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용역에서 내가 맡았던 역할은 국사당보의 역사적 사실을 찾는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후기부터 시작하여 국사당보의 기능이 끝날 때까지의 자료만 시간순으로 나열하는 방식으로 글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국사당보는 단순히 조선후기에 매우 많이 존재한 일반적인 수리시설인 다른 보(洑)와는 조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보의 존재가 수백년에 걸쳐 있었으며 보의 수명이 다한 뒤에는 예당저수지로 그 기능이 이전되었다. 즉 국사당보는 예당저수지의 전사(前史)였던 셈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보가 좁은 영역의 전답에 영향을 준 반면, 국사당보는 한 개 군현을 넘어서는 지역민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국사당보는 충분히 연구논문의 주제로 가치가 있었다. 여기에 국사당보는 예산지역에서 전해지는 노씨부인 설화와 연결되면서 지역민들의 전승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연구논문을 작성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논문이 『역사와 담론』 92집(2019)에 실린 “조선후기 예산현 국사당보 설화의 전승과 역사적 사실”이라는 논문이다.
예산군에 전해지는 노씨부인 설화는 세 곳에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예산향교지』, 『예산의 설화』, 『예산군지』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약간의 사실에 대한 출입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내용의 구성은 대동소이하다. 설화의 출처에 대해서는 『예산향교지』에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김만진의 9세손이 증언했다고 표기했다. 아래는 설화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약 200년 전인 정조 2년(1794) 봄 예산현 오가면 오촌리의 광산 김씨 댁에서 경사가 났다. 장남 김만진이 장가를 들었다. 그의 부인은 광주 노씨로 첫날밤 꿈을 꾸었다. 꿈에 신선이 나타나 눈이 온 자리에 따라 수로를 내면 마을이 흥할 것이라고 했다. 신랑을 깨우고 서리 자국을 따라 말을 타고 달려가 보니 국사봉 아래 무한천변에 도달했다고 한다. 이에 김만진은 마을 회의를 열고 보를 막고 수로를 내었다. 노씨 부인은 매일 점심과 술을 날랐다. 이리하여 국사당보를 완성하고 십리가 넘는 수로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어느날 국사봉 아래 신장리 마을 사람과 수로 문제가 생겼다. 이 일대를 지나던 암행어사가 이것을 해결해주고 지역 농민에게 보를 돌려주었다. 그래서 오가면에서는 관에서 내려준 보라 하여 국사당보(國賜塘洑)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신랑 김만진은 열심히 공부하여 대과에 급제하여 공조참판에 이르고, 노씨 부인은 82세로 장수했다고 한다. 그의 5대손 김준서도 관직을 역임하여 나라에 봉사했다. 그래서 지역 사람들이 국사봉 아래 사당을 짓고 노씨 부인의 공적을 추모했다.'
그 당시 설화를 활용한 역사 논문은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몰라, 민속학의 연구 성과를 활용해 보기로 하였다. 임재해 선생님의 ‘설화의 사료적 성격과 새 역사학으로서 설화 연구’를 읽어보면서 대체적인 내용은 이해하게 되었지만, 직접 설화를 통해 역사학을 연구하는 것은 사실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설화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는 이상, 역사 연구자가 설화를 이용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가능성에 대해서만 인정한 채 내 방식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연구자의 숙명은 어쩔 수 없어서, 설화의 내용이 역사적 근거에 바탕을 둔 것인지부터 연구를 시작했다. 노씨 부인 설화를 살펴본 뒤 설화의 내용을 몇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었다. 우선 등장 인물이 실제 인물인지부터 확인했다. 설화에는 노씨 부인, 부인의 남편인 김만진, 암행어사, 김준서가 등장한다. 노씨 부인과 김만진, 김준서는 모두 광산 김씨 문중에서 간행한 『광양김씨양간공파보』에 등장한다. 김만진과 노씨 부인은 부부이며, 김준서는 김만진의 후손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에 나는 광주 노씨 족보에서 노씨 부인과 김만진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안타깝게 그 이름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암행어사는 사실 현지 조사를 통해 홍철주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실존 인물에 기반을 둔 것이다.
