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역사랑' 2025년 8월(통권 66호)
[기획연재]
고대의 바다를 고대의 시선으로 ⑨:
신라, 동해라는 바다에 맞서다
임동민(고대사분과)
1. 들어가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반도의 해양 환경을 말할 때, 흔히 “삼면이 바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앞선 연재에서는 삼면 가운데 남해와 황해에 도전하였던 다양한 고대의 사람들에 대하여 다루었다. 이번 연재에서는 “삼면이 바다”라는 표현에 걸맞게, ‘동해’에 도전하였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런데 동해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받아왔다. 아무래도 한국 고대의 사람들은 중국과의 연결을 위하여 황해에 도전하거나, 일본과의 연결을 위하여 남해에 도전하였고, 이에 대한 문헌과 물질 자료가 다수 남았다. 그렇다면 동해는 한국 고대와 상관없는 바다였을까?
동해 연안을 따라 이어지는 좁은 평야지대는 동해로 흘러가는 하천을 중심으로 농경사회의 좋은 터전이 되었다. 선사시대에는 양양 오산리, 고성 문암리 등의 중요한 유적을 동해 연안에서 찾을 수 있고, 고대에는 ‘예’, ‘옥저’, ‘읍루’ 등의 정치체를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동해는 발해, 신라 등이 일본과 관계를 맺기 위하여 반드시 도전해야 하는 자연환경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대체로 2000년대 이후, 고대 동해를 키워드로 하는 논문과 단행본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다.
이번 연재에서는 어느 나라보다 동해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한국의 고대 국가인 신라에 주목하고자 한다. 신라는 경주 일대에서 건국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태화강 유역의 울산이나 형산강 유역의 포항을 통해 동해로 연결되었다. 공교롭게도 울산만과 영일만은 원산만과 더불어 동해 연안에서 가장 좋은 천연의 항구였고, 많은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평야가 펼쳐진 입지였다. 따라서 신라가 동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대중적인 신라의 이미지는 바다와 관계없는 내륙 국가처럼 여겨지지만, 실제 신라의 성장 과정은 처음부터 동해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1) 그리고 국가의 성장과 영역의 확장에 따라, 신라는 차츰 남해와 황해에도 도전하였다. 이번 연재에서는 남해, 황해보다 동해에 집중하여, 신라인의 동해 도전기를 서술하도록 하겠다.2)
2. 동해 연안의 해양 환경과 좋은 항구의 조건
동해는 한반도 동쪽으로, 러시아와 일본으로 둘러싸인 반 폐쇄성 해역이다. 동해의 남쪽 경계는 남해의 유동적인 범위로 인하여 다소 모호한데, 일반적으로 부산광역시, 일본 쓰시마, 대한해협을 경계로 하여 동쪽을 동해로 이해하는 경향이 크다.
