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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냉전시대 경계인의 고군분투기, 조명훈 평전 ⑦_예대열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9.03 BoardLang.text_hits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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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8월(통권 66호)

[기획연재] 
 
 

냉전시대 경계인의 고군분투기, 조명훈 평전 ⑦

 


예대열(현대사분과)

 
 
조명훈은 1945년 겨울 ‘인민 숙제(방학 숙제)’를 위해 순천군청을 비롯한 지역 내 주요 관공서와 사회단체를 두루 돌아다니며 일종의 필드 워크를 진행했다. 그가 군청 교육계(敎育係) 사무실 문을 두드렸을 때, 마침 그곳에서는 미군에 제출할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담당자에게 사정사정해 미군이 받아볼 통계 자료를 겨우 한 부 얻었다. 그는 『순천의 경제상황』에 당시 상황을 “참말로 1분이라도 늦게 갔으면 (수록된) 표는 없었을 것이다”라며 짧은 소감을 남겼다.

군청 담당자가 자료를 제출한 곳은 미군 제69군정중대였다. 미 육군 제24군단은 남한을 점령하면서 미군정 사령부 예하에 도-시·군을 관할하는 부대로 각각 군정단과 군정중대를 편제시켰다. 이때 순천에 주둔한 부대가 미 육군 제69군정중대였다. 이 부대는 순천에 본부를 두고 여수, 광양, 구례, 고성 등 전남 동부 5개 군을 관할했다. 이후 장흥에 있던 제61군정중대가 해체되자 보성과 고흥의 관할권도 인계받았다.

서울의 미군정 사령부는 1945년 12월 4일 군정 활동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각 군정부대로 하여금 「군정 역사(Military Government History)」라는 제목의 지역 활동을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미군정 예하 군정단과 군정중대는 자신이 진주한 지역의 상황을 정리해 주간·월간 형태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제69군정중대는 사령부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1개월~3개월 단위로 ① 정치, ② 재정, ③ 산업·상업, ④ 교육 ⑤ 복지, ⑥ 법원·법령, ⑦ 안전, ⑧ 외국인 재산, ⑨ 보건·의료 등의 상황을 상급 부대에 보고했다.

즉 1945년 12월 동일한 시공간에 방학 숙제를 하기 위한 중학생과 점령통치를 위한 군정부대가 같은 자료를 조사·정리하며 각각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물론 중학생의 숙제 활동과 점령정책 수행을 위한 리포트를 동격에 놓고 비교하기란 사실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명훈에게 조사 대상은 나고 자란 곳이라는 점에서 애착과 익숙함이 큰 곳이었고, 군정중대에게는 점령의 효율성과 원활함이 목적인 낯선 곳이었다. 어찌 되었든 양 주체가 생산한 『순천의 경제상황』과 「Military Government History」는 해방 이후 순천의 사회상을 풍부하게 설명해 준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순천의 경제상황』을 토대로 제69군정중대 보고서와 비교해 가며 해방 공간 순천을 들여다보자. 조명훈은 우선 읍·면·리 별로 호구조사를 정리했다. 해방 당시 순천의 인구는 대략 2만 8,889세대, 14만 6,244명이었다. 세대 당 가족 수는 평균 5.4명이었다. 총 농가 호수 대비 자작농 비율은 9.4%, 자·소작농 36.9%, 소작농 42.6%, 기타 10.8%였다. 일제시기 통계에 따르면 1935년 현재 9.1%의 피용자(被傭者)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 기타에 해당하는 10.8%는 다수의 고용농으로 추정된다. 통계를 보건대 일제하 순천은 조선 평균보다 소작 관계 농가(자·소작농+소작농)의 비율이 높은 전형적인 식민지 지주제 사회였다.

그런데 조명훈은 지주·소작 관계에 기반 한 계급 문제에 주목하기보다는 특이하게도 도심에 해당하는 순천읍의 농가 호수 비율(20%)이 면 단위에 비해 현저히 적은 것(80~90%)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이 사실을 두고 “이래서는 절대로 안 된다, 우리 삼천만 동포는 전부 같이 일을 하여야 된다”라는 「비평」을 남겼다. 그는 본격적으로 학생운동 조직에 몸담으며 사회과학 학습하기 전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농촌에 관해 생산관계의 문제로 접근하지는 못했으나 나름의 ‘평등적’ 지향을 드러냈다.
 
