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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냉전시대 경계인의 고군분투기, 조명훈 평전 ⑥_예대열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8.02 BoardLang.text_hits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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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7월(통권 65호)

[기획연재] 
 
 

냉전시대 경계인의 고군분투기, 조명훈 평전 ⑥

 


예대열(현대사분과)

 
 
조명훈이 식민지 소년에서 해방 조국의 청년으로 거듭나게 된 데는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동안 ‘인민 숙제(방학 숙제)’를 하면서 쌓은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1945년 12월 23일부터 31일까지 겨울방학 숙제를 위해 순천군청을 비롯한 주요 관공서와 사회단체를 두루 돌아다니며 일종의 ‘필드 워크’를 진행했다. 그는 각 기관을 일일이 방문하여 조사한 후 60여 쪽 분량의 『順天의 經濟狀況』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순천중학교 교사 이문규는 숙제의 수준이 중학교 1학년 학생이 했다고는 믿기지 않았는지, 그것을 평생 보관하고 있다가 2000년대 이후 조명훈의 누나 조계훈에게 인계해 세상에 빛을 보게 했다.
 
 
그림 1. 『順天의 經濟狀況』 표지
 
 
조명훈은 보고서 발간 목적을 “우리 향토 순천의 형편을 알기 위해서”라며 “편찬해 놓고 보니 매우 실천적인 숙제”였다고 자평했다. 그는 보고서에 순천의 ① 인구(호수, 성비, 가족 수, 농가 호수, 가축 수 등), ② 문화 정도(면별 학교 수, 학생 수, 학급 수, 교사 수, 학교당 학생 수, 학급당 학생 수, 교사당 학생 수 등), ③ 경작지(면당 면적, 생산고, 생산물, 생산량, 단위 생산량, 소 마리당 경지 능력 등), ④ 교통기관(기관명, 열차 시간, 승차권 요금, 화물열차 적재량과 물품, 우체통 위치, 전화회선 등), ⑤ 물가지수(중일전쟁, 태평양전쟁, 해방, 1945년 12월 기준 비교), ⑥ 귀환 동포(귀환 지역별 인구 및 직업), ⑦ 정당·사회단체 강령, ⑧ 금융기관 현황(예금고, 대출고, 예대율), ⑨ 각종 지도(시내 주요 기관 위치, 교통 약도) 등을 수록했다.
 
조명훈은 각종 통계 자료 옆에 조사 경위와 더불어 「비평」 코너를 만들어 자신의 생각을 적어 놓았다. 그는 조사를 진행하며 “어라야 나도 바쁘다. 얼른 가고 내일 와라”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잘 공부하여 조선 건국의 주춧돌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는 말을 들을 때는 감개무량해 했다. 그는 과제를 수행하며 특히 군청 서기 정상채(鄭相菜)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정상채는 “농업 호수를 보아라. 소작 호수가 제일로 많지 않느냐. 이것은 일본인 지주의 소작이 솔찬히 들어 있다. 그처럼 일본인은 우리 손으로 해주어야 먹어. 자기들은 편한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나는 불덩어리 같은 것이 끌어 나온 것을 기억한다”고 말해주었다. 조명훈은 그의 말이 인상 깊었는지 보고서 「끝말」에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아아! 사회! 사회라는 것은 어떤 데인가? 나는 이번 인민 숙제로 사회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알 수가 있었다. … 이 혼잡한 사회를 일소하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화합 일치에 있다. 제국주의 시절에는 혼잡하나 어쩌나 우리나라 사회가 아니니까 관계없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우리나라 사회 아닌가? 우리나라 사회는 우리나라 힘으로, 우리 민족의 손으로, 힘으로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이 또 도리다. … 나는 이번 숙제가 없었으면 自作, 外作, 小作 호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물론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것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도 몰랐을 것은 눈앞에 보이는 사실이다.
 
