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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냉전시대 경계인의 고군분투기, 조명훈 평전 ⑤_예대열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7.02 BoardLang.text_hits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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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6월(통권 64호)

[기획연재] 
 
 

냉전시대 경계인의 고군분투기, 조명훈 평전 ⑤

 


예대열(현대사분과)

 
 
* 지난 4회까지는 조명훈의 생애사 전반을 살펴봤다. 5회부터는 그가 남긴 일기를 바탕으로 삶의 여정을 하나씩 추적해 나간다. 조명훈은 어린 시절부터 은퇴할 때까지 평생 일기장에 일련번호를 매겨가며 일기(『마음』 또는 『Mind』)를 썼다. 일기는 한글 외에도 일본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그가 머물렀던 곳에 따라 다양한 언어로 쓰여졌다. 그중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썼던 일기는 친구 김세원(金世元)이 장독대 등에 숨겨 평생 몰래 보관하고 있다가, 한국 사회 반공주의의 그늘이 사라진 이후 비로소 본인에게 전달되었다. 필자는 독일 함부르크에 살고 있는 조명훈의 부인 방영자(方英子)와 그의 딸 아디나(Adina Cho)로부터 어린 시절 일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명훈은 1931년 3월 23일 순천시 저전동 39번지에서 아버지 조규태(趙圭兌)와 어머니 마영 사이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6세인 1936년 12월 금곡리서당(金谷里書堂)에 들어가 9세 때인 1939년 3월까지 공부했다. 이후 1939년 4월 순천공립심상소학교(현 순천남초등학교)에 입학해 15세인 1945년 3월에 졸업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해 동네에서 신동으로 꼽혔고, 소학교를 다니며 줄곧 1등과 반장을 놓치지 않았다.
 
조명훈은 일제 말기 전시체제 하에서 전형적인 식민지 소년으로 자라났다. 그는 1943년 4월 개학을 앞두고 쓴 일기에 자신이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는 이유를 “남방 혹은 뼈가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알류산 열도에서 고생하는 황군 장병들 덕분”이라고 썼다. 이틀 후인 4월 3일에는 그날이 2,600년 전 일본의 시조로 평가받는 진무천황(神武天皇) 즉위식이 있었던 날이라며 기념했다. 그는 일기 곳곳에 일본군이 솔로몬 제도, 파푸아뉴기니, 버마 전선 등에서 승리한 전황을 "격침", "대파", "격추" 등 구체적인 숫자를 열거하며 기록했다.
 
일제하 학교는 식민 지배의 질서와 문화를 재생산하는 수단이자 근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규율과 자기 관리를 습득하는 장소였다. 그런 점에서 일기는 교사가 학생의 속마음과 생활을 관찰하고 학생 스스로 반성의 계기를 만드는 효율적인 규율 수단이었다. 식민지하 학생 일기는 “하나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던 셈이다. 조명훈 또한 그 의도에 충실히 부합하며 “빨리 일기 검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모범적인 식민지 소년으로 자라났다. 그의 일기장에는 도조 히데키(東条英機)를 비롯해 후일 A급 전범으로 재판받은 대신들의 사진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명훈은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이라면 느꼈을 식민지 피지배민으로서의 불안과 불만을 일기 곳곳에 드러냈다.
 
우선 불안의 이유는 전시 상황에서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공습경보 때문이었다. 방공(防空)은 군의 힘만으로 적기의 출현과 공격을 미리 알아낼 수 없기 때문에 전쟁기 민과 군의 협력이 필수적인 군사 활동이었다. 그런 만큼 일제의 방공 활동은 단순히 연합군 항공기의 공습을 저지하기 위한 행동을 넘어서서 식민지 조선 사회를 전시체제 아래 동원하고 통제하는 주요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명훈은 한편에서는 일기장 첫머리에 "적기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직 쏘지 마라!"는 표어를 붙여 놓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전쟁은 몇 년이나 계속될 수 있을까?"라며 불안과 회의감을 드러냈다.
 
