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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근대 개혁기 외무부서 운영 연구(1894~1900)_천수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8.02 BoardLang.text_hits 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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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7월(통권 65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근대 개혁기 외무부서 운영 연구(1894~1900)(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4. 08.)
천수진(근대사분과)인상적인 소설은 대부분 그에 걸맞은 명문장을 시작으로 펼쳐진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혹은 『설국』의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넘어서자, 그곳은 설국이었다.”가 대표적 예시이다. 이번 기회에 작년에 제출한 박사논문을 소개하는 글을 구상하면서 한번 욕심을 내어 첫 제목부터 눈길을 끌어보고 싶었다. 성공적일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박사논문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가장 첫머리에 두어야 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분과 학문으로서 한국근대사의 기점을 고종이 즉위한 1863년으로 본다면 그 종점은 광복을 맞이한 1945년일 것이다. 이 중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1910년을 기준으로 이른바 ‘개항기’와 ‘식민지시기’의 구분이 이루어진다. 현재 한국근대사 연구는 식민지시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는 한국역사연구회에서 ‘한국 근대의 기점’을 주제로 특집호를 구성할 정도로 활발하게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1993년의 『역사와 현실』 9호 참조). 물론 어느덧 ‘희귀종’이 되어버린 개항기 연구자들이다.
그렇기에 대학원생 시절부터 박사학위를 받고 난 지금까지도 왜 이 시기를, 그중에서도 대외관계사를 공부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숱하게 들어왔다. 혹자는 ‘개항기’가 독립된 시기로서의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묻기도 한다. 시기 자체가 조선-대한제국기에 걸쳐 있기에 근대사가 아닌 ‘조선사’가 아니냐는 농반진반 섞인 질문도 적잖다. 물론 이 짧은 지면에서 내적 동기를 자세히 풀어낼 수는 없기에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개항기’ 연구자의 필요성을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2. 왜 ‘개항기’의 대외관계사인가?
단순히 산술적으로만 보아도 ‘개항기’는 1863년부터 1910년까지 약 47년의 역사를, 이후의 ‘식민지시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약 35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공식적으로 통치 기구가 달라졌다는 점에서 각 시기를 연구할 수 있는 사료의 특성이 매우 다르다. 개항기의 주요 사료를 언어로 구분한다면 ‘갑오개혁’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공문서는 한문, 그 이후의 공문서는 국한문 혼용으로 작성되었다. 외교사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개항기 조선과 대한제국은 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여러 국가와 조약에 기반한 대외관계를 맺으면서 관련국의 언어로 주고받은 다량의 외교문서를 생산했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확보를 위해 팽창적으로 경쟁하던 국제정세의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즉, 이러한 ‘개항기’는 개항 이전의 조선 사회와도, 강제 병합 이후의 조선 사회와도 구분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해당 시기의 성격을 더욱 구체적으로 구명하기 위해서는 조선사 전공자도, 식민지시기 전공자도 아닌 이 시기의 자료를 살펴볼 수 있도록 훈련받은 전공자가 필요한 것이라고 과감하게 주장해본다.
1876년 일본과의 조약 체결과 이에 따른 개항은 조선 사회에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이는 단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1차 수신사(1876) 이후 보빙사(1883)까지 이어지는 해외 사절단의 파견을 통해 조선인은 또 다른 세계를 접하게 되는 일련의 연속된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조선인은 점차 피아(彼我)의 구별을 명료히 하며 자신과 자국에 대해서도, 타국인과 타국에 대해서도 그전과는 무언가 다른 성찰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더불어 이는 조선에서 자타를 향한 인식이 모두 변화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한국근대사에서 ‘개항’이 지니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세계관의 변화’라는 인식론적인 부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의 최전선에 있는 조선인이 바로 새로운 대외관계를 담당하는 중앙 정계의 관료였다.
3. 왜 갑오개혁 이후의 외무부서인가?
