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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마을에서 역사하기 ④_박수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8.02 BoardLang.text_hits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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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7월(통권 65호)

[기획연재] 
 
 

마을에서 역사하기 ④:

기억을 듣다, 마을을 기록하다

 


박수진(고대사분과, 성북문화원)

 
 
1. 마을의 기억을 찾아서
 
마을의 역사는 기록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마을의 시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고, 그 기억은 때로 역사책보다 더 깊은 진실을 품고 있다. 이 글은 성북의 마을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기억 속에 담긴 역사를 듣고, 그 이야기를 통해 지역의 역사를 다시 써 내려간 여정이다.
 
마을에서 역사를 하며, 마을의 역사를 보다 잘 알기 위해서는 마을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만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고, 이것을 통해 기존의 역사에서 보지 못했던 사실들을 보완하는 것이다. 이러한 학문을 ‘구술사’라고 부른다. 대학 혹은 대학원 교육과정에 구술사가 들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고대사 전공자였던 나에게는 굉장히 생소한 학문이었다. 입사를 비슷하게 한 동료 역시 개항기 전공자였기 때문에 구술사에 대해 생소한 것은 나와 비슷했다. 그러니 어떤 마을 사람을 만나야 하고, 만나서는 무엇을 물어봐야 하며 무엇은 물어보면 안 되는지, 그러기 위해서 서로간의 신뢰관계를 어떻게 형성하며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구술한 후에 자료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등등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업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사람들을 만나야 했고, 구술을 진행해야 했다.
 
먼저 사람을 찾아야 했다. 당시 성북문화원에서 진행하던 사업은 「2015년 문화재지역 주민공감 사업」이었는데, 과업 중 하나가 문화유산에 관련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아는 사람을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문화원에서 일한 지 2년이 되었기 때문에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심우장이 있는 마을인 북정마을 사람들, 심우장에서 살았던 만해 기념관의 전보삼 관장, 대금산조 국가무형유산 예능보유자 이생강 명인 등은 그렇게 알게 된 사람을 인터뷰 한 것이었다.
 
 
그림 1. 국가무형유산대금산조 예능보유자 이생강 선생의 사진
1968년 8월 멕시코 올림촌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출처: 이생강
 
 
다음은 소개를 받는 것이다. 아는 사람이 생겼으니 그들에게 ‘이러이러한 조건에 맞는 사람이 필요한데 혹시 소개 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대부분은 흔쾌하게 많은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사람들을 소개 받아, 그 중에 딱 조건에 맞는 사람을 추리는 것이 힘든 경우도 있었다. 정릉의 마지막 능참봉 아들인 서완석 명장, 정릉 옆에 조성된 교수단지의 참여자 박여병, 이정희 부부가 대표적이다.
 
문화원에서 성북구와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소개를 받는다고 하니(정확히는 성북구 문화유산과 관련된 사람이었지만) 알아서 먼저 소개를 해주겠다고 나서서 소개를 받은 경우도 있다. 미아리고개 전투의 목격자인 장남용 씨이다. 그는 미아리고개 전투를 목격했을뿐만 아니라, 이후 인민군에게 끌려가다 탈출, 이후 국군에 입대하여 한국전쟁에 참여한 참전용사이기도 했다.
 
무작정 찾아간 경우도 있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철 씨의 경우가 그렇다. 당시 같이 일하던 동료는 옛날 신문에 나와 있는 이회영 선생의 부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은숙 선생의 집 주소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빌라가 있었는데, 빌라에 들어가서 모든 층의 문을 두드렸고, 결국 가장 윗층에서 이종철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한 일이었지만, 이후 좋은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렇게 보면 만남이 쉬워보일 수도 있지만, 2년 동안 지역 주민들과 좋은 유대를 쌓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을 행사를 참여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쉽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행위 자체는 쉽지만, 주말에 시간을 내어 찾아가고, 문화원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까지도 들어주고 해결책을 함께 모색해보자고 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2. 개인의 기억에서 공동체의 역사로
 
마을 사람들을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북정마을 사람들에게는 문화유산과 공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달동네’라고 불리며 낭만과 추억을 안고 살아가는 이 마을에 사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들었다. 전보삼 관장에게는 심우장에 얽힌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심우장이 서울시 기념물로 등재된 계기(현재는 사적으로 등재되어 있다), 심우장에서 만해 기념관을 운영했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통해 심우장이라는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는 물론 당시 문화유산의 지정 및 관리에 대한 이해도 한층 깊어졌다.
 
