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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한양의 옛사람과 풍류 ⑤_김성희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9.03 BoardLang.text_hits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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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8월(통권 66호)

[기획연재] 
 
 

한양의 옛사람과 풍류 ⑤:

지화자 좋던 활량들은 지금 어디에

 


김성희(중세2분과)

 
 
현재 남산의 명소 가운데 하나로 잠두봉 아래에 즐비한 돈까스 식당들을 꼽을 수 있다. 감칠맛을 이끌려 모여드는 손님들로 이 일대는 늘 북적이는데, 현란한 문구로 시선을 끄는 식당 간판들 때문에 좀처럼 남산 쪽으로 눈길을 돌리기 어렵다. 그러나 오늘날 미식가들로 붐비는 이 거리가, 본래는 무사들의 호연지기가 솟구치던 무대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림 1. ‘청룡정(靑龍亭)’ 바위 글씨 원경(서울특별시 중구 소파로 101길 일대)
출처: 김성희 촬영
 
 
허기로 다급한 식전이라면 모를까, 배불리 식사를 마치고 나면 주위 풍경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남산처럼 부른 배를 달랠 겸 산자락을 오르려는 순간, 채 몇 걸음 떼지도 않아 저 길가 바위 한구석에 새겨진 어렴풋한 글씨가 시선을 붙든다.
 
 
그림 2. ‘청룡정(靑龍亭)’ 바위 글씨 근경
출처: 김성희 촬영
 
 
길가의 연석을 넘어 바위 앞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손으로 쓸어내리자, 힘찬 필치로 새겨진 ‘청룡정(靑龍亭)’ 세 글자가 또렷이 드러난다. 큰 바위 한 면을 반듯하게 다듬어 멋스러운 글씨를 새겨 넣은 모양새로 보아, 결코 예사로운 낙서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바위에는 어떤 사연이 깃들어 있기에 낙엽 속에 반쯤 묻힌 채 조용히 오늘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그 내력을 찾아보기 위해 옛 문헌을 한 장 열어 본다.
 
 
남단(南壇), 우사단(雩祀壇), 용단(龍壇)을 봉심(奉審)하고 청룡정(靑龍亭), 이태원(梨太院), 외남산(外南山), 남벌원(南伐院), 응봉(鷹峯)을 적간(摘奸)한 사관(史官)의 서계(書啓)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이 서계를 보건대 금위영에서 관리하는 여러 곳의 송정(松政)이 이처럼 문제가 많다. 더구나 이른바 파종(播種)하고 식수(植樹)한 것이 한갓 바라보기만 아름다울 뿐이니 매우 해괴한 일이다. 해당 장신은 엄하게 감처(勘處)해야 할 것이나 제수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금위대장 신대현은 우선 월봉 1등에 처하고, 해당 참군은 병조 판서로 하여금 잡아와 각별하게 엄히 곤장을 치게 하라.”
『일성록』 정조 22년 11월 3일 기사
 
 
1798년 11월 무렵, 남산 성곽 안팎의 여러 시설과 주변 식수(植樹) 현황을 점검하는 실태조사가 있었던 듯하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금위영은 본래 서대문에서 남대문을 거쳐 남소문인 광희문(光熙門)에 이르는 도성 구간을 관할하던 군영(軍營)인데, 이 금위영이 맡은 송정(松政), 곧 소나무 심기와 가꾸기의 실상이 겉모습은 그럴듯했으나 실제로는 엉망이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직무를 소홀히 한 책임자들이 적잖은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고초와는 별개로, 이 기록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청룡정(靑龍亭)’이라는 이름이다. 필자의 과문함일 수 있으나, 다른 문헌에서는 이 명칭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함께 언급된 남단, 용단, 우사단이 모두 남산 권역에 속해 있었음을 고려하면, 여기서의 청룡정은 바위에 새겨진 글씨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청룡정은 과연 어떤 성격의 장소였을까? 남단·우사단·용단처럼 제사가 행해지던 제의 공간이었을까? 아니면 이태원처럼 역원의 성격을 지닌 곳이었을까? 이름만으로는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그 내력은, 다름 아닌 글씨가 새겨진 바위 자체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림 3. 옛 활터의 바위 글씨. 왼쪽부터 등과정, 백호정, 좌룡정 각석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2004 『바위글씨 展 한양사람들의 멋과 풍류』, 55쪽
 