등장 인물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역사적 사실들은 모두 시공간이 착종(錯綜)되어 있다. 쉬운 말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적 사실들의 뒤섞여 있는 것이다. 우선 설화의 내용을 읽어보고 눈치를 챘을 수 있다. ‘약 200년 전인 정조 2년(1794) 봄’이라는 표현은 사실과 다르다. 정조 2년은 1778년이며, 1794년은 정조 18년이다. 서로 다른 연도인데 같은 것처럼 표현했다. 이러한 표현은 단지 정조 연간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만을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즉 설화의 무대가 정조대라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 등장 인물들은 정조대에 살지 않았다. 김만진은 족보에 따르면 1661년(현종 2)에 태어나 1743년(영조 19)에 사망하여 82년을 살았다. 그러므로 정조대 이전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노씨 부인도 현종~영조대를 살았을 것이다. 여기서 눈치를 챘을지 모르는데 설화에서 노씨 부인이 82세로 장수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실제로 82세를 살았던 인물은 김만진이었다. 노씨 부인은 생몰년을 알 수 없다.
암행어사도 마찬가지이다. 보와 수로를 둘러싸고 신장리 마을 사람들과의 분쟁이 벌어지자 우연히 이 지역을 지나던 암행어사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였다. 그 암행어사는 앞서 설명했듯이 홍철주였다. 홍철주가 암행어사로 충청도에 파견된 것은 1867년(고종 4)이었다.
등장인물이 각각 영조대와 고종대 살았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왜 설화의 시대적 배경을 정조대로 했을까. 그것은 바로 국사(國賜), 나라가 내려준 보라는 이미지가 지역민에게 강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고종 연간 암행어사 홍철주를 통해 정조가 특별하게 지역민에게 내려준 보를 다시 재확인시켜주었다는 것을 우리는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앞에서 확인한 『승정원일기』에 보이는 궁방과의 갈등 속에서 정조가 지역민들이 보의 소유권을 확인시켜준 사실은 망각해 버린 채, 고종대 와서 암행어사를 통해 재확인된 정조의 보 하사를 기억으로 전승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설화에는 특별하게 암행어사가 수록된 것이고, 홍철주의 선정비가 세워지게 된 배경으로 자리 잡았다고 판단된다.
물론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내용도 다수 확인된다. 김만진의 대과 급제 사실은 방목에서 확인할 수 없다. 김만진이 공조참판에 이르렀다는 이력도 연대기에 없다. 다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된 기록이 확인되는데, 지역 사회의 진휼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김만진의 후손으로 등장하는 김준서를 사실 설화의 맥락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다. 아마도 가문의 후손 중에 출세한 인물로서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가 역임했다는 관직도 설화와 연대기 자료가 서로 다르다.
지역에 전승되는 설화는 시공간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지역사회의 기초 자료라는 점을 노씨 부인 설화의 분석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설화는 일정 부분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지역에 전승되는 설화는 그러한 지역사 연구를 위한 바탕이 되어 줄 수 있다. 이러한 설화는 매우 많이 존재하며, 아직도 연구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노씨 부인 설화는 수많은 설화 중 하나가 아니라, 예산 지역민의 삶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 예당저수지의 전사이면서도 그들의 살아 있는 역사로 지금도 남아 있다고 본다.
우연히 시작된 지역 연구 과제는 나로 하여금 새로운 소재를 통해 그 동안 잊혀진 지역사를 복원하도록 도와주었다. 지역 연구 과제가 아니었으면 나 또한 국사당보라는 주제가 예산 지역사의 관점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지역사 연구에서 지자체의 연구 과제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 주고, 지역사 연구의 새로운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산문화원에서 나의 논문을 보고 예산학 강좌 중 한 주제로 강연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으나 사정이 있어서 응하지 못했다. 다음에는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더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매우 후회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