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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공무수행 역사학의 활용과 지역사 연구 ⑦_박범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9.03 BoardLang.text_hits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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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8월(통권 66호)

[기획연재] 
 
 

공무수행 역사학의 활용과 지역사 연구 ⑦:

한국체육사에서 한국사연구자가 할 수 있는 일

 


박범(중세2분과)

 
 
연구실로 걸려온 전화 한 통
 
2022년 11월 쯤인 걸로 기억한다. 보통 연구실 전화기로 전화가 오는 일은 거의 없다. 학교 내부의 전화가 아니면 외부 전화는 거의 오지 않는다. 자문이나 심사를 의뢰하는 경우 대부분 개인 폰으로 온다. 누군지 알고 전화를 하기 때문이다. 그 날은 연구실에서 작업을 하는데 연구실 전화기로 전화가 왔다. 무심코 받은 전화는 천안시청이었다. 천안시청 학예연구사는 천안에서 축구역사박물관을 건립 준비중인데, 자문을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일반적인 자문이라고 판단하고 참여하겠다고 답변을 했다. 그때 학예연구사 이름이 ‘이기백’이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 일로 내가 축구사 연구를 하게될 줄은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다.

2022년 12월, 천안시청에 방문했다. 해당 자문은 착수보고회였다. 내용은 축구역사박물관 건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였다. 박물관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실시하는 ‘공립박물관 설립타당성 사전평가’를 통과해야 했다. 그런데 아직 이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를 서울의 모 업체에 용역을 발주했고, 그 첫 시작을 위한 착수보고회였던 것이다.

착수보고회 설명을 듣는 내내 사실은 답답했다. 업체의 내용대로라면 통과가 불확실했다. 모든 내용이 전시 디자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모아졌지, 정작 전시 내용에 대해서는 하나도 아는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전시는 기획이 중요한데 정작 기획 연구는 없던 것이다. 착수보고회를 마치고 나는 이기백 학예연구사에게 차라리 용역 보고서는 참고자료로 하고 직접 평가보고서를 작성하는 게 낫겠다는 말을 했다.
학예연구사는 내년 초에 박물관 건립을 위한 과정 중 하나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고 말을 했는데, 그 중 한 주제를 나에게 부탁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발표 하나는 맡겠다고 했다. 지역사 연구를 하면서 식민지 시기 신문 자료에 매우 풍부한 스포츠 관련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예연구사는 팀장과 함께 연구실에 찾아왔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천안시에서 해당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줄 몰랐다. 해당 업무는 ‘축구종합센터건립추진과’가 별도로 조직되어 있었다. 천안박물관과는 다른 조직이었다. 팀장님 말을 들어보니 타당성 평가에서 이미 3번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더욱 절박했던 것이다. 이기백 학예연구사는 그 이후에 천안시청에 들어와 해당 업무를 맡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학예사는 원래 축구 선수 출신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 일에 더 애착을 가졌다.

천안에 축구역사박물관이 들어선 이유는 파주에 있던 축구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가 천안으로 이전 결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천안에 대규모 축구트레이닝센터가 들어서기 때문에 천안시청에서 관련 박물관을 짓기로 한 모양이었다. 현재도 스포츠 관련 박물관이 전무하므로 축구역사박물관은 아마도 최초의 스포츠 전문 박물관이 될 수 있었다. 문제는 타당성 통과를 못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팀장님으로부터 그 동안 떨어진 이유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나 나름대로 떨어진 이유를 주변 사정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좋은지 설명해 드렸다. 박물관은 전시만이 아닌 연구 기능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다. 전시를 위해서는 기획이 필요하고, 기획을 위해서는 연구가 필요했다. 연구가 없는 전시는 의미가 없었다. 축구사 연구를 들여다 보니, 더더욱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학술대회 발표가 중요하다는 생각 또한 들게 되었다.
 