동해에는 한류와 난류의 영향이 있으나, 0.2~0.5 노트 정도의 유속으로 매우 느린 편이다. 또한 동해는 조류 속도, 조수간만의 차이, 갯벌 면적, 해안선 굴곡도 등의 측면에서 황해, 남해보다 현격히 적은 수치를 보인다. 동해 연안은 황해, 남해와 달리 섬이 거의 없고 단조로운 해안선을 가지고 있어서, 외해의 높은 파도가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 다만, 동해 연안에는 곶, 만, 사빈이 순서대로 반복되거나, 유역면적이 짧은 여러 하천이 바다로 유입하여 하구를 만들면서, 단조로운 지형에 변주를 준다. 동해 연안은 북동쪽에서 높은 파도가 진입하므로, 주요 항구는 곶 돌출부의 남쪽과 북쪽 만에 발달한다. 특히 돌출부 남쪽 만은 북동 방향 파도를 차단할 수 있어 비교적 안전한 편인데, 돌출부를 지나 만으로 들어가면 사빈해안이 위치한다. 따라서 동해 연안에는 북에서 남으로 돌출부의 곶, 항구, 해수욕장의 순서가 자주 보인다. 한편, 강릉 이북의 동해 연안에는 하천 모래의 퇴적 활동으로 만들어지는 석호가 확인된다. 다만, 석호 지형은 자주 변화되며, 석호에서 동해로 나가는 하구는 파도에 의한 퇴적으로 막혀서 범람의 우려가 있다.3)
동해안의 바람은 겨울철에 강하며, 국지 강풍, 해륙풍 등이 나타난다. 산에서 내려오는 서풍계 국지 강풍은 봄철에 자주 발생하며, 양양과 간성에서 현저하다. 해풍은 서풍 기압배치에서도 짧게 불기도 하는데, 남해안이나 서해안과 다른 특징이다. 해풍 발생빈도는 겨울과 가을에 높다.4)
전통시대 동해 연안이나 포구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은 주로 조선시대 자료에서 확인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강원도, 경상도에 속초(束草浦), 고성(江浦口), 삼척(三陟浦), 울진(守山浦), 강릉(連谷浦), 울산(鹽浦, 西生浦), 영덕(烏浦), 영해(丑山浦), 경주(甘浦) 등의 수군 만호 수어처가 보인다.5) 세종, 성종, 세조대에는 모래 퇴적으로 인한 준설이나 포구의 이동이 종종 확인된다. 기존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동해 연안의 수군포가 자연 석호를 활용하기도 하였으나 모래 퇴적 등의 이유로 변천을 거듭하였음을 언급하였다.6)
근대적인 시선에서 동해 연안을 본격적으로 조사한 결과물은 1930년대 일본이 만든 『조선연안수로지』가 대표적이고,7) 이를 기반으로 해방 직후인 1952년 대한민국 해군에서 『한국연안수로지』를 발간하였다.8) 이에 따르면, 동해안의 좋은 항구로는 울산만이 손꼽히는데, 깊게 만입하여 북동풍을 완전히 막을 수 있고, 태화강 하류를 통해 선박의 출입도 가능하였다. 또한 영일만은 형산강 하구에 위치하며 동해안의 주요 항구인 포항항이 있다고 나오나, 수심 변동이 심하고 북동풍 방어가 어렵다는 한계도 지적된다. 그 외에 토사 유출로 인한 수심 변동의 한계는 있으나 영덕 강구항이 선박 출입이 가능한 오십천 하류에 있다고 나온다.
강원도 삼척의 정라항은 하천 하구에 위치한 주요 항만이나, 수심 변동과 외해의 풍랑이라는 위험 요인도 존재한다고 평가되었다. 고성 봉수항은 남강 하류에 위치하여 기항지로 적합하고, 금강산 목재의 수운 및 해운 중심으로 전한다. 그 외에 강원도 북부 연안은 해안선이 단조롭고 절벽이 많아 항해하기 어렵다고 전한다. 북쪽의 장전항(고성항)은 금강산 상륙지로 유명하나, 산풍과 암초의 문제가 있다고 나온다. 그 북쪽에는 동해 연안에서 좋은 항구의 조건을 갖춘 영흥만, 송전만, 원산만이 있는데, 특히 원산항은 갈마반도로 동풍을 막을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다고 나온다.9)
조선시대 수군 만호 수어처인 동시에, 『한국연안수로지』에서 좋은 항구로 언급된 지역은 삼척포-정라항, 강포구(고성)-봉수항 정도이다. 그 외에 자연적으로 좋은 항구의 조건을 갖춘 만은 울산만, 영일만, 원산만 정도에 해당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동해의 해양 환경과 좋은 항구의 현황은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 연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신라의 동해 도전기를 검토할 수 있는 배경지식으로 의미가 있다.