한편 군정중대는 일차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임무가 있었던 만큼, 식량 사정이 혹여 폭동 등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여 쌀과 곡물의 공급 규모를 우선 파악했다. 조사 결과 “현재 식량 상황은 만족스럽고 올해 부족은 예상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많은 토지가 일본인 소유였던 만큼 귀속재산을 관리하는 신한공사의 역할이 많고 중요하며, 무엇보다 지주들이 소작료를 징수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제69군정중대가 농업 생산량이 어느 정도인지 조사하는 데 그쳤다면, 조명훈은 나름의 방식으로 생산력 확대 방안에 대한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는 순천군 총 농가 호수 대비 농우(農牛) 수를 산출(0.4=8,171두/19,487호)한 후, 20종 작물의 농지 면적을 조사하여 각 면별 소 마리당 경작 능력을 그래프로 표시했다. 그러면서 「비평」 란에 “소 한 마리당 경지 능력을 계산하여 보니 … 이것은 좀 무리가 아닐까? 소의 증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그림 1. 소 한 마리당 경지능력
출처: 趙明勳, 1946 『順天의 經濟狀況』, 90쪽
 
 
또한 조명훈은 일상생활과 관계 깊은 물자 수급과 물가 등귀 문제도 조사를 벌였다. 당시 경제는 일제가 순천 시내에 있던 철제 우체통마저 뜯어 갔을 정도로 전쟁 동원으로 인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쌀에서부터 면포에 이르기까지 16종의 생필품을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해방, 현재(1945.12)로 구분해 각각의 물가지수를 비교·정리했다. 그는 물가가 시시각각 오르는 것에 반해 물품이 나날이 귀해지는 상황을 “무정부 상태”라고 표현하며, 그 원인을 “일본인의 40억 엔 경제 교란”과 “악덕 상인” 때문이라고 봤다.
 
 
그림 2. 물자수급 및 물가지수
출처: 趙明勳, 1946 앞의 책, 103쪽
 
 
실제 조선총독부는 패망 직후 금융기관을 장악하여 조선은행권을 남발하며 일본인의 예금 인출과 대출 용도로 사용했다. 화폐 증발은 미군정 하에서도 지속되어 인플레이션의 격화와 그에 따른 살인적 물가고를 일으켰다. 당시 일부 상인들 또한 투자위험이 적고 자본 회수가 빠른 업종에 종사하며 식량과 생필품을 매점매석하여 폭리를 올리고 있었다. 조명훈은 이런 모습을 보고 “사재기를 기회로 해서 고가로 판다”며 경제 교란의 책임을 “우리 삼천만 동포에도 있다”고 평가했다.

조명훈이 물자 부족과 물가 등귀 문제를 일상생활의 측면에서 관심을 가졌다면, 제69군정중대는 산업 재건의 측면에서 접근했다. 군정중대는 순천이 산업적 비중이 높지 않은 지역인 만큼 가동 중단된 공장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역 경제 안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산업시설이 원자재와 자재 확보 어려움으로 여전히 폐쇄된 상태에 있는 사실에 주목하며, 공장의 임시 관리자 임명과 생산 촉진을 위한 방도를 알아보겠다는 선에서 조사를 마쳤다.

한편 조명훈은 금융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친형의 도움을 받아 순천에 소재한 조흥은행, 식산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 금융조합, 무진회사, 우편국 등의 예금고와 대출액을 조사했다. 그는 금융기관의 예대율(預貸率)이 최대 240.1%(동양척식주식회사 순천지소)나 되는 것을 보고, 자금 고갈의 원인을 물가 상승에 따른 생활비 대출 증가로 꼽았다. 그러면서 대안으로 “조선이 나날이 부자로 되어 가려면 각자가 주의하여 한사코 저금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인플레이션은 화폐의 실질 가치를 하락시켜 저축을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게 된다. 하지만 조명훈은 저축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회가 때가 많이 묻어 있다”고 표현하며, “서로가 기분 좋게 교제하여 조선 건국에 질서 있게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아직 경제생활을 하지 않은 나이였기 때문에 금융 메커니즘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측면도 있었겠지만, 그 이면에는 사람들 모두가 개인적 이기심을 버리고 새 조국 건설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컸던 때문으로 보인다.

제69군정중대 또한 재정·금융 문제의 흐름을 예의 주시했다. 군정중대는 주둔 직후 곧바로 식산은행과 조흥은행이 조선인 직원들에 의해 운영되는 것을 확인했다. 이후 모든 금융기관을 장악하여 일본인 예금 목록 등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도록 하고, 세금이 체납되지 않도록 징수 캠페인을 독려했다. 또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통화 가치 하락과 위조지폐의 유통에 대해서도 신경을 썼다.
 
 
그림 3. 금융 상황
출처: 趙明勳, 1946 앞의 책,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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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趙明勳, 1946 『順天의 經濟狀況』
69th Mil Govt Hq & Hq Co, 2001 「Military Government Activities」 『美軍政期 軍政團·    軍政中隊 文書』 5, 國史編纂委員會
Headquarters, 69th Military Government Company, 2001 「Military Government         History」, 『美軍政期 軍政團·軍政中隊 文書』 5, 國史編纂委員會. 
片岡議, 1933 『順天發達史』, 片岡商店
 
브루스 커밍스, 1986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정용욱, 2003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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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성, 2021 「20세기 순천 지역의 농촌 권력 이동과 농업경제 구조 변화」 『남도문화연구』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