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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논문을 말한다
[나의 논문을 말한다] 1880년대 조선의 정국변동과 서기수용정책_정경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8.02 BoardLang.text_hits 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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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7월(통권 65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1880년대 조선의 정국변동과 서기수용정책(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4. 08.)
정경민(근대사분과)한국 근대사에서 개혁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갑오개혁과 광무개혁일 것이다. 나의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정부는 왜 갑오개혁을 해야만 했을까? 조선정부가 갑오개혁을 할 수 있었던 기반은 어떻게 만들어 진 것일까? 19세기 중반 이후 아편전쟁의 발발 등으로 인한 국제정세의 변화가 조선정부에도 인식되었다. 내부적으로도 임술민란 등이 일어나면서 조선정부는 개혁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즉 대외적으로는 서양을 어떻게 막아내야 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대내적으로는 아래로부터의 제기되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소해야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부여받게 된 것이었다. 더욱이 이어서 발생한 일본과의 조일수호조규 체결, 일본의 류큐 병합은 이전과 달라진 청국의 위상을 확인시켜주었다. 청국의 위상이 달라졌다는 인식은 조선이 기존의 방식으로 외교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조선정부의 집권층은 이제 새롭게 달라진 환경 속에서 조선이라는 국가의 생존을 모색해야만 했다. 결국 이들은 서양과의 조약체결로 노선을 전환하게 되었다. 조선정부의 집권층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국제정세인식을 전환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서양의 기술을 수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전환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조선후기 북학론의 전통을 기반으로 발전된 양무론이 있었다.
2. 정책의 ‘합의’, 시행
조선의 집권층이 서양의 기술을 수용하고자 했지만, 조선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이 결정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집권층 내부에서도 서양의 기술수용을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또한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른바 ‘대원군 세력’이 그들이었다. 고종 정권은 ‘반대원군연합체제’를 구축하여 이를 제어하고자 하였으나, 정권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체제 내에 균열이 발생하였다. 이는 정권의 안정성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척사위정세력도 서양과의 수교를 반대하였으며, 왜양일체론을 이유로 일본과의 통교도 반대하였다. 집권층 내에서도 일본과의 통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에도 일본과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고, 조선정부에 대한 국내의 비판여론이 급증하였다. 반일여론을 이용한 변란이 시도되었으며, 척사위정세력의 대일외교비판은 더욱 거세어졌다. 조선정부는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에서 활용되는 서양문물에 대한 실태를 조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2차 수신사 김홍집에 의해 청국의 권고가 담긴 『조선책략』이 들어왔다. 대외정책은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 내부개혁은 청국과 일본을 통한 서양기술의 도입을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조선정부는 격렬한 논쟁 끝에 이를 채택하였다. 청국으로부터 서양기술 수용의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척사운동이 발발하면서 반대여론이 확산되었고, 고종의 척사위정세력에 대한 회유도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부는 청국으로 영선사를 파견하여 무기제조기술을 배우고, 일본으로부터 군사교관을 초빙하여 교련병대라는 신식군대를 훈련시키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대원군과 척사위정세력의 반발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조선정부는 임오군란을 수습하면서 구언교를 내려 여론을 모았다. 이 과정에서 척사위정세력의 의견을 일부 수용하였고, 그 결과물인 ‘임오개혁교서’를 반포하였다. 이 교서는 여러 변란 시도와 군란 그리고 ‘수습’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합의’된 개혁의 기조를 담고 있었다. 핵심은 서양 문물 가운데 기술을 받아들이고, 종교는 철저하게 배척한다는 것이었다. 즉, 유교적 이념과 체제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기술문명을 수용하여 개혁을 추진하는 내용인 것이다.
한국의 근대개혁에 있어서 1880년대의 개혁은 서양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최초의 개혁이 선언된 것이었다. 이 개혁은 근대사회를 만들기 위한 ‘제1차 개혁’이었다. 이를 ‘임오개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3. 정책의 시행과 의도치 않게 확장되는 길
‘제1차 개혁’은 구체적인 실행방법의 차이를 이유로 청국으로부터의 서양기술 수용을 중시하는 ‘친청세력’과 일본으로부터의 서양기술 수용을 중시하는 ‘결일본세력’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 두 세력은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과 정책의 실행방법을 높고 이견을 보이다가 갑신정변으로 충돌하였다. 그 결과 ‘결일본세력’은 축출되었고, 청국으로부터의 서양기술 수용을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친청노선’이 ‘제1차 개혁’의 핵심노선으로 자리잡았다. 이 때 고종의 통치권이 제약되면서, ‘친청세력’의 견제를 위해 미국을 통한 서양기술 수용이 모색되었다. 이른바 ‘연미노선’으로, 이 노선은 내무부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그렇지만 농무목축시험장, 미국인 군사교관의 초빙 등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친청세력’의 대대적인 비판을 받고 말았다.
미국인 선교사들을 초빙하여 시행한 육영공원과 제중원 사업은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미국인 선교사들이 서양종교를 전파함으로써, ‘임오개혁교서’를 통해 반포된 정책기조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는 어렵게 ‘합의’를 이끌어 낸 서기수용정책의 원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서기수용의 가장 효과적인 전달자인 미국인 선교사들이 동시에 서기수용정책의 방해자라는 내적 한계로 작용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에 거주하는 영국인, 일본인 등이 서기수용 전달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미국인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었던 ‘독점적 지위’도 상실되었다.
그렇지만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서 서양 종교가 전파되고 조선인들에 의한 수용이 이루어지면서 서양 종교에 대한 인식이 변하게 되었다. 이는 서양의 기술에 이어서 서양의 종교로의 수용 영역의 확대, 즉 서양에 대한 이해의 폭이 확대되고 조선사회의 서양 문명에 대한 수용성이 높아지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4. 지금까지 온 길, 앞으로 가야할 길
‘임오개혁교서’의 반포를 통해 ‘제1차 개혁’이 시작되기까지, 고종 정권은 왜양일체론, 서교에 대한 척사위정세력의 반발 그리고 대원군 세력의 정권전복시도를 감내해야만 했다. 온건책과 강경책으로 반대세력과의 ‘타협’을 모색하였고, ‘임오개혁교서’라는 서기수용의 ‘합의’를 이끌어 내었다. 그렇지만 서양의 종교와 서양의 기술을 분리한다는 것은 미국인 선교사들로 인해서 점차 흔들리게 되었다. 동시에 조선사회와 서양과의 접촉면이 넓어지게 되었고, 서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종교와 기술을 분리하여 서기를 수용하고 서교를 억제한다는 ‘제1차 개혁’의 원칙은 유지될 수 없었고, 새로운 개혁의 기준을 마련해야만 했다.
‘제1차 개혁’은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조선후기로부터 이어져 온 ‘서기수용’을 통한 개혁의 논의가 정책으로 시도된 첫 번째 개혁이었다. 또한 서양의 종교도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정부는 실행가능하며, 조선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개혁안을 만들게 되었고, 이는 ‘제2차 개혁’인 갑오개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제1차 개혁’인 임오개혁은 ‘제2차 개혁’인 갑오개혁, ‘제3차 개혁’인 광무개혁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개혁의 ‘첫걸음’인 것이다.
향후에는 위와 같은 개혁에 참여한 관료들을 비롯하여 정부안에 대해서 비판 내지 수정안을 제시한 인물들의 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개혁에 대해 찬성 혹은 반대의 입장에서 함께 하고 있었던 당대인들의 현실인식과 변화에 따른 인식의 변화양상 함께 살펴봄으로써 정책의 실행과 당대 사회 구성원들의 사유구조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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