조선에서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자장 안에서 발생하는 대외관계 업무는 의정부의 예조(禮曹)가 담당했다. 개항 이후의 1880년대는 이러한 중화질서가 변용되는 시기이자 새로운 질서가 유입되는 시기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의 틀을 깨고 만국공법(萬國公法)을 기반으로 구축된 국가 간 교제 사무에 대응할 필요성이 늘어났다. 기존의 부서로는 조약과 통상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대외관계에 긴밀히 대처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조선의 외교 담당 부서는 외교 사무의 분리와 독립, 외교와 통상 기능의 전문화와 맞물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1880)-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1882)-외무아문(外務衙門, 1894)-외부(外部, 1895)로 변천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처럼 대외교섭을 담당하는 외무부서는 몇 차례 부서 체계가 변화하면서 점차 전문성과 독립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박사논문에서 갑오개혁 이후의 외무부서를 다루게 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갑오개혁기의 관제 개편을 통해 외무아문 및 외부가 각국과의 교섭·통상과 관련한 업무를 전적으로 관장하는 ‘외무부서’로서 독립했기 때문이다. 한말 외무부서의 운영 체계를 살펴보기 위해서 제도적으로 부서 자체의 독립성이 보장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둘째, 갑오개혁 이후의 ‘외무부서’가 수행한 역할을 분석하여 대한제국기 각종 대외교섭 안건이 정책화하기까지의 과정, 즉 안건의 제출-심의-결정-집행의 과정을 실질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외교정책 수립 및 시행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최고주권자인 국왕 고종의 역할뿐만 아니라, 대외교섭과 관련한 제반 실무를 담당했던 당대 외무부서의 역할을 면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는 기존의 대한제국기 외교사 연구가 국왕 고종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된 나머지, 실제 대외교섭사무를 담당했던 공식 외무부서인 외부의 운영 원리나 고유의 기능을 간과하거나 심지어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형식적인 부서로 평가하는 것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박사논문에서는 대한제국기 대외교섭사무의 구체적 행위자이자, 국왕과는 다른 또 하나의 외교주체로서 외무부서를 조망하고자 한 것이다.
4. 나가며: 대한제국기 외무부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상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박사논문에서는 크게 세 가지 영역의 소재를 다루었다. 첫째, 대외정책 수행 구조 면에서 갑오개혁 이후 국가의 공식 외교라인이 ‘외부’를 중심으로 단일하게 구축되는 제도적 흐름을 살폈다. 이러한 ‘외부’ 중심의 일원적 외교정책 수행 구조는 대한제국 수립 초기 대내외 정세 변동에 따라 유동하였으나, 1898년 말 독립협회가 해산한 이후 국정 운영의 유동성이 해소되면서 외부 역시 운영 안정화를 기도할 수 있었다. 둘째, 인사(人事) 면에서 갑오개혁 이후 외무부서가 부서 운영의 필요에 따른 독자적 관리 선발을 시행하는 과정에 주목했다. 한말의 내정은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 외국세력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외무부서의 인사 문제는 단순히 한 부서에 국한된 것이 아닌 국가의 효율적 외정(外政) 수행과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마지막으로 대한제국 수립 초기의 외교노선을 ‘자립적 외교노선’이라고 명명하고 참여 주체를 세분화하여, 그 속에서 외무부서가 수행한 역할을 규명하였다. 당시 외무부서는 자립의 원칙을 고수하며 무분별한 경제적 이권 양여를 막고 각국 사이의 이익 균점을 적극적으로 조율했다. 다만 1899년 이후 외교의 실무적 영역에서 외무부서의 역할이 증대된 것에 반해, 정무적 영역에서는 황제의 의사 개입 비중이 늘어나며 중앙 정계에서 외무부서의 영향력이 이전에 비해 약화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대한제국기 외교정책의 집행 과정에서 외무부서가 담당한 정치적 역할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싶었으나 자료의 한계로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목이기도 하다. 후속 연구에서는 시기를 확장하여 1900년 이후 중앙 정계의 변동과 긴밀하게 조응하며 변화하는 외무부서의 역할에 대해 더욱 고민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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