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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역사학 및 뉴라이트역사학 비판] 한일 사이비역사학과 임나일본부론 및 일본열도분국론_박천수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11.05 BoardLang.text_hits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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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10월(통권 68호)

[제2발표] 
 
 

한일 사이비역사학과 임나일본부론 및 일본열도분국론

 

 

박천수(경북대학교)

 
 
근래 종래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론과 분국(分國)론의 역사 인식에 기초하여 마치 20세기로 회귀(回歸)하는 듯한 논의가 제기되고 널리 양국의 시민들에게 전파되는 점이 우려된다.
 
2010년 무로타니 카츠미(室谷克実)에 의해 「문명이 반도에서 왔다는 것은 거짓말(文明は半島から来たなんで大ウソ)」이라는 자극적인 선전과 함께『일한이 금기로 하는 반도의 역사(日韓がタブーにする半島の歷史)』가 출간되었다. 여기에서는 설화에 불과한『삼국유사』의 호공(瓠公) 전래 기사를 과장하여 신라의 기초는 왜종(倭種)이 만들었으며, 신라의 남쪽은 왜지(倭地)로 주장하였다. 나아가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은 왜(倭)의 지배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중화문명을 일본열도에 전한 것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왜종(倭種)으로 판단하였다(室谷克実 2010).
 
이 책의 내용은 이미 학계에서 폐기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론의 망령으로 밖에 볼 수 없으나, 혐한(嫌韓) 감정에 동반하여 널리 읽혀지고 있는 점이 큰 문제이다. 왜냐하면 저자가 비록 역사학자가 아니지만 언론사의 서울 지국장을 지낸 경력은 일반 독자들에게 마치 한국사 전문가로 비쳐질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2013년 오히라 히로시(大平裕)에 의해 「고대 조선반도 남부는 일본이 지배했었다(古代の朝鮮半島南部は日本が支配していた)」라는 선전과 함께『알고 있는지 임나일본부(知っているか任那日本府)』가 발간되었다. 여기에서는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에 대하여 일본의 영향력이 한반도 남부에 미쳤으며,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으로 주장하였다(大平裕 2013).
 
그러나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은 임나일본부가 성립한다고 주장하는 4세기 후반에 출현하지 않고 6세기 초 나타나기 때문에 475년 한성 함락 이후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에 일시적으로 백제가 동원한 왜인의 무덤으로 본다. 저자가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을 직접 답사한 자료를 제시하며 주장하고, 오히라 히로시(大平正芳) 기념재단의 대표 즉 오히라(大平) 전 수상의 아들인 점은 독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
 
한편 이덕일은 학계에서『일본서기』 신공기에 보이는 다라국과 계체기의 기문국을 각각 경남 합천과 전북 남원으로 비정해온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이덕일 2021).
 
『일본서기』 신공기의 다라국을 경남 합천으로 비정한다는 것은 이에 국한되는 지역적 문제가 아니라 신공49년 369년에 신라를 공격하고 정벌했다는 가라7국의 위치를 모두 한반도 남부로 비정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는 야마토 왜가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설이 그대로 재연된다. 이렇게『일본서기』의 논리로 가야사를 보지 말고『삼국유사』,『삼국사기』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즉『일본서기』를 인용할 경우 한일 강단사학계처럼 한반도 내의 일로 보지 않고, 북한학계와 남한 민족사학계처럼 일본열도 내의 일로 해석해야 한다.
 
나아가 고대 한국인들이 이주해서 나라를 만들었다는 분국론에 입각한 김석형의 기문과 조희승의 다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양 지역이 일본열도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양 국명을 사용하는 것을 임나일본부를 지지하는 것으로 매도하였다. 이와 함께 강단사학에 대하여 마치 임나일본부를 추종하는 것으로 비난하였다. 그러나 기문과 다라는 6세기 중국 문서인 양직공도의 백제사신도에 보이는 한반도내 지명임이 틀림없다.
 
2001년 조희승은 가야국의 역사와 가야사람들의 일본열도 진출을 전 후편으로 구성한『가야사』를 출간하였다. 이는 1963년 제기된 김석형의 분국론을 계승한 것이다. 후쿠오카현(福岡縣) 이토지마(糸島), 무나가타(宗像), 미야자키현(宮崎縣) 휴가(日向), 오카야마현(岡山縣) 기비(吉備), 와카야마현(和歌山) 기이(紀伊)지역에 가야소국이 존재하였다고 판단하였다. 특히 오카야마현(岡山縣) 기비(吉備) 가운데 비츄(備中)지역에 가야소국이 있었던 것으로 본 근거는 가야(賀夜)라는 지명의 존재이다. 그리고 전체 길이 360m의 츠쿠리야마(造山)고분의 배총인 사카키야마(榊山)고분에서 가야토기와 마형대장식구가 출토된 것을 근거로, 츠쿠리야마고분의 피장자를 지명과 결부시켜 가야 국왕으로 주장하였다(조희승 2001).
 
그리고 조희승은 합천군 일대에는 고령 대가야를 구성한 다라(多羅)국이 있었으며, 합천 옥전고분군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다라의 지명이 남아 있다. 일본열도에는 이 다라에서 유래한 지명도 많이 있으며, 이는 다라인의 진출과 정착과 관련된다. 그리고 일본열도의 다라라는 지명은 문헌과 고고자료에 의해 가야와 직접 관련된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라고 설명한다.
 
조희승의 논리는 합천에 고령 대가야를 구성하고 있던 ‘다라국’이 일본열도에 진출해서 수많은 다라라는 지명이 붙은 분국과 각종 지명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열도에 셀 수 없이 많은 ‘다라’ 관련 지명이 남아있다. 따라서 합천 쌍책면에 다라리가 있었다는 기록만으로『일본서기』의 ‘다라국’을 합천으로 비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이덕일 2021).
 
그런데 조희승이 가야 국왕묘로 주장한 비츄(備中)지역의 츠쿠리야마(造山)고분은 당시 5세기 전엽 일본열도의 독자적인 묘제인 2번째 초대형 전방후원분으로 가야 분국의 왕릉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분국론은 허구에 불과하고, 더욱이 주목되는 것은 김석형과 조희승은 기문과 다라국 모두 본국은 한반도 내 가야지역에 있으며, 그 분국이 일본열도에 있는 것으로 기술하였다. 다시 말하면 본국은 가야에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이덕일은 가야 분국이 일본열도에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본국 즉 다라와 기문국의 위치에 대해 해명해야 할 것이다(박천수 2023).
 
이덕일은 20세기 후반 이래 임나일본부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온 국내 역사학계를 이를 추종하는 것으로 매도하고 있으며, 시민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오히려 이덕일과 이를 추종하는 일파가 해야할 일은 지금도 임나일본부를 추종하고 있는 일본의 사이비 역사학을 비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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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석형, 1966 『초기 조일 관계 연구』, 평양:사회과학원출판사
조희승, 2001 『가야사』, 평양: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이덕일, 2021 「일본서기의 다라국과 기문국의 문제점」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위한 대토론회 토론문』, 창원: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室谷克実, 2010 『日韓がタブーにする半島の歷史』(新潮新書), 東京:新潮社
大平裕, 2013 『知っているか任那日本府』, 東京:PHP研究所
박천수, 2023 『고대한일교류사』, 대구:경북대학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