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역사랑' 2025년 6월(통권 64호)
[기획연재]
박수진(고대사분과, 성북문화원)
1. 조선시대, 성북동의 기원과 형성
'마을에서 역사하기'를 하면서 시작한 것 중 하나는 한 동의 역사를 써보는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짧지만 성북동의 역사를 써 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2016년 실시된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사업'이다. 당시 성북구청에는 '성북동역사문화팀'이라는 별도의 팀이 있었고, 성북문화원은 이 팀과 함께 '주민참여예산제도'를 이용해 사업비를 만들었다. 그리고 역사, 문학, 고고학, 콘텐츠, 미술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참여해서 성북동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조사사업에서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기존에 산재한 자료들을 하나로 정리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더 큰 의미를 갖는다. 당시 사업의 목적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업을 통해 성북동의 역사와 인물들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은 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성북동. 성[城]의 북쪽[北]에 있는 동네[洞]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90년대 드라마에는 주로 부촌(富村)으로 등장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는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로 알려져 있는 동네다. 성북동에 있는 역사문화자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한양도성과 선잠단지이다. 한양도성은 태조-세종 연간에 조성되었고, 선잠단지는 태종 연간에 설치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북교(北郊)나 사아리 등으로 불렸을 뿐 성북동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다. 성북동이 처음 등장한 것은 1766년(영조42) 어영청의 북둔이 현재의 성북동 지역에 설치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둔전을 설치하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계(契)를 조직해 마전하는 일[曝白]과 메주를 쑤는 일[燻造]을 주고 이에 대한 노임을 지급한 것이다. 이것을 문서로 만든 것이 「성북동포백훈조계완문절목」이다. 이때 성북동이라는 이름이 문서상에 처음 등장한다.
이후 성북동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더 많은 수입을 올리기 위해 과실수를 심는다. 이때 가장 많이 심은 나무가 복숭아나무이고, 곧 성북동의 복사꽃[桃花]은 도성 안에서 봄의 볼거리 중 하나로 유명해진다. 18~19세기 서울에서는 사대부나 중인의 심미 취향이 확산되고 일반 서민들까지도 여가를 즐기는 풍조가 확대되는데, 그중 하나가 성북동에 복사꽃이었다. 성북둔에 복사꽃이 있어서 이를 북둔도화(北屯桃花)라 불렀다. 채제공, 이덕무, 유득공, 김조순, 김정희, 이건창 등 많은 문인들이 이에 대한 글을 남겼다. 계곡도 좋고 도성과 가까우니 자연스럽게 양반들의 별장도 생겨났는데, 황수연과 의친왕의 성북동 별서, 이종석 별장, 민영환의 음벽정, 유득공의 북둔초당, 김병시, 윤용선 등의 별장도 이때 성북동에 자리했다. 성북동은 이렇게 조선 후기의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공간에서 출발하여, 일제강점기에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2. 일제강점기, 자치운동과 독립운동
일제강점기에는 도시화가 진행되며 점차 사람이 몰렸다. 사대문 안에 살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용운, 이태준과 같이 번듯한 집을 짓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태준 소설 속 ‘황수건’처럼 천변 국유지에 불법으로 토막을 짓고 사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자 결국 일제는 경성을 넓히기로 계획한다. 이른바 ‘대경성계획’이다(1937년). 이 계획에 따르면 지금의 삼선동, 동선동, 안암동, 보문동, 성북동, 돈암동 일부는 모두 ‘돈암지구’로 묶였으며 주택지로 개발이 될 터였다. 다른 지역도 개발 계획이 있었지만, 시행된 것은 공업지구로 선정된 영등포 쪽과 돈암지구뿐이었다.

성북동은 일찍부터 자치활동도 활발했다. 성북구락부는 1923년 창립하여 1925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마을 공용 소방구나 도난당한 상비상여(常備喪輿)를 구입하기도 하고, 재정 위기에 처한 삼산학교(현 성북초등학교) 유지를 위한 자금 모집하기도 했다. 1927년에는 성북야학을 설치하여 돈이 없어서 학교에 못 가는 무산 어린이들을 교육하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성북정회(城北町會) 활동이 활발히 이어졌는데 삼산학교 지원, 성북유치원과 영명학교 설립 등의 교육활동과 더불어, 신규요정철폐, 수도부설 진정, 버스 운행시간 연장 등 일상 관련 민원도 활발하게 재기했다. 이 운동의 핵심인물 중 한 명인 메이지대학 출신 인텔리 이신구李信龜는 1939년에는 경성부회 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한다.
성북동에는 독립운동가도 많이 살았다. 경성제국대학, 중앙승가대학, 보성전문학교 등이 모두 성북동 주변으로 위치했다. 일본인들도 많이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성북동에 살았다. 물론 해방 이후에 성북동에 살기 시작한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만큼 이들의 활동은 3.1운동, 의병운동, 임시정부 및 광복군활동, 조선공산당, 사회주의 학생운동 계열 등으로 다양했다. 정태식, 유진희, 김복진, 이근창, 이종린, 서광훈, 현학손 등이 대표적이다. 자치와 저항의 역사는 성북동이라는 마을이 단순한 주거지가 아닌 공동체의 힘을 간직한 공간임을 보여준다.