공습경보가 자주 발령된 이유는 일제 말기 순천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으로 부각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순천군의 일부였던 여수는 1895년 전라좌우영이 혁파될 때까지 400여 년간 조선 수군 주력이 주둔하고 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일제는 1942년 여수에 ‘요새사령부’를 설치해 경성-여수 간 철도와 여수-시모노세키(下關) 간 선박의 교통로를 방어토록 했다. 아울러 그 축선에 있는 순천에 광주사관구 산하 159경비대대와 철도4연대를 주둔시켜 여수항과 유기적 연관을 도모했다. 그런 이유로 순천은 직접 공습을 받지는 않았으나 여수 해안에 기총소사가 행해지는 과정에서 자주 경보가 발령되었다.
 
한편 조명훈은 일기장에 학교생활에 대한 불만도 드러냈다. 그는 학년 초 반장에 임명되었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일본인 친구 쿠니모토(国本宮久)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또한 학교에서 아라이(新井證子) 선생님을 볼 때마다 분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같은 시기 친누나인 조계훈도 교원 시험에 합격했지만, 아라이 선생님만 자신의 학교에 임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조명훈의 불만은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민족적 차별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불온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불온한 마음이 저항의 씨앗을 잉태하기에 그는 아직 13세 소학교 학생에 불과했다.
 
조명훈은 1945년 4월 1일 순천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순천중학교는 학년당 120명 정원에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을 각각 절반씩 선발하였다. 그런 만큼 전남 동부 6개 군(여수, 순천, 광양, 구례, 고흥, 보성)에서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수업은 일제 말기 전쟁 동원으로 인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학생들은 여수에 ‘항전기지’ 구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1개월 동안 동원되기도 했고, 학교는 관동군의 남방 진출을 위한 주둔지로 사용되었다. 학생들은 해방 당일에도 방공호를 파다가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들었다.
 
1945년 8·15는 식민지 소년을 해방 조국 청년으로 성숙하게 만들었다. 불온과 순응은 한 개인의 삶 안에 일상적으로 공존하지만, 불온은 역사적 국면에 따라 어느 문턱을 넘어서게 되면 저항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불온은 순응에 비해 실현될 가능성이 적기는 하지만, 해방의 소용돌이는 그 문턱을 몇 단계 비약시켜 식민지 소년을 해방된 나라의 청년으로 만들었다. 조명훈이 해방 2주년을 맞아 쓴 일기를 보자.
 
 
울고 웃던 그날! 바로 2년 전 이날 해방의 종소리가 하늘에 사무치자, 힘 약한 조선 사람은 왜놈의 쇠사슬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서로 맞잡고, 울고, 웃고, 꿈이나 아닌가 하고 내가 내 눈을 부벼보고 내가 내 귀를 의심하였던 8·15! 세월이 유수로다, 벌서 두 해가 흘러갔다. 싸움으로 흘러갔다. 오호, 가엾어라! 조선 민족아! 세월이, 세상이 이리도 야속한가!? 그러나 우리 현명한 겨레는 차차 깨달아 왔다.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고 미소공위를 전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물론 소수 분자를 제외코. 이를 엿본 연합국은 다시 공위를 재개하게 되었다. (…) 우리 인민의 기대 임시정부는 서고야 만다! 자 동무여!임시정부 수립에 전 총력을 합치자! 그리고 독립의 길로! 기대코 싸우자!
 
 
위의 일기에서 보듯 조명훈은 해방 2년 만에 좌익 계열 운동권이 되어 있었다. 그는 『공산당선언』의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은 것은 철쇄(鐵鎖) 밖에 없다”는 구절에 착안한 듯 일제의 지배를 “쇠사슬”로 표현했다. 또한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대한 지지 입장을 드러내며, 1947년 5월부터 시작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 가능성과 조선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그렇다면 그가 당시 좌익 계열이 취하던 노선과 동일한 입장을 드러낸 데는 해방 2년 동안 어떤 경험이 작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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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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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天中高等學校同窓會, 『順天中高等學校 五十年史 1938∼1988』, 1988
조명훈, 『Mind』 6, 1943년 4월 1일 ~ 1943년 4월 23일
조명훈, 『Mind』 13, 1946년 7월 10일 ~ 1947년 3월 13일
조명훈, 『Mind』 15, 1947년 5월 ~ 1948년 1월 23일
 
「김윤걸(김세원 아들) 인터뷰」, 서울역 부근 카페, 2024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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