정릉의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정릉 재실에서 태어났다는 서완석 명인은 인터뷰 당시에는 아직 복원되지 않았던 재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기억은 후에 정릉 재실을 복원하는 것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정릉이 해방 이후 얼마나 방치되고 관리되지 않았는지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미아리고개 전투의 목격자인 장남용 씨의 인터뷰도 인상 깊었다. 그는 어린 시절 6.25 전쟁시 미아리고개 전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국군은 트럭에 폭탄을 실어 고개 아래로 내려 보내 북한군 탱크에 부딪치게 만들었다. 당시 미아리고개는 길이 좁았기 때문에, 그 트럭이 다 탈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그는 당시 피난을 가지 못했던 상황, 동네 유지들이 끌려가던 모습, 그리고 자신이 북한군에게 끌려가던 상황들도 모두 기억하고 증언했다. 그는 끌려가던 도중 소변을 보러 갔는데, 그 사이 다른 사람들이 먼저 가버려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이후 가평으로 도망갔으며 그곳에서 한국군에 합류했다고 했다. 이후 전쟁에 참여한 이야기도 들었는데, 전쟁의 참혹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림 2. 미아리고개 전투 목격자 장남용씨가 보여준 사진
첫 번째 줄 가장 왼쪽이 장남용씨이다.
출처: 성북문화원
 
 
지막례, 고순심씨의 인터뷰는 미아리고개 주변 1960년대의 삶을 보여준다. 1910년대에 조성된 미아리 공동묘지는 서울로 사람이 몰려들자 난민들의 정착지로 선택되어 이장된다. 1958년에 이장이 시작되어 1963년에 파주 용미리와 벽제리 등으로 주요 이장 작업이 완료되었는데 일부는 1970년대에 당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현재 강남구 개포동, 일원동 일대)으로 이장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인터뷰에 따르면 1960년대 초반 미아리고개의 방 한 칸의 전세는 2만 5천원 이었으며, 집 지으려고 땅을 파면 뼈가 나왔다고 한다. 주요 수원(水源)인 정릉천도 처음에는 깨끗했는데, 인구가 많아지며 더러워져서 많이 불편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국가무형유산 대금산조 예능보유자인 이생강 명인의 인터뷰는 한국의 국가무형유산 관리 체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는 인터뷰였다. 정악 중심의 미학과 이론으로만 무형유산을 평가하려고 하다 보니, 민요, 잡가, 지역 소리, 생활 속 전승 문화가 낮게 평가되거나 아예 배제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 구조는 ‘현장 문화는 국가가 관리해야 할 대상이고, 전문가는 그것을 평가하는 존재’라는 일방적 권력 관계에서 나온 것인데, 이 인터뷰에서는 그의 삶의 궤적과 함께, 이런 구조적 문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인터뷰의 내용은 물론 검증이 필요하다. 사람의 기억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일부는 사실관계와 다를 때도 있고, 본인에게 유리하게 미화 하는 경우도 있다. 문화원에서 책을 발간 할 때에도 주를 통해 사실을 검증했다. 그리고 정리를 하면서 더 연구를 해야 할 방향을 정하기도 했고, 기존의 역사적 사실을 보완하기도 했다. 미아리고개 전투를 목격한 장남용 씨의 경우에는 전쟁기념관에서 나중에 따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의 모습을 보다 상세하게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70년대 미아리고개의 삶 역시 『장석조네 사람들』, 『자전거 도둑』 등 김소진의 소설과 함께 보면 더욱 생생히 보여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터뷰 한 방대한 내용들을 더욱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소설, 논문, 신문자료, 잡지 등을 통해 이틀의 인터뷰를 보완하면, 당시의 시대상을 보다 자세히 복원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지역사 연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기도 하고, 한국사 전체가 더욱 풍부해지는 역할을 하며, 기존의 역사적 견해와 다른 사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성북문화원뿐만 아니라 지역사 연구에서 구술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런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 역사 복원하기는 마을에서 역사를 하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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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성북문화원, 2015 『성북구 문화재지역 구술자료집 문화재의 숲, 사람의 마을』, 성북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