 
조선시대에 활쏘기는 사대부의 여섯 가지 기본 수양인 육예(六藝)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중요한 기예였다. 이 때문에 경향 각처에는 수많은 활터가 조성되었고, 그곳에는 으레 풍취 있는 정자[射亭]가 세워지곤 했다. 오늘날에도 그 터를 알리는 정자의 이름이 바위에 새겨져 남아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인왕산 자락의 등과정(登科亭)과 백호정(白虎亭), 낙산 기슭의 좌룡정(左龍亭) 각석이 비교적 잘 알려진 사례다. 청룡정 바위 글씨는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고, 아는 이도 드물지만, 아마도 남산 기슭의 활터 곁에 세워졌던 정자의 이름을 전해주는 흔적이 아닐까 짐작된다.
 
1929년에 간행된 『조선의 궁술』(이 책은 2008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새롭게 읽는 조선의 궁술》이라는 제목으로 재간행되었다)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관에서 운영하던 활터 외에도 민간에서 활터[射亭]를 세우는 일이 활발히 이루어졌다고 한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나라에서 상무(尙武) 정신을 고취하려는 분위기가 일면서 민간에서도 활쏘기가 크게 유행하였다. 그 결과 한양 도성 안에도 이름난 활터가 여러 곳 생겨났는데, 인왕산 기슭의 동리인 ‘우대(上村)’에는 다섯 곳의 활터가 있어 ‘우대오사정(上村五射亭)’이라 불리며 명성이 자자하였다. 이 일대의 등과정(登科亭)·등룡정(登龍亭)·운룡정(雲龍亭)·대송정(大松亭)·풍소정(風嘯亭)이 그 대표적인 활터였다.
 
 
그림 4. 인왕산 어귀에 자리한 황학정의 전경
1898년 경희궁 안에 지어졌으나 1922년에 원래 등과정(登科亭)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출처: 국가유산포털
 
 
다음으로, 도성의 동남쪽 지역을 일컫는 ‘아래대[下村]’에는 네 곳의 활터가 이름나 ‘아래대네터’라는 말이 흔히 회자되었다고 한다. 석호정(石虎亭)·좌룡정(左龍亭)·화룡정(華龍亭)·이화정(梨花亭)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그림 5. 1925년 남산 기슭의 석호정 활터에서 벌어진 궁술대회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그림 6. 낙산 기슭 좌룡정 활쏘기 장면이 담긴 엽서 
출처: 한양도성 아카이브
 
 
이처럼 널리 알려진 활터들 외에도, 북촌에는 일가정(一可亭)·흥무정(興武亭)·취운정(翠雲亭)이 있었고, 남촌에는 상선대(上仙臺)·세송정(細松亭)·왜장대(倭將臺)·청룡정(靑龍亭)·읍배당(揖拜堂)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을 통해 비로소 청룡정의 정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오늘날 돈까스집들이 늘어서 있는 남산 서쪽 기슭 소파로 일대에는 과거 ‘청룡정’이라 불린 활터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활터는 자취를 감추었고, 다만, 그 이름을 품은 바위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요즘에도 흔히 쓰이는 추임새 가운데 ‘지화자’라는 말이 있다. 본래는 윷놀이에서 모를 치거나 활쏘기에서 과녁을 맞혔을 때 잘한다는 뜻으로 외치던 소리였다. 철마다 활량들이 모여 실력을 겨룰 무렵이면 도성 안 곳곳에서 지화자 소리가 터져 나왔을 것이니, 그 흥겨운 풍정을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신명이 이는 듯하다.
 
그러나 한때 큰 인기를 누리던 활쏘기 풍속도 갑오개혁 이후 옛 무예가 점차 효용을 잃어가던 시대의 흐름 속에서 차갑게 스러져 갔다. 남산 자락을 울리던 ‘퍽’하고 살 맞는 소리, 지화자 기분 좋은 소리도 차츰 잦아들었으리라. 이제는 누구의 눈길도 머물지 않는 청룡정 바위의 쓸쓸한 처지가 다만 애석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