해 “철저한 정치우월론”적 경향을 지녔다고 회고한 바 있다(『양호기』, 53쪽)(231쪽).
 
 
 
----------
참고문헌
 
김동명, 2018 『지배와 협력: 일본제국주의와 식민지 조선에서의 정치참여』, 역사공간 
류시현, 2024 「진지전의 돌파구 제시: 송진우, 동아일보 계열,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조명」 『인문논총』 81-1
이태훈, 2011 「1930년대 일제의 지배정책 변화와 친일정치운동의 ‘제도적’ 편입과정」 『한국근현대사연구』 58
지수걸, 1992 「〈서평논문〉‘선실력양성 후독립론’의 실상과 허상」 『역사비평』 19 
홍종욱, 2014a 「주변부의 근대: 남북한의 식민지 반봉건론을 다시 생각한다」 『사이間SAI』 17 
홍종욱, 2014b 「가지무라 히데키의 한국 자본주의론: 내재적 발전론으로서의 ‘종속 발전’론」 강원봉 외 『가지무라 히데키의 내재적 발전론을 다시 읽는다』, 아연출판부 
홍종욱, 2019 「3·1운동과 비식민화」,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3·1운동 100년 3―권력과 정치』, 휴머니스트
홍종욱, 2025 「식민지 정치의 불/가능성을 묻다: [서평] 『장덕수 연구』, 심지연, 백산서당, 2025」 『서울 리뷰 오브 북스』 19
並木真人, 2003 「朝鮮における「植民地近代性」·「植民地公共性」·対日協力: 植民地政治史·社会史研究のための予備的考察」 『国際交流研究』 5(フェリス女学院大学国際交流学部)
 
  • BoardLang.text_prev_post
  • BoardLang.prev_post_tit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