*성북동의 독립운동가 발굴 성과는 이후 성북구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용역으로 이어졌고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19명의 독립포상을 신청하여 8명이 건국포상을 받는 결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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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술인 커뮤니티의 형성
예술인들도 성북동 지역으로 몰렸다. 비교적 값이 싸며 교통이 편리하면서도 일본인들이 덜 거주하는 사대문 밖 성북동은 매력적인 장소였다. 성북동은 세검정과 더불어 1933년부터 이미 ‘문인촌’으로 불렸다. 이태준, 김일엽, 홍효민, 김기진, 이종린 등이 당시 성북동에 거주했다. 문인뿐만이 아니었다. 작곡가 채동선은 1931년부터 성북동 183-17번지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전형필은 1933년부터 성북동에 땅을 구입하여 북단장을 짓고, 1938년에는 보화각을 세운다. 김용준, 김환기, 김복진 등의 미술가도 1930년대와 40년대 성북동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러니 1930년대 중반 이후의 성북동은 문인촌보다는 ‘예술인촌’에 가까웠다.
성북동은 '예술인촌'이니 만큼 커뮤니티 공간이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1939년 발간이 시작된 잡지 『문장』이다. 발행인 김연만, 운영을 맡은 이태준과 정지용, 장정을 맡은 김용준이 모두 성북동(혹은 성북구)에 거주한 인물들이었다. 『문장』은 1941년까지 3년간 통권 26호가 발간되었는데, 이광수, 김동인, 이효석, 박태원, 김영랑, 김유정, 나도향, 김기림, 김광균, 안회남, 유진오, 이기영, 임화, 김남천, 이육사 등 좌우파를 막론한 당대 최고의 소설가와 시인의 작품은 물론 이병기, 이희승, 양주동, 조윤제, 손진태, 최현배, 송석하 등 고전, 한글, 민속학, 어문학 등 한국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학술 연구 논문 등 소설 182편, 국문학 35편, 시 172편, 시조 25편, 평론·학예 129편, 수필 187편, 기타 172편이 이 잡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뿐만 아니라 ‘김용준을 책임자로 하여 길진섭, 김환기, 정현웅, 구본웅, 이상범 등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표지디자인과 속지 삽화, 그림 등에 참여하였다.
성북동에서 이들의 교류가 단적으로 보이는 것은 「승설암도」이다. 이 그림은 1946년 4월 5일(청명)에 집주인 배정국을 비롯하여 소설가 이태준, 서양화가 김환기, 서예가 손재형, 동양화가 조중현, 치과의사 함석태 등 성북동을 중심으로 교류했던 소설가, 화가, 서예가 등이 이곳에 모여 교류했음을 보여준다.
그림 2. 손재형이 그린 「승설암도」
예술인들은 단순히 교류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이태준과 같은 소설가들은 당시 성북동의 모습을 생생하게 글로 남겼다. 그의 소설 「달밤」을 보면 성북동에 있던 포도밭과 삼산학교의 모습 등이 생생히 묘사되며, 「손거부」에는 토막민들의 거주 모습과 채석장에서의 삶이 잘 담겨 있다. 해방 이후의 일이지만 김동리의 「혈거부족」에는 전쟁 직후의 비참한 삶이, 김내성의 『쌍무지개 뜨는 언덕』에서는 성북동과 돈암동에서의 삶이 비교되며 펼쳐진다. 이 소설들은 당대 사람들의 성북동에 대한 인식까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해방 이후 성북동은 변화를 겪는다. 한국전쟁 이후 재건을 거친 성북동은 60~70년대 부촌/대사관저 촌이 형성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심우장과 간송미술관 재발견되며 또 한 번 변화를 겪는다. 하지만 해방 이후 성북동에서 주목되는 것은 미술인들의 활동이었다. 김환기, 서세옥, 변관식, 장우성, 임송희, 송영방, 김기창, 박래현, 변종하, 윤중식 등의 화가들은 성북동에서 작품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활발하게 교류했다. 특히 서세옥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동양화과 출신 송영방, 임송희, 신영상 등은 성북에서 살며 그림을 그리는 맑고 개성있는 화가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의 ‘성북의 청괴靑怪’라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지금까지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성북동의 역사를 간단히 서술했다. 이 짧은 글에서 성북동의 모든 역사를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성북동의 역사를 통해 조선의 건국(한양도성), 제도의 정비(선잠단지), 일제강점기의 도시화(문인들의 소설과 대경성계획)와 독립운동, 해방 이후 경제발전(부촌의 성립) 등 한국사의 면면을 볼 수 있다. 마을의 역사는 그 자체로도 완결될 수 있지만 거시사로 연결된다. 이런 의미에서 마을의 역사가 복원 될 때 한국사 전체의 역사도 더욱 다채롭고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마을에서 역사하기의 가능성은 이런 부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규태 외, 2016 『성북동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성북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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