 
이처럼 조명훈은 『順天의 經濟狀況』을 작성하며 점차 사회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는 해방기 혼란을 일소하기 위해선 “우리 민족의 화합 일치”가 필요하다며, “우리나라 힘으로, 우리 민족의 손으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의 눈에 비친 해방 직후 순천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명훈은 보고서 제목에서 보듯 우선 경제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순천군 인구 분포를 조사하며 순천읍의 농가 호수 비율이 관내 면 지역에 비해 현저히 적은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군의 중심이 아무리 읍이라고 해도 순천읍의 농가 호수가 20%밖에 되지 않은 반면, 해룡면·주암면·낙안면 등에서는 80~90%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주·소작 관계나 자작지·소작지 비율 등을 따질 만큼 아직 사회과학적 사고에 익숙하지는 않았다. 다만 읍과 면의 농가 호수 차이에 대해 “이래서는 절대로 안 된다. 우리 삼천만 동포는 모두 같이 일을 해야 된다”는 「비평」을 적어 두었다.
 
조명훈이 “삼천만 동포는 모두 같이 일을 해야 된다”며 일종의 ‘개로사상(皆勞思想)’ 혹은 평등적 지향을 드러낸 데는 해방 조국 건설을 위해 모두가 나서야 한다는 당위 외에도 가난에서 오는 민감함도 한몫했다. 그는 순천중 교장이 타교와 달리 기부금 없이 실력만으로 학생을 선발한 것을 두고 “영단(英斷)”이라고 찬동했고, 가난으로 인해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친구 최규옥을 향해선 애석한 마음을 드러냈다. 또한 둘째 형 조정훈(趙政勳)이 고려대 1차 시험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이 없어 2차 시험을 보지 못하자 일기장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貧寒의 그 天才
 
社會가 저러하니 行事도 이렇구나
貧寒의 그 天才 무엇이 될 쏘이냐
富貴만이 成功하는 社會이로다.
 
 
이 시에서 말하는 ‘천재’가 형 정훈을 말하는 것인지 조명훈 자신을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다만 그 대상은 해방이 되었음에도 변하지 않는 사회적 구조로 인해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많은 가난한 사람을 상징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위의 시를 써놓고 그 밑에 “‘富貴만이 成功하는’의 대목을 ‘富貴만이 工夫하는’이라고도 해봤다가 결국 이렇게 하다”라고 부연 설명을 달아 놓았다. 공부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을 넘어 결국 돈이 성공을 좌우한다는 통찰 혹은 체념이었다. 그의 이런 예민함은 학년이 올라 교내 좌익 써클에서 사회과학 학습을 받으며 운동가로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조명훈의 예리한 시각은 보고서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선 그는 해방 당시 경제 문제의 핵심을 물가의 등귀와 물품의 부족 두 가지로 봤다. 그는 쌀에서부터 면포에 이르기까지 16종의 식료품과 생필품을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해방, 현재(1945년 12월) 등으로 시기 구분해 각각의 물가지수를 정리했다. 그는 물가가 시시각각 오르는 것에 반해 물품이 나날이 귀해지는 상황을 “무정부 상태”라고 표현하며, 그 원인을 “일본인의 40억 엔 경제 교란” 때문이라고 적었다. 실제 조선총독부는 패망 직후 금융기관을 장악하여 조선은행권을 남발하며 일본인의 예금 인출과 대출 용도로 사용했다. 화폐 증발은 미군정 하에서도 지속되어 인플레이션의 격화와 그에 따른 살인적 물가고를 일으켰다.
 
그렇지만 조명훈은 경제 혼란을 일제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았다. 그는 물품 부족의 원인이 사리사욕만 취하는 “악덕 상인”들 때문이라며, “날로 물가가 오르니까 사재기했다가 고가로 판다”며 비판했다. 실제로 당시 상인들은 투자위험이 적고 자본 회수가 빠른 업종에 종사하며 식량과 생필품을 매점매석하면서 폭리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상인들을 비판하면서도 “삼천만 동포들 사이에 상인이 있다”며,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 “우리 중학생의 책임은 무겁다”고 했다.
 