 
축구역사박물관 건립을 위한 학술대회
 
나는 어떠한 주제로 발표를 해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이때 가장 먼저 본 것은 대한축구협회에서 발간한 “대한축구백년사”라는 책이었다. 이 책에 주목한 이유는 축구사 연구에서 이 책이 거의 사료로 다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축구와 관련된 대중서, 연구서, 논문을 보면 모두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바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저서이지 전거가 아니었다. 이 저서는 어떠한 근거를 표기하지 않고 사실 내용만 수록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이 책을 버리고 직접 자료를 정리하기로 했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에서 ‘축구’라고 검색하면 동아일보 7천건, 조선일보 7천건이 확인된다. 이 모든 내용을 다 읽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결국 5년 정도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논문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우연히 체육학에서 쓴 축구 관련 박사논문을 보다가 이상한 점이 하나 들었다. 축구 도입에 대한 문제였다. 거의 모든 축구 관련 연구들이 1882년 축구가 도입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근원을 찾아가 보니 결국 ‘대한축구백년사’로 귀결되었다. 내용은 이렇다.
 

“1882년(고종 19) 6월, 인천 제물포에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호가 입항하였다. 군함의 승무원들은 선상 생활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고자 휴식을 취하는 중에 부두에서 공을 찼다. 영국 승무원들이 공을 차다가 그만 볼을 두고 가고 말았다. 아이들이 볼을 주워 영국인들의 흉내를 낸 것이 우리나라에 축구가 들어오게 된 연유이며, 이 때 놓고 간 볼이 곧 서구식 축구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약 1개월이 지난 뒤인 7월, 이번에는 영국 군함 ‘엥가운드’호가 제물포에 다시 입항하였다. 양국 간의 친선을 목적으로 들어온 이들은 관가(官家)에 한성에 들어갈 것을 요청했다. 이 사실을 접한 조정은 승낙하고 환영한다는 뜻에서 이재황 훈련대장으로 하여금 군졸 600명을 인솔하게 하여 과천현까지 나가 맞아들이게 하였다. 한성에 들어온 영국 승무원들은 휴식을 취하며 훈련원 공지(空地)에서 공을 찼다. 물론 오늘과 같은 형태의 축구경기를 했을 것이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공차기 놀이를 신기하게 구경하였다. 영국인들은 그들이 차던 공을 구경하던 사람에게 주었는데, 영국인들이 떠난 뒤에 훈련원에서는 한 동안 공차기를 했다.”
 

“대한축구백년사”에 따르면 이 내용은 모두 선인(先人)들의 증언(證言)을 토대로 기록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인물이 특정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같은 이야기는 당시 관찰사로 있던 서병희(徐丙羲,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 심판원)씨 선천 서승원(徐承元)씨로부터 직접 들었다”
 

한마디로 구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축구 시초에 대한 내용은 이러한 사실을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실 확인이 필요했다. 정말 그런가?

우선 서병희가 진술한 내용 확인이 필요했다. 서병희의 부친이 관찰사를 지낸 서승원이라는데 맞을까? 그런데 당시 인물 중 서승원은 없었다. 감사라고 하면 경기감사를 뜻할텐데, 당시 경기감사는 조강하와 홍우창이었다. 엥가운드호를 맞이한 훈련대장 이재황은 없는 인물이었다. 찾아보니 이재면이었다. 면(冕)을 황(晃)으로 착각한 것이다. 실제 군함은 왔을까?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882년 조선에 온 영국 군함은 3건이 확인된다. 4월, 6월 9월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서병희의 부친은 인천세관원이었다. 1978년 1월 <경향신문>에는 스포츠 역사를 다루면서 서병희를 소개한 기사가 있다. 여기에 따르면 그는 인천 세관원의 아들로, 부친과 교분이 깊고 인천에 와 있던 영국 상업회사 타운센트 대표의 알선으로 영국으로 유학을 건너간 것이다. 부친도 영어가 되지만, 자신은 더더욱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영국에서 축구를 배워왔다. 1920년대 신문 기사를 보면 그래서 그는 주로 축구 심판을 도맡아 했다. 그의 말이 절대적인 이유다.
 