그림 1. 1985년 구글 타임랩스 지도에 표시한 동해안 주요 도시 및 만
3. ‘왜’의 침입과 동해, 그리고 신라의 해양력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시조 박혁거세부터 6세기 초 소지마립간까지 왜의 침입 기사가 다수 등장한다. 이러한 침입은 대체로 울산, 포항을 중심으로 하는 동해 연안에 도달하는 사례가 일반적이었다. 기존의 연구에서도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왜 침입 기사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과거 일본에서는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지배라는 식민주의 역사학의 관점으로 연구하기도 하였지만, 현재 그러한 연구는 사실상 폐기되었으며, 기록에 보이는 ‘왜’의 실체와 주요 근거지를 탐구하거나, 이를 방어한 신라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는 한편, 기록의 내용과 연대를 따져보는 사료비판의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이번 연재에서는 왜의 침입 전반을 다루기보다, 신라와 동해의 상관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박혁거세 8년(기원전 50), 남해차차웅 11년(기원후 14) 등 건국 직후부터 왜의 해변 침입 기록이 보이는데, 시조의 신이한 덕으로 물리쳤거나 6부의 병사로 방어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이러한 기록은 시조 신성성 강조 등의 이유로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일본 규슈나 혼슈 서북부 일대에서 계절풍을 타고 동해 연안을 침입하는 해적의 존재 정도는 상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어서 탈해이사금, 파사이사금 시기에는 동래에서 울산, 포항, 삼척에 이르는 동해안 소국을 정복한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주변 소국 정복 기록의 신뢰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비판이 있으나, 이번 연재에서는 신라의 국가적 관심이 가장 먼저 동해안 소국의 복속으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추정 정도만 하고자 한다.
이어지는 지마이사금 10년(121) 4월에는 왜인이 신라 동쪽 변경을 침입하였고, 11년(122) 4월에는 백성들이 왜병 침입의 소문만 듣고 산으로 피난가는 일도 벌어졌다. 아마 해적 성격의 왜인 침입은 대체로 음력 4월 남동계절풍을 타고 신라 동해 연안을 약탈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서양 중세의 ‘사라센 해적’도 정기적으로 계절풍을 타고 연안을 약탈하였는데, 이에 해안가 주민들은 수평선에서 해적선을 확인하면 산으로 들어가 방어하거나 피난하였다. 일정 시점에 왜의 해적적 침입이 이어지자, 동해 연안의 주민들은 뜬소문에도 놀라 피난하는 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인의 침입은 이후 잠시 뜸하였다가, 나해이사금 13년(208)에 발생하였고, 조분이사금 3년(232) 4월에는 왜인이 내륙의 금성까지 쳐들어오기도 하였다. 이때 신라가 1천여 명의 왜인을 살획하였다고 하므로, 왜 침입의 규모나 공격 대상이 확대되는 정황이 보인다. 또한 조분이사금 4년(233) 5월에도 왜병이 동쪽 변경을 침략하자, 동해안 일대로 추정되는 사도에서 왜인의 배에 화공을 가하여 적을 수장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신라가 왜인의 침입을 맞아, 배에 화공을 가할 정도로 다양한 전술을 펼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조분이사금은 6년(235) 동쪽으로 순행하였는데, 왜인의 침입으로 부담을 갖게 된 동해 연안의 백성들을 위무하려는 시도로 추정된다.
이어서 3세기 말 유례이사금대에는 여름 4~6월에 왜인이 사도성, 장봉성 등을 연달아 쳐들어오자, 선박 등을 수리하는 일이 있었고, 12년(295)에는 백제와 함께 바다를 건너 왜를 직접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왜인의 침입이 점차 본격화하자, 신라는 선박을 수리하면서 사도성을 개축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바다를 건너 왜의 본거지를 직접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양국 관계는 잠시 우호적인 시기를 보냈는데, 신라는 4세기 중반부터 4세기 후반까지 여러 차례 왜인의 침입을 받았고, 이 중에는 금성에 대한 포위 공격까지 있었다. 이에 실성마립간은 재위 7년(408)에 왜인의 본거지 대마도를 직접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험한 곳에서 방어하자는 의견을 따라 실행하지 않았다. 신라는 지속적으로 침입해오는 왜인의 본거지가 대마도라는 점을 분명히 확인하고, 구체적인 공격 목표에 대하여 바다를 건너 군사를 투입하려는 시도를 꾀하였다.