조명훈이 상인들을 비판하면서도 계몽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직 학생으로서 순수한 면도 있었겠으나, 기본적으로 교육 문제를 신국가 건설의 중요 과제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순천군 내 각 면의 학교 통계를 정리하면서 단순히 학교, 학급, 교사, 학생 수만 조사한 것이 아니라, 학교당 학생 수, 학급당 학생 수, 교사당 학생 수를 일일이 계산했다. 그리고 6세~12세 미만의 아이들 중 미취학자 통계를 조사해 그들도 “평등하게 입학”시키려면 현재 순천군에만 16개 학교, 112개 학급, 121명의 교사가 더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아울러 그는 조선의 문화 발달을 위해선 “의무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생각도 제시했다.
 
한편 조명훈은 해방 직후 순천에 생겨난 정당과 사회단체들을 일일이 방문하여 강령과 규약을 수집했다. 그가 조사한 정당과 사회단체는 공산당, 민주당, 애국당, 인민당, 인민위원회, 노동조합, 농민위원회, 노동청년동맹, 청년추진동맹, 프로예술동맹, 학도대, 소년군 등 총 12개였다. 현재 이 정당과 사회단체의 강령은 해방 공간 순천 지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는 12개 정당·사회단체 강령을 분석해 이념과 지향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① 민주당=청년추진동맹 →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지
② 인민위원회=농민위원회=공산당=학도대=노동조합=노농청년동맹=인민당 → 인민공화국 지지
③ 애국당-소년군-프로예술동맹 → 각자 독특
 
조명훈은 아직 중학교 1학년이었던 만큼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이념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각당 각파로 분열되어 있는 모습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그가 바라본 해방 당시 정치 인식은 사뭇 날카로웠다.
 
 
각 당파를 돌아봐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인상은 단 한 곳도 튼튼한 당파는 없었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단원도 흐지부지하고 “강령이 있다냐” 하고 그때 서야 힘들게 찾아서 준 데도 있었다. … 신탁 관리까지 나왔는데 12단체는 그대로 있다. 최후 목적이 같은 단체는 전부 통합하면 오죽 좋을까. … 내가 각 단체를 조사해 볼 때 간판들은 크지만, 속은 사무실 한 칸인데도 많이 있었다. 이렇게 전부 세계에 조선은 당파가 많이 있다고만 알려주는 것과 같다. 또 강령이 좋지 않은 데는 한 곳도 없다. 그러나 실제 그 행위는 강령과 적합할까?
 
 
그렇지만 조명훈은 예의 학생답게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기보다는 자신의 본분인 공부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그는 정당・사회단체에 대한 평가 말미에 “그런다고 우리는 임시정부 지지도 아니요, 또 인민공화국 지지도 아니다. 우리 학생은 참으로 공부 하나다. 정치 방면에는 아무 접촉도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적어도 그는 1945년 겨울방학 숙제를 하던 시점까지는 좌우 어느 편에 서지 않았다. 단지 그는 학생으로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생각뿐이었다. 그가 보고서 「결론」을 다음과 같은 영어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Whatever talent a man may possess is of no use to him unless that talent is the servant of his character. Men who would succeed must be abreast of the times.
(재능을 가졌는가 안 가졌는가 하는 것은 그의 재능이 성격에 맞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다.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아야만 한다.)
 
한편 조명훈이 1945년 겨울방학 숙제를 위해 발품을 팔러 돌아다니는 동안 비슷한 내용을 조사한 일군의 또 다른 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해방 공간 순천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조명훈의 생각과 비슷했을까? 아니면 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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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趙明勳, 1946, 『順天의 經濟狀況』.
조명훈, 『Mind』 13, 1946년 7월 10일 ~ 1947년 3월 13일
 
정태헌, 1999 「미군정 초기 각 금융기관의 부실채권과 預·貸 추이」 『韓國史學報』 6
이홍기, 2007 『해방직후 순천중학교 1학년이 쓴 순천의 경제상황』, 순천시민의신문
김점숙, 2012 「미군정기 국내산 생필품 통제 정책」 『사학연구』 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