 
   
그림 1. 축구심판 서병희
출처: 동아일보[1923년 12월 9일(좌)], 경향신문[1978년 1월 30일(우)]
 
 
플라잉피시호가 제물포에 입항하여 승무원이 공을 차다가 공을 두고 간 것이 최초의 축구 도입일까? 영국인들이 했던 것을 흉내낸 것이 우리나라에 축구가 들어오게 된 연유일까? 이러한 내용과 비교되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바로 최초의 성경책 전래이다. 충남 서천군 마량포구에 가면 지금도 “한국최초성경전래지”라는 표지석이 있다.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 된 이 역사적 사실은 영국 상선 선장인 바질 홀의 기록과 순조실록을 대조해 본 결과 선장이 건네준 책 두권이 바로 성경책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확인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이 과연 천주교 선교 및 전파에 영향을 주었을까. 성경의 전래와 천주교 전파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내가 보기엔 축구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플라잉피시호의 입항으로 영국 승무원이 가지고 놀았던 축구공이 제물포에 살던 아이들에게 건네졌을 수 있다. 문제는 축구공을 처음 가지고 논 사실과 축구가 도입되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축구가 도입되었다고 말을 하기 위해서는 축구 경기 제도가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제도가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

첫 정식 축구 경기를 찾아야 했다. 한글판 독립신문에는 나오지 않는데, 영문판 독립신문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1897년 3월, “토요일 오후 동대문 근처에서 팀간 경기를 하다”라는 제목 아래, 영국해안경비대와 장교들이 한 팀, 한성외국어학교 영국인 교사와 조선인 학생이 한 팀이 되어 축구경기를 했다.

영국해안경비대는 어떤 존재일까. 후자는 팀 이름이 KOREA라고 나오는데 전자는 팀 이름이 NARCISSUS라고 되어 있었다. 대체 NARCISSUS는 뭘까. narcissus는 ‘수선화’라는 꽃 이다. 웬 수선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를 못했다. 근데 독립신문 기사 첫 부분에 H.M.S. Narcissus라고 되어 있는걸 나중에 발견했다. H.M.S.는 영국 왕립 해군 함선을 지칭하는 약칭이었다. 영국 함선의 명칭이 NARCISSUS였던 것이다. ‘H.M.S. Narcissus’라고 구글에 검색해 보니 아래와 같은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인터넷에는 H.M.S. Narcissus의 항해 일지도 확인가능했다. 1897년에 나가사키와 제물포를 오간 사실도 확인했다. 그리고 NARCISSUS 팀 소속의 축구선수는 모두 이 함대의 해군 병사들이었다. 혹시 이들 중 자서전이 있을까 해서 인물을 모두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딱 한 사람 Pr. Melling라는 인물의 회고록인 ‘A Long Journey’를 찾을 수 있었다. 심지어 책 내용 이미지도 볼 수 있었다. 회고록에는 서울에 온 사실도 두 챕터에 걸쳐 기록되어 있었다. 이 인물은 실제로 서울에 왔던 것이다. 1897년 주한영국공사관에서 찍은 사진과 1898년 나가사키에서 찍은 사진도 회고록에 있었다. 이제 축구를 한 사실을 찾으면 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축구를 한 사실은 회고록에 쓰지 않았다. 너무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그림 2. 영국 해군 Melling의 기록들
 
 
독립신문 영문판에는 축구 경기를 한 사실이 하나 더 있엇다. 1897년 12월 “협회 규정에 따른 축구 경기가 지난 토요일에 열렸다”라고 되어 있다. 이때도 3월과 마찬가지로 학교팀과 영국경비대 팀이 경기를 치루었다. 기사에 따르면 “이 게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국인이 더 강하고 무서운 상대를 상대하는데 매우 용감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내가 주목한 것은 “협회 규정에 따른 축구 경기(A football match under association rules)”라는 표현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협회란 잉글랜드축구협회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당시 조선에 협회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인과의 경기이니 더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경기가 최초의 축구 경기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표 준비는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하나는 위에서 말한 축구가 언제 도입되었는가 하는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식민지 시기 축구대회였다. 식민지시기 스포츠에 대해서는 이미 연구들이 어느 정도 축적되어 있었다. 나는 임동현 선생님의 박사논문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식민지 시기 체육단체에 대해서는 이미 잘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사실적인 각론에 맞추어서 축구대회가 얼마나 성행했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자료를 정리하면서 놀라운 사실은 축구대회가 많아도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식민지 시기 축구대회하면 ‘경평축구전’을 많이 말한다. 이 시기 축구하면 경성과 평양이라는 사실은 크게 변함이 없었다. 가장 우수한 팀을 가진 지역은 경성과 평양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경성팀과 평양팀이 경기를 벌이면 빅매치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료를 정리하면서 경성과 평양 뿐만 아니라 정말 여러 지역에서 축구대회를 개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회 명칭도 ‘전조선축구대회’, ‘북조선축구대회’, ‘서조선축구대회’, ‘남조선축구대회’와 같은 방식이었다. 경상도에서 개최하면 경상도팀만, 전라도에서 개최하면 전라도팀만 참여하는 것이 현실이었지만, 대회 명칭만큼은 전국대회를 지향하고 있었다.