5세기에도 왜인의 침입은 동쪽 변경과 금성을 중심으로 꾸준히 이어졌는데, 자비마립간 2년(459)에는 월성을 포위한 왜인을 격퇴하고 북쪽으로 해구(海口)에 이르러 익사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경주에서 북쪽으로 도달하는 해구는 형산강 하구의 영일만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왜인은 병선으로 동해 연안의 좋은 항구인 영일만까지 들어와 육로로 경주까지 도달하였다가 퇴각하는 길에 격퇴당한 것으로 보인다.
영일만은 앞 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해 연안에서 좋은 포구의 조건을 갖춘 희소한 지역 중 하나이므로, 침입하는 왜의 입장이나 방어하는 신라의 입장에서 모두 중요한 곳이었을 것이다. 자비마립간은 쳐들어온 왜인을 적절히 방어하는 동시에, 동해 연안에 성을 쌓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어지는 5세기 후반 소지마립간 시기에도 왜인의 변경 침입이 이어졌지만, 22년(500) 왜인의 공격 기사를 끝으로 왜의 침입 기록은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아마도 신라는 마립간 시기의 국가적인 성장을 기반으로, 연안 방어를 강화하거나 바다 건너 선공을 시도하는 등의 해양력을 발전시켜, 왜의 동해 연안 침입을 막아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황해를 건너 중국 왕조들과 활발한 관계를 맺거나, 나당전쟁에서 황해를 건너오는 당군을 격퇴한 것을 강조한다. 학생이나 대중들에게 신라는 바다와 동떨어진 내륙에서 성장하였을 것 같은 이미지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라는 건국 직후부터 동해를 건너오는 왜의 침입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이러한 기록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학계의 오랜 논의가 있었다. 다만, 신라의 동해 연안이 계절풍을 타고 일본 규슈, 혼슈 서북부에서 왕래할 수 있는 지역이었음은 분명하다. 왜의 침입은 신라 왕경인 경주를 향하기도 하였으나, 연안 지역을 약탈하는 해적의 성격도 있었다. 이러한 공격은 모두 바다를 건너오는 특징을 갖고 있었고, 신라는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다양한 국가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신라의 해양력은 단계적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점진적으로 축적한 신라의 해양력은 지증왕대 우산국 정벌이라는 사건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 지증왕은 재위 6년(505),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삼았다. 실직주는 대체로 강원도 삼척 일대로 추정된다. 이어서 재위 13년(512) 여름 6월에 우산국이 항복하였는데, 하슬라주 군주 이사부가 전선을 이끌고 가서 우산국을 위협한 결과였다. 하슬라주는 대체로 강원도 강릉 일대로 추정된다.
우산국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동해의 넓은 바다에 따로 떨어져 있는 울릉도에 비정된다. 얼핏 보기에 울릉도는 동해의 먼바다에 있어서 인간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못하였을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울릉도의 최고봉인 성인봉(해발 986.5m)은 날씨가 좋을 때, 동해 앞바다에서 충분히 확인 가능한 좋은 지표물이었다. 지증왕 이전부터 울릉도는 동해 연안 지역과 교류한 것으로 보이고, 신라도 울릉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신라는 동해 연안으로 침입하던 왜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점차 국가적인 해양력을 키웠고, 그러한 발전에 힘입어, 지증왕대에는 우산국을 복속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것이다.
사료를 보면, 이사부가 하슬라주 군주가 되어, 나무로 사자 모형을 만들어 전선에 싣고, 바다를 건너가서, 우산국 사람들을 위협하자, 우산국에서 항복하였다고 전한다. 신라는 6세기 초에 전투용 배를 다수 만들어, 동해의 먼바다로 나가 울릉도까지 항해할 수 있는 경험, 기술, 정보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단순히 어업이나 교역을 위한 민간 차원의 이동과는 차이를 보인다.
