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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북한 인물열전 시리즈 ②_예대열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7.03 BoardLang.text_hits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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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6월(통권 64호)

[기획연재] 
 
 

북한 인물열전 시리즈 ②:

후계자 김정일 탄생의 프리퀄
- 청년 김정일의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논문에 담긴 북한 사회 -
 


예대열(현대사분과)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선언했다. 역사학에서 다루는 어느 시대와 주제가 그러지 않겠냐마는, 북한사 연구는 현실 문제와의 긴장성을 특히 놓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 앞에 북한사 연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평화 공존의 출발은 상호 인정에 있는 만큼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비록 맹아라 할지라도 역사적 경험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 싹틔우는 작업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김정일과 그의 집권 시기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사실 김정일은 김일성처럼 항일운동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 후광에 힘입어 후계자 자리에 오른 이미지가 강해 연구 대상으로서 매력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시대 대미 전략은 핵무기를 개발해 미국의 시선을 끌어 핵과 체제 보장을 맞교환하는 방식이었고, 대남 정책 또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건설에서 보듯 ‘우리민족끼리’를 강조하는 형태였다. 결과적으로 김정일 시대는 그나마 그때가 호시절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 다시금 반추할 필요가 있다.
 
물론 지도자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 방식은 얽히고설킨 다양한 인간사를 다루는 역사학에서 자칫 결정론의 위험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또한 북한 최고 권력자에 대한 주목은 반북 정서가 팽배한 사회적 분위기하에서 의도와 다르게 그 체제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계엄 사태에서 보듯 체제를 떠나 어느 사회건 지도자의 자질과 능력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삶과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특히나 최고 권력자의 위상과 역할이 절대적인 북한에 대해서라면 지도자의 생각과 고민을 읽어내는 것은 중요하다.
 
후계자 김정일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그간의 연구들은 김정일의 후계자 성장 과정을 주로 조선로동당 내의 활동을 통해 설명해 왔다. 그는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중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사업하면서 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이때부터 그는 항일 빨치산들의 배려로 주요 부처에서 정치 수업을 받고 아버지 김일성을 따라 현지 지도를 수행하면서 통치 방식을 익혀나갔다.
 
특히 김정일은 1967년 김일성 유일체제 수립의 계기가 된 갑산파 숙청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사건의 여세를 몰아 주체사상 체계를 확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후계자로 등장할 가능성을 높였다. 또한 1969년 당의 핵심 부서인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맡으면서 영화와 예술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의 지도하에 ‘피바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 ‘꽃파는 처녀’ 등 항일운동을 묘사한 작품들이 영화로 만들어지고 가극으로 꾸며졌다.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는 과정은 아버지의 후광과 빨치산 출신들의 배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정일이 자신이 맡았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성과를 낸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삼촌 김영주가 1960년대 후반까지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경쟁 상대였다는 점에서 김일성의 아들이라는 위치가 반드시 다음 정권을 보장받는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김정일 또한 후계자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선 실력을 갖추고 능력을 발휘해 아버지와 항일 빨치산 출신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런 점에서 김정일이 1964년 김일성대학 경제학과 졸업 논문으로 발표한 『사회주의 건설에서 郡의 위치와 역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정일 입장에서 보면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후계자로서 위치가 정해지지 않았던 만큼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논문이란 대개 그렇듯 연구 대상으로 삼는 시대나 주제 중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장 핵심적인 소재를 다루기 마련이다.
 
김정일 또한 후계자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선 당시 아버지가 가장 고민하고 있던 문제나 북한 체제 건설 과정에서 핵심적 문제를 논문 주제로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김정일이 논문 주제로 군(郡) 문제를 들고 왔을 때, 지도교수는 그 주제가 대학 졸업 논문으로 쓰기에는 너무 방대하니 사회주의 경제법칙의 내용과 정당성에 관해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일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명과 건설을 해나가는 옳은 방도가 무엇인가를 찾는 것인데, 대학의 강의는 추상적인 일반론이 많고 이런 면을 밝히는 것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군 문제로 졸업 논문을 쓰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고 한다.
 
 
군(郡)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내가 의도하는 것은 수령님께서 창성련석회의에서 하신 연설의 혁명적 본질을 밝히고 그 이론 실천적 의의를 논증하자는 것입니다. … 나는 군에 대한 문제를 취급하면서 창성련석회의 연설의 혁명적 본질을 밝혀내며 군을 농촌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전략적 위치에 놓고 여러모로 분석해 보려고 합니다.
 
 
김정일이 말하는 ‘창성련석회의’란 1962년 7~8월 평안북도 창성(昌城)에서 개최된 지방당 및 경제 일꾼들이 참석한 대회를 말한다. 김일성은 당시 이 대회에 참석한 이후 1964년 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우리나라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를 발표하였다. 이 테제의 요지는 농촌과 도시의 문화 경제적 차이, 노동자와 농민의 계급적 차이를 줄이기 위해서는 중간 연결 지점인 군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정일은 이 점에 착안하여 졸업 논문 서문에 자신의 연구 목적을 밝히고 다음과 같이 목차를 구성하였다.
 
 
수령님께서는 「우리나라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에서 군(郡)의 역할을 높이는 것을 농촌 문제를 종국적으로 해결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다그쳐 나가는 데서 전략적 의의를 가지는 중요한 문제로 제시하였다. … 군의 역할을 높여 도시와 농촌의 차이, 로동계급과 농민의 계급적 차이를 없애는 것은 사회주의 제도가 선 다음 로동계급의 당과 국가가 튼튼히 틀어쥐고 나가야 할 전략적 과업이다. 현시기 군의 역할을 높이는 데서 특별히 중요하게 나서는 문제는 지방경제 발전의 종합적 단위로서의 군, 도시와 농촌의 경제적 련계의 거점으로서의 군의 역할을 백방으로 높이는 것이다.
 