또 하나 특이했던 것은 신문 기사에 축구대회 경기규칙을 일일이 기재했다는 점이다. 아직 축구 규정이 통일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심판의 권위 또한 문제였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앞서 언급한 서병희였다. 영국에서 축구선수로 활동한 적이 있는 그의 경력을 빌어온 것이다. 그는 1924년 이를 바탕으로 <아式蹴球 規則 細則 心得及附錄(Association football)>이라는 책을 간행했다. 또한 축구 전술에 대한 책도 1925년 나왔다. 오영근이라는 인물이 지은 <蹴球術及規則(The Arts and Rules of Football)>이 책에는 각 포지션별 임무와 팀워크, 축구 용어 해설, 경기 규칙등이 언급되어 있었다.
 
 
   
그림 3. 식민지 시기 축구 관련 저서
출처: 국립중앙도서관(좌), 연세대학교 도서관(우)
 
 
식민지 시기 축구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은 청년회와 학교 중심으로 축구가 진행되었다는 점. 지역 간의 대결 양상이 확인된다는 점, 이미 1920년대 축구대회가 활성화되면서 축구화와 축구공 광고가 나오는 만큼 매우 보편적인 형태의 스포츠로 이미 자리매김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미 1920년이 되면 조선인들은 축구를 국기(國技)로 인식할 정도였다. 1920년대 신문을 보면 축구를 조선의 국기라고 하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내용을 주제로 발표를 진행했다.
 
 
그림 4. 2023년 3월 축구역사박물관 학술대회
출처: 뉴스1
 
 
발표를 진행하면서 평소 알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러한 학술대회는 처음이었다. 모두 모르는 사람 뿐이었다. 또한 역사연구자는 나 한 사람 뿐이었다. 축구 관계자, 체육 관계자, 박물관 관계자 뿐이었다. 미디어에서 본 분도 있고, 당시는 대학 축구팀 교수 겸 감독이었는데 지금 프로팀 감독인 분도 있었다. 사실 좀 신기했다. 나의 글을 토론해 주신 정윤수 성공회대 교수는 문화평론가의 관점에서 스포츠 역사에 대한 조언을 해 주어서 축구 역사 서술의 의미에 대해 짚어 주었다. 그리고 천안시청에서 멀지 않은 독립기념관에서 근무하는 임동현 선생님이 와서 자리를 함께 했다. 오히려 그의 얼굴이 너무 반가웠다. 일부러 와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축구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논문 투고와 설립 타당성 통과
 
학술대회 발표가 끝나고, 용역 보고서에 대한 중간보고와 최종보고회 자문에 참여하면서 나는 박물관건립추진위원에 위촉되었다. 이전과는 달리 박물관 건립에 발을 더 들여놓게 된 것이다. 나는 이때까지도 박물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만 천안에서 진행하는 것이기에 지역사의 관점에서 잘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가 박물관 운영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논문 투고에만 관심을 가졌다.

서로 다른 두 주제를 가지고 발표를 했기에 나눠서 발표할 생각이었다. 식민지 시기 축구대회에 대해서는 아직 자료 정리가 덜 되었으므로 축구 도입 과정에 대한 내용을 논문으로 내고자 했다. 제목은 “19세기 말 축구 도입과정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라고 정했다. 사실 도입 과정에 대한 내용이 첫 발표는 아니기에 문제점을 지적한다는 의미로 ‘비판적 접근’이라는 표현을 썼다. 문제는 어디에 투고할 것인가였다.