한편, 우산국 정벌을 위한 이사부의 출항지에 관해서는 삼척과 강릉을 중심으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강릉 경포대 현대호텔(현 씨마크호텔) 부지의 공사 과정에서 강문동 토성이 발견되면서, 하슬라주의 중심이자 이사부의 출항지로 강문동 토성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지만, 논쟁이 정리된 것은 아니다. 앞 장의 논의를 참고한다면, 삼척은 조선시대 기록과 근현대 연안수로지에서 모두 좋은 포구로 언급된 지역이라는 장점이 있고, 강릉은 경포호와 같은 석호가 포구로 활용될 여지가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현재 이사부의 출항지를 명확히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신라가 울진부터 삼척, 강릉에 이르는 영동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자연스럽게 우산국 정벌까지 성공하였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기록들은 신라가 동해라는 바다에 어떻게 도전하였고, 어떠한 방식으로 해양력을 키워나갔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동해 연안에서 포항, 울진, 삼척, 강릉 등의 지역이 왜의 침입을 받고 이를 물리치거나, 신라가 해안 방어를 위하여 관심을 쏟은 지역으로 등장하며, 우산국 정벌을 위한 이사부의 활동 지역으로도 등장한다. 이상의 지역들은 좋은 포구가 희소한 동해 연안에서도 천연의 자연조건을 갖춘 포구였다. 신라가 동해라는 바다에 점차 도전하면서, 위의 지역들을 중요한 포구로 주목하였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4. ‘박제상’, ‘부례랑’을 통해 살펴본 신라의 동해 도전기
신라가 동해안을 따라 진출하는 과정에서 동해라는 바다를 어떻게 활용하였는지 보여주는 자료로 ‘박제상’ 기록이 주목된다. 박제상은 신라왕의 두 동생을 고구려와 왜에서 구출해온 충신으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기록되었다. 아래는 『삼국유사』의 박제상 관련 기록이다.
4-1. … 이때(눌지 10년(425)) 백관이 모두 아뢰기를, “이 일(두 동생의 구출)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반드시 지혜와 용기를 가진 자라야 가능할 것입니다. 신들은 삽라군(歃羅郡) 태수(太守) 제상(堤上)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4-2. … 제상은 왕 앞에서 명령을 받고, … 고구려로 들어갔다. 보해가 있는 곳에 나아가 함께 도망칠 기일을 의논하고, 먼저 5월 15일에 고성(高城)의 수구(水口)에 돌아와 배를 대놓고 기다렸다. 약속한 날짜에 이르게 되자, … (보해는) 도망쳐 나와서 고성(高城) 해빈(海濱)에 도착하였다. 왕이 이를 알고, 수십 명을 시켜 그를 추격하게 하였는데, 고성에 이르러 그에게 도달하였다. 그러나 보해가 고구려에 있을 때, 항상 좌우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군사들이 그를 상하게 할까 걱정하여, 모두 화살촉을 뽑고 화살을 쏘았으니, 마침내 추격을 면하고 돌아왔다.
4-3. … (박제상이) 곧장 가서 율포(栗浦)의 해변에 이르렀는데, 부인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쫓아가 율포에 이르렀지만, 남편이 이미 배 위에 있음을 보았다. 부인이 간절히 그를 불렀으나 박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기만 하고 멈추지 않았다. 왜국에 도착하여 … 미해는 바다를 건너와서, 강구려를 시켜 먼저 나라 안에 알리게 하였다. 왕이 놀라고 기뻐서, 백관에게 명하여 굴헐역(屈歇驛)에서 맞이하게 하였다.10)
박제상 관련 기록은 전하는 책에 따라서 김제상, 박제상 등으로 인명에 차이가 있고, 몇몇 사건의 연대에도 차이가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위 기록이 신라의 동해 도전기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위 기록을 살펴보면, 삽라군 태수 박제상은 ‘지혜’와 ‘용기’를 갖춘 인물로 설명되며, 고구려에 들어가 5월 15일 고성의 수구에 배를 대었다가 고성 해빈에서 보해와 함께 돌아왔다. 여기서 삽라군은 삽량주라고도 하며, 지금의 양산 일대로 비정하는 편이 일반적이나, 박제상의 본거지를 울산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양산도 낙동강 하류에서 바다로의 진출입이 쉬운 곳이고, 울산도 역시 천연의 좋은 포구이므로, 박제상이 해양과 관련한 다양한 경험과 기술, 정보를 갖춘 인물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사료에 ‘지혜’와 ‘용기’를 갖추었다는 표현도 이러한 정황과 관련될 것 같다.