 
 
 
서문
 
1. 사회주의 건설에서 지역적 거점을 설정하여야 할 필요성
  1)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에서 지역적 거점 문제
  2) 군은 사회주의 농촌건설의 지역적 거점
 
2. 지방경제 발전의 종합적 단위로서의 군
  1) 군을 단위로 하는 지방공업의 발전
  2) 군 안의 경제부문들의 발전과 부문들 사이의 련계 강화
  3) 군경제의 종합적 발전을 통한 군들 사이의 차이의 극복
 
3. 도시와 농촌의 경제적 련계의 거점으로서의 군
  1) 도시와 농촌의 경제적 련계와 군
  2) 군을 거점으로 하는 공업과 농업의 직접적인 생산적 련계의 발전
  3) 군을 거점으로 하는 도시와 농촌의 상업적 련계의 발전 
 
 
 
그렇다면 왜 1960년대 초반 시점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은 군의 역할을 강조했을까?
 
북한의 군 역할에 대한 강조는 근대 이래 오랜 지방 통치의 역사를 반영한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며 근대적 관료주의 지배를 위해 1917년 면제(面制)를 시행했다. 일제의 조선 지배 과정은 기층 촌락을 총독부 행정으로 통합시키고 그 내부를 자본에 의한 교환 과정으로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일제가 조선의 전통적인 군현제(郡縣制)를 해체하고 면제를 실시한 것은 촌락민들의 일상을 강력하게 장악하고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면은 해방이 될 때까지 군의 역할을 대체하지 못했다. 일제하 군은 잠정적 지위 속에서도 여전히 실질적 지방 통치 단위로 기능하였고, 군의 지방 내 사회적 통합성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해방이 되어서도 군은 행정적·사회적으로 상당한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지방행정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면제는 일제가 남긴 유산이기는 했지만, 근대적 통치를 위해 도입된 만큼 북한 입장에서도 권력 망이 기층의 촌락까지 미치도록 하기 위해서는 활용 가치가 있는 제도였다. 일제가 면제를 통해 촌락의 자치 기능을 포섭하려고 했던 것처럼, 북한 또한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중앙에서부터 말단 마을에 이르기까지 지배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토지개혁 등 해방 초기 인민들의 전폭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중앙의 권력이 말단의 리 이하 촌락 단위에 이르기까지 의도대로 관철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전쟁을 거치며 단적으로 드러났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피점령 상태에 놓이게 되자 체제의 수호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로동당원들조차 당증을 땅속에 파묻고 후퇴하기에 바빴고, 체제의 지지기반이었던 기본 계급들 주에서 다수의 협력자들이 나왔다.
 
김일성을 위시한 북한 지도부는 피점령 상황을 겪으며 그 후과를 극복할 대안 중 하나로 1952년 12월 지방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했다. 개편의 내용은 면을 폐지하고 기존의 행정 체계를 도, 군, 리의 3단계 형태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기존 91개의 군이 168개로 증가하였으며, 리는 10,120개에서 3,659개로 통합되었다. 당시 행정구역 개편 내용은 군의 세분화, 면의 취소, 리의 강화로 요약할 수 있다. 개편의 명분은 면제가 일제 식민 통치의 유산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질적 이유는 기존의 면제가 국가 시책이 전달되는 "중간 다리" 혹은 "정거장"에 불과해 "시간성·정확성·민활성"을 담보하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즉 북한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면을 폐지하고 군을 통해 직접 촌락과 만나는 것이 지방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식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한국전쟁은 북한에 엄청난 피해를 남겼지만, 역설적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빨리 건설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국가는 경제활동에서 개인을 비롯한 어느 주체보다 역할이 커졌고, 궁핍한 환경은 서로 돕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다. 특히 농촌은 전쟁으로 인한 파괴로 더 이상 가족 단위로 농사를 짓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는 1954년 11월 농업협동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을 결정했다. 농민들은 일부 반발을 하기도 했으나 부족한 노동력을 비롯해 농기구와 가축 등을 함께 이용하며 생존을 위해 조금씩 협동화에 동참했다.
 
농업협동화는 빠르게 진전되어 1958년 8월 완료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부터 12월 사이에 모든 협동조합을 행정 조직인 리 단위와 통합했다. 협동조합이 리 단위로 통합되자 행정체계와 경제활동이 긴밀하게 결합될 필요가 있었다. 기존 소비조합이나 신용조합이 협동조합 관할로 옮겨졌고, 교육·문화·보건 사업 등도 협동조합이 담당하게 되었다. 협동조합 관리위원장이 리 인민위원장도 겸임하게 되었다.
 
이처럼 북한은 농업협동화 이후 농업협동조합을 리 단위로 통합하였다. 농업협동조합은 개인이 소유했던 토지와 생산수단을 모두 협동조합의 소유로 이관하였고, 조합원들은 생활과 소비 모두 집단생활 속에서 함께 수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북한의 농업생산력은 협동화가 완료된 1958년을 정점으로 정체되거나 점차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농민들의 적극적 열기는 토지개혁이나 농업협동화를 추진할 때 고조되었던 것에 반해, 사회주의 건설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시점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였다.
 
북한은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 ‘계속혁명론’에 근거해 사상·기술·문화혁명을 추진해 생산력 발전을 추동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이때부터 김일성은 일련의 연설과 담화 및 출판물을 통해 군의 역할에 대해 강조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행정·생산 단위로 떠오른 협동조합(=리)을 지도하기 위해선 국가(=군)의 역할이 중요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정일이 1964년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논문으로 『사회주의건설에서 군의 위치와 역할』을 썼다. 그 주제는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당시 북한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