역사 논문으로는 사실 매우 빈약한 주제임에 틀림 없다. 내용이 심도있는 것도 아니고, 기존 축구사 내용에서 도입 부분에 대한 설명은 문제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수정한 것 뿐이었다. 그래서 역사학 학술지가 아닌 체육학 학술지에 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체육학에서 의미가 있는 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포츠역사에서는 기원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지금의 대부분 스포츠는 근대전환기 서양에서 도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축구 뿐만 아니라 야구, 정구, 탁구, 농구 등 모든 것이 그러했다. 체육학 학술지도 굉장히 많았는데 나는 고민 없이 “한국체육사학회지”에 내기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이름만 보고 체육사를 주제로 하는 학회지라고 생각했다.

글의 요지는 간단했다. 1882년 플라잉피쉬호에 의한 축구 전래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 1897년은 근대 축구 도입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라는 점, 영국공사관, 한성영어학교, 영국해군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점, 영국을 통해 근대 축구가 도입되었고, 잉글랜드축구협회의 규정에 따른 영국 축구를 접했다는 점, 도입 과정에서 영국의 영향이 매우 컸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내용으로 투고를 했는데, 결과는 ‘수정후재심’을 받았다. 관점의 차이는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도입 시점을 언제로 삼는가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한국축구백년사라는 책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었다. 또한 내가 인용한 자료에 대한 신뢰성 문제도 제기되었다. 체육학 학술지이다보니 아마도 체육학 전공자 선생님이 심사했을 가능성이 큰데 역사학에서 보는 체육사와 체육학에서 보는 체육사의 차이라고 느껴졌다. 아마도 내가 아는 한 두 학문 분과가 교류를 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한국체육사학회의 임원 구성을 보아도 역사학 전공자는 전무하다. 내가 아는 한 한국체육대학교의 심승구 교수님 이외에는 없었다. 2024년 4월, 한국체육사학회 춘계학술세미나에서 심 교수님이 기조강연을 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 세미나 참석자 중 역사학자는 심 교수님 뿐이었다.

재심사이기 때문에 다시 심사를 받아야 했다. 심사를 위해 “수정지시이행표”라는 것을 작성해야 했다. 지금까지 역사학 논문을 투고하면서 이런 것을 작성한 경험이 없는데, 이 학회는 매우 까다로웠다.(나중에 이러한 경험을 “헤리티지” 학술지에서도 했지만)  심사 수정사항에 대해서 일일이 모두 답변을 달아야 했다. 나는 심사자의 의견에 대해서 다시 역사학의 관점으로 답변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재심에서 논문은 큰 문제 없이 통과되었고 한국체육사학회지에 논문을 실을 수 있었다. 2023년 9월이었다.
 
 
   
그림 5. 논문 투고와 타당성 통과
출처: 한국학술지인용색인(좌), 연합뉴스(우)
 

논문 투고를 다 마무리할 쯤, 천안시청에서 연락이 왔다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건립 타당성 평가를 통과했다는 소식이었다. 매우 축하한다는 말씀을 드렸다. 천안시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업이었는지, 당시 천안시장은 박물관건립위원을 모두 초대하여 점심을 먹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 자리가 너무 부담스러워서 안가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내가 가야 할 자리인가 싶기도 했고, 내가 뭘 더 할 수 있는 지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딱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축구사 논문도 쓰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모든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초기 축구사 연구를 위한 과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연락을 받았다. 연구과제를 수행해 달라는 말이었다. 타당성을 통과했기 때문에 전시 기획을 위한 연구가 필요했다. 일전에도 건립위원회에서 여러 차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연구를 해야 한다고. 그런데 천안시에서 실제로 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해방 이전 자료에 대한 수집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시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초기 축구사에 대한 내용이었다.
 
과제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도입 시기에 대한 확인과 영국과의 관계, 다른 하나는 해방 이전 축구 관련 기사 목록 정리였다. 해방 이전 축구 관련 기사 정리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개항기와 식민지 시기 신문 기사를 정리해서 모두 목록화하면 되었다.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와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에서 검색하면 전체 신문기사는 모두 2만 3천여 건이 확인되었다. 잡지 자료도 함께 정리하기로 했다.
 