이어서 박제상이 보해를 만나 도망치는 기일로 ‘5월 15일’이 나오고, 배를 정박해둔 출항지로 ‘고성(高城) 수구(水口)’가 나온다. 그리고 보해가 ‘고성(高城) 해빈(海濱)’에 도착하자 함께 탈출하였다고 나온다. 물론, 당시 고구려 우위의 신라-고구려 관계를 고려하면, 박제상이 보해를 탈출시켰다는 기록은 엄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박제상을 위하여 후대에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5월 15일과 고성이라는 출항일, 출항지 기록은 고대 해양 기록 가운데 유례없을 정도로 구체적인 편이다. 따라서 동해의 해양환경과 연결시켜 살펴볼 여지가 있다.
그런데 7세기 말 신라 효소왕대 부례랑 관련 『삼국유사』 기록에서도 이와 유사한 출항일, 출항지 기록이 확인된다. 화랑 부례랑은 낭도들과 함께 동해 연안에서 수련하다가, 원산만 일대에서 ‘북적(狄賊)’에게 붙잡혔다. 그러자 그의 부모가 5월 15일에 경주 백률사에서 귀환을 기원하며 여러 날 기도를 하였다. 기도의 효험 때문인지, 부례랑이 갑자기 부모 앞에 도착하였다. 부례랑이 말하기를, 어떤 스님이 나타나 들고 있던 피리를 나누어 바다에 띄워 타게 하니, 잠깐 사이에 돌아왔다고 하였다. 아마 부례랑 일행이 원산만 일대에서 경주까지 돌아온 시기는 부모가 기도를 드리기 시작한 5월 15일에서 멀지 않았을 것이고, 상당히 빠른 속도로 항해하여 돌아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설화적인 기록이므로, 이를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구체적인 지명과 출항일은 주목된다.
박제상과 부례랑의 기록을 보면, 동해 연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항해가 모두 5월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음력 5월은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고, 남동계절풍이 불기 시작하므로, 계절풍과 반대 방향으로 북에서 빠르게 내려오는 항해가 가능하였는지 의문이 남는다.
이와 관련하여, 현대의 동해안 풍향 관측 데이터 등을 종합하면, 의외로 동해 연안에서는 여름철 남동계절풍, 겨울철 북서계절풍과 상관없는 바람이 자주 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겨울에는 서풍 계열의 바람이 주로 불기는 하나, 여름에는 남동풍 외에 북풍, 서풍, 남서풍 등의 다양한 바람이 분다.11) 동해안의 바람은 국지풍, 해륙풍의 영향이 강한데,12) 강릉에서는 북서쪽 태백산맥의 영향으로 연중 남서, 서남서풍이 불고, 겨울에 북서풍이 적게 불며, 장전만에서는 남서쪽 금강산에서부터 돌풍이 불기도 하였고, 원산만에서는 해륙풍이 강렬하였다.13)
따라서 동해 연안을 따라 이루어지는 항해에서는 계절풍의 영향보다 국지풍이나 해륙풍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렇다면 박제상이나 부례랑의 항해는 남동계절풍과 상관없이, 국지풍이나 해륙풍의 영향을 활용하여 이루어진 항해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들의 항해가 안전하거나 쉬운 것은 아니었다.
보통의 연안항해도 풍향이나 조류의 변화, 주변 해역의 암초와 같은 방해요소를 숙지하고 항해에 나서야 하며, 순풍을 얻지 못하면 바로 앞에 목적지를 두고도 며칠씩 정박해야만 하였다. 국지풍과 계절풍이 수시로 바뀌는 동해 연안의 항해에서도 수시로 정박할 수 있는 포구를 미리 확인하거나,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박제상은 보해의 탈출을 위하여 고성의 수구에 주목하였다.