문제는 도입 과정에서 영국 관련 자료를 검토하는 일이었다. 영국 관련 자료는 영국국립문서보관소 자료를 활용해야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부산대 한승훈 교수님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 교수님은 영국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영국공사관 기록을 통해 1882년 조선에 입항한 플라잉피쉬호(HMS Flying Fish), 엔카운터호(HMS Encounter), 쉬프트호(HMS Swift)의 행적을 모두 정리해 주셨다. 이들 보고서와 함대의 역할이 상세하게 파악될 수 있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영국함대의 항해일지(log)라는 사실을 작가인 Robert Neff로부터 알게 되었다. 나중에 쓸 내용이긴 하지만, 운산금광을 논문을 쓰던 중에 알게 된 분인데, 축구사 논문을 쓴다고 하니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오마이뉴스 영문판에 이미 내가 언급한 내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이 내용도 모두 논문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함대일지(log) 기록을 찾으면 되지 않냐고 조언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 교수님께 해군 함대 항해일지 자료를 부탁했다. 항해일지에는 여러 자료가 수록되어 있었다. 선박의 모든 움직임과 위치, 고위 인사 방문 등 거의 모든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1845년 조선 남해안을 항해하던 영국 군함 사마랑호(HMS Samarang)의 항해일지는 CORRAL이라는 사이트에서 디지털 자료로 확인이 가능했다는 점도 확인시켜 주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해당 사이트는 1876년 항해일지까지만 올라와 있다고 한다. 1882년 함대의 항해일지는 아직 디지털화되지 못한 것이다. 다만 영국국립문서보관소에서 서지사항만 확인할 수 있었다. 한 교수님은 가격을 의뢰했다. 복사라도 필요하면 할 생각이었다. 얼마 뒤에 받은 자료에 따르면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복사비가 그렇게 비쌀 줄은 몰랐다. 영국 해군 관련 자료 수집은 딱 거기까지 였다. 더는 연구비로 진행할 수 없었다.
 
첫 연구 과제는 6개월만에 마무리 지었다. 최종보고회를 하는데, 천안시청에서 시장님을 모시고 하겠다고 해서 매우 긴장했다. 얼마 안되는 수의계약 최종보고회에 굳이 시장님까지 모셔와야 하나. 천안시청 박물관건립팀에서는 그만큼 자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최종보고는 잘 마무리 되었고, 앞으로 무엇을 더 해야 할지 이제는 그게 문제였다.
 
 
   
그림 6. 두 번의 연구용역 최종보고회
출처: 뉴스파고(좌), 더팩트(우)
 
 
해를 넘겨 2025년, 후속 연구가 진행되었다. 첫 연구용역에서는 기사 목록을 작성하였으니, 이제는 내용 파악이 중요했다. 내용 파악을 위해서는 축구 관련 기사를 전수 입력할 필요가 있었다. 식민지 시기 신문 자료를 그대로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글이라고 해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용어와 표현으로 쓰여져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자료가 필요했다. 신문 기사가 가장 많은 자료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였다. 이 중에서 나는 동아일보 기사를 전체 입력하자고 하여 그대로 과제가 진행되었다.
 
동아일보 축구 관련 기사를 전수 입력해 보니 A4로 2천 쪽이 나왔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원고를 작성하는 지금 해당 보고서는 이제 제출만 남아 있다. 이제 연구는 2천 쪽에 달하는 자료를 분석하는데 있다. 축구대회 정리, 축구팀 정리, 축구선수 명단 정리, 심판 정리, 축구대회 규정 정리 등등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았다. 아직 어느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축구만 그러할까. 내가 아는 한 야구, 정구, 농구, 탁구 등 거의 모든 스포츠 역사가 아직 이렇게 정리된 적은 없다. 식민지 시기에만 그럴까. 해방 이후 축구대회도 아직 정리된 적이 없다. 어떠한 축구팀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축구 선수를 말할 것도 없고 심판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축구대회 규정이 정착된 것도 언제인지 아직 모른다. 체육으로 보는 한국사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만 맴돌 뿐이다. 그것도 지역사와 연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