고성 일대에 좋은 포구는 장전만, 남강 하구의 봉수항이 있다. 그런데 북쪽의 장전만에서 출항하면, 연안 지형이 험준한 수원단에서 방향을 전환하는 문제가 있었다. 남쪽의 봉수항은 조선시대에도 고성포가 있었고,14) 수구(水口)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남강 하구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박제상은 봉수항 일대에서 출항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박제상은 율포(栗浦)에서 배편으로 왜에 가서 미해를 탈출시키고, 왕은 굴헐역(屈歇驛)에서 맞이하였다. 율포와 굴헐역은 모두 울산 일대의 지명으로 생각되는데,15) 울산만은 동해안의 가장 좋은 포구이자 일본과 연결하기 쉬운 입지였다. 게다가 울산만은 신라 왕경 경주에서 육로로 이동하기 편리한 입지였으므로, 이곳을 경주의 외항, 국제항으로 보려는 견해는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다.16) 실제로 태화강 하구에서 해안 목책유구인 울산 반구동 유적이 확인되기도 하였다.17)
한국 고대의 사료 환경에서는 특정 해안의 활용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을 찾기 어렵다. 그마저도 황해, 남해는 각각 중국, 일본과의 관계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기록이 많은 듯하지만, 동해 연안의 경우에는 더욱 찾기 어려운 느낌이 있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박제상, 부례랑 관련 설화는 동해 연안에서 신라인의 해양 활동을 다소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희귀한 사례이다. 물론, 설화라는 점에서 다양한 사료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동해안의 풍향과 같은 해양 환경과 연결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신라인들은 왜의 침입에 오랫동안 대응하면서 동해라는 바다에 점차 도전하였고, 우산국을 정복하였으며, 더 나아가 동해 연안의 해양 환경과 일부 좋은 포구들을 활용하여 나갔다. 이러한 신라인의 경험은 가야의 정복과 남해로의 진출, 한강유역 차지와 황해로의 진출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5. 나가며
이번 연재에서는 동해의 해양 환경을 살펴보고, 삼국시대 신라가 어떻게 동해에 도전하였는지 살펴보았다. 분량 관계로 인하여 모두 다루지 못하였지만, 신라의 탈해신화에서도 외부에서 바다를 건너온 탈해가 경주 동쪽의 동해안 하서지촌 아진포에 도착하였다고 전하고,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에서도 신라인이 동해를 건너 일본에 도달하는 이야기가 엿보이며, 황룡사 장육존상 설화에서도 아육왕이 보낸 막대한 황철과 황금을 실은 배가 동해안인 하곡현 사포에 정박하였다고 전한다. 신라인의 해양 활동은 가장 먼저, 가까운 바다인 동해 연안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동해의 해양 환경은 황해, 남해와 사뭇 다르고, 좋은 항구의 입지조건을 갖춘 지역도 희소한 편이다. 하지만 왜의 침입, 우산국 정벌, 박제상의 활동 등의 기록을 종합하여 볼 때, 신라는 동해의 독특한 환경과 크고 작은 포구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동해라는 바다에 꾸준히 도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다라는 구조는 여느 자연환경과 마찬가지로 장기간 변함없이 지속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이에 도전하는 인간의 활동은 단기간에 아무런 준비 없이 성공하기 어렵다. 지역의 해양 환경을 잘 이해하는 세력과 이들을 묶어서 활용하는 국가적인 능력이 오랜 시간 동안 쌓여야, 바다에 대한 도전이 성공하게 된다.
신라는 가야 정벌 과정에서 남해로 본격적인 진출을 꾀하였고, 한강 유역 진출과 7세기 동아시아 국제전 과정에서 황해로 본격적인 진출을 꾀하였다. 일반적으로 신라 중대, 하대의 ‘성공’은 황해라는 바다에 도전한 결과로 이해된다. 이를 통하여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서, 이른바 ‘삼국통일’에 도달하였다는 것이 교과서적인 이해이다. 하지만 신라가 남해, 황해에 도전하였던 원동력은 단기간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신라는 건국 직후부터 가장 가까운 동해의 해양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도전은 왜의 침입과 같은 외부적 자극이나, 영동 지역으로의 진출과 같은 내부적 필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신라가 동해라는 바다에 도전한 것은 수백 년에 걸치는 과정이었다. 신라의 도전은 왜의 침입을 격퇴하고, 우산국을 정벌하는 한편, 고구려나 왜와의 관계에서 국익을 지키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장기간 축적된 신라의 경험은 남해와 황해라는 새로운 바다에 직면하였을 때,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신라의 대중적인 이미지는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영남 지역의 내륙 국가처럼 소비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신라는 건국 직후부터 동해라는 바다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면서 다양한 해양 경험을 축적하였다. 신라는 동해에서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연안 방어 능력을 훈련하였고, 동해 연안을 따라 혹은 울릉도까지 오가면서 항해와 포구 활용 경험을 축적하였다. 해양력의 축적이 장기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신라가 남해와 황해로 점차 진출하여 중대와 하대의 성공을 거두었던 기반에는 동해라는 바다에 도전하였던 역사가 있었다.
----------
미주
1) 신라사의 전개 과정과 동해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사 정리는 다음이 참고되며(임동민, 2022 「신라의 동해 연안 바닷길과 항구」 『한국사학보』 89, 166~168쪽), 대표적인 연구 성과는 아래와 같다(권덕영, 1999 「삼국시대 신라의 해양진출과 국가발전」 『STRATEGY21』 2권 2호 ; 김호동, 2001 「삼국시대 신라의 동해안 제해권 확보의 의미」 『대구사학』 65 ; 전덕재, 2013 「상고기 신라의 동해안지역 경영」 『역사문화연구』 45 ; 홍영호, 2016 『新羅의 何瑟羅 經營 硏究』, 景仁文化社 ; 김창겸, 2018 『신라와 바다』, 문현 등).
2) 2~4장의 내용은 다음의 두 논문을 대폭 수정, 요약한 것임을 밝힌다(임동민, 2009 「신라 상대(上代) 국가발전과정의 해양사적 고찰 : 해양력과 국력의 유기적 관계를 중심으로」 『Strategy21』 24 ; 2022 「신라의 동해 연안 바닷길과 항구」 『한국사학보』 89).
3) 동해의 해양환경과 연안지리에 대한 서술은 다음의 자료를 크게 참고하여 요약한 것이다(유흥식, 2012 「제2장 제4절 해양환경」 『강원도사 제1권 자연인문』, 강원도사편찬위원회, 140~174쪽).
4) 이장렬, 2012 「제2장 제5절 강원도의 기후환경과 자연재해」 『강원도사 제1권 자연인문』, 강원도사편찬위원회, 199~201쪽
5) 『世宗實錄』 권150, 지리지 경상도 ; 권153, 지리지 강원도
6) 홍영호 2013 앞의 논문, 151~158쪽
7) 水路部, 1933 『朝鮮沿岸水路誌 第1卷 朝鮮東岸 及 南岸』, 東京:水路部
8) 孫元一, 1952 「序論」 『韓國沿岸水路誌』, 海軍本部水路官室
9) 海軍本部水路官室, 1952 『韓國沿岸水路誌』, 海軍本部水路官室, 49~139쪽
10) 『三國遺事』 권1, 紀異1 奈勿王 金堤上
11) 기상청, 1991~2020 『한국기후도』, 114쪽, 124쪽 지도 참조.
12) 이장렬, 2012 앞의 글, 199~201쪽
13) 海軍本部水路官室, 1952 앞의 책
14) 『大東輿地圖』 高城郡
15) 『三國史記』 권34, 地理志1 臨關郡
16) 이용범, 1969 「處容說話의 一考察-唐代 이슬람 商人과 新羅」 『震檀學報』 32 ; 최근식, 2005 『신라해양사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153~156쪽 등.
17)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 2009 『울산 반구동유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