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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북한 인물열전 시리즈 ①_김태윤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6.02 BoardLang.text_hits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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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5월(통권 64호)

[기획연재] 
 
 

북한 인물열전 시리즈 ①:

한 건축가 이야기 - 평양의 설계자 김정희

 

 


김태윤(현대사분과)

 
 
한국 사람들에게 “서울을 계획한 대표적인 인물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머릿속에 물음표부터 떠오를 것이다. 남한사람들에게 서울을 계획한 인물에 대해 질문하면 대답이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 이유는 1960-70년대 서울개발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박정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외에도 서울시장을 이야기해야 할지, 서울도시계획을 진행한 도시계획가를 언급해야할지 헷갈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반면 북한사람들에게 “평양을 계획한 대표적인 인물은 누구인가요?”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많은 사람들이 “김정희”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만큼 북한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파괴된 평양을 복구한 인물이 김정희라는 사실을 여러 매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선전해왔으며 현재까지도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다. 1986년에는 “한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영화를 제작하여 김정희의 업적을 기리기도 하였다. 현재까지도 북한에서는 그를 "평양을 만든 사람"이라 부르며, 그의 생애를 영화로까지 제작할 만큼 중요한 존재로 기억한다. 이 글은 김정희라는 인물의 삶을 따라가며, 그가 어떻게 북한 도시계획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살펴본다.
 
 
1. 남과 북에서의 인식 차이
 
김정희는 북한에서 거의 신화적인 존재다. 1986년에는 그의 삶을 다룬 영화 『한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가 제작되었고, 각종 기록영화와 전시를 통해 그의 이름은 평양의 설계자이자 김일성의 건축동지로 각인되었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그의 존재조차 뒤늦게 알려졌다. 남한의 건축사 연구자 이왕기, 박동민, 일본의 타니가와 류이치 등이 199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김정희를 조명했으나, 여전히 대중적 인식은 낮다. 오히려 이름 때문에 조선 후기 실학자인 ‘추사 김정희’로 오인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김정희는 누구이고, 어떻게 평양을 설계하게 되었을까?
 
 
2. 일본 유학과 소련 유학, 이중의 배움
 
김정희는 1921년 평안북도 운전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9년 일본 니혼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해 1944년 졸업했다. 니혼대학은 사립대학 중 건축과와 토목과가 동시에 존재했던 몇 안 되는 학교로,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중요한 학문의 장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김정희의 학력은 오랫동안 확인되지 않았고, 그가 일본에서 건축을 배웠다는 사실도 비교적 최근에야 밝혀졌다. 해방 이후 그는 북조선건축동맹의 부위원장을 지냈고, 1947년 2차 소련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건축대학에서 다시 학문을 이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도시재건의 원리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며, 실기와 이론 모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이 시기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해 김정희를 격려한 일화는 이후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되며 상징화되었다.
 
 
그림 1. 소련 유학시절의 김정희
출처 : 谷川 竜一, クズネツォフ ドミトリー, 2021 「北朝鮮の都市計画家・金正熙_朝鮮戦争休戦(1953年)以前の履歴解明とその分析」 『日本建築学会計画系論文集』86(781), p.1103
 
 
3. 전쟁과 도시: 평양 복구의 총설계자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김정희는 일시 귀국하여 ‘평양복구건설총계획도’를 설계한다. 1951년 다시 소련으로 돌아가 논문을 완성한 뒤, 1953년 정전과 함께 북한으로 완전히 귀국했다. 이 논문을 바탕으로 귀국 직후 출판한 『도시건설』은 북한에서 도시계획에 관한 초기 이론서로 평가받는다.
 
그의 설계는 단순한 기술적 복구를 넘어, 사회주의적 이상을 구현하는 도시형태를 지향했다. 대동강 동편까지 확장하는 ‘동평양 개발’ 구상이 그것이었다. 당시 건설국 간부들이 “현실적이지 않다”며 반대했지만, 김정희는 “사회주의 수도는 이상을 가져야 한다”고 맞섰고, 김일성의 지지를 얻어 설계안을 관철시켰다. 이후 평양은 1970~80년대에 이 계획을 바탕으로 동쪽으로 확장되었다.
 
 
4. 도시건축가이자 제도 설계자
 
1953년 이후 김정희는 북한 건축계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조선건축가동맹 상무위원장, 평양건설건재대학 학장, 내각도시설계총국장 등을 역임하며 북한 건축 행정과 교육의 중추로 자리잡는다. 그는 김일성광장 설계에 참여했으며, 북한 도시 설계 기준과 정책 수립에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관료형 설계가가 아니었다. 건축적 실험정신과 정치적 책임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던 인물이었다. 도시설계는 당의 기획과 이상을 실현하는 수단이었고, 그 속에서 건축가는 체제의 이념을 공간으로 번역하는 번역자였다.
 
 
5. 좌천과 안주, 그리고 죽음
 
1965년 김정희는 건축 회의에서 강하게 이견을 제기하고 회의장을 이탈하는 사건을 계기로 좌천되었다. 김일성은 그의 행동을 “교만함”이라 질책했고, 결국 김정희는 평안남도 안주도시설계분소로 내려가게 되었다. 안주는 그에게 ‘유배지’였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도시설계를 맡아 청천강 유원지를 비롯한 여러 공간을 구상했다. 김정희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독일에서 체류하다가 1992년 귀순한 북한의 건축설계사 김영성의 경우 김정희가 의문사했다고 증언한 반면 이왕기는 탈북자의 증언을 통해 안주시 현장시찰 때 사고로 사망하였다고 주장한다. 그의 묘는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있으며, 직책은 ‘내각도시설계총국장’으로 남아 있다.
 
 
그림 2. 신미리 애국열사릉의 김정희 묘비
출처 : 谷川 竜一, クズネツォフ ドミトリー, 2021 「北朝鮮の都市計画家・金正熙_朝鮮戦争休戦(1953年)以前の履歴解明とその分析」 『日本建築学会計画系論文集』86(781), p.1105
 
 
6. 기억과 상징: 김정희를 기리는 북한의 방식
 
북한은 김정희의 삶을 다룬 예술영화 『한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 기록영화 『순결한 량심을 조국에 바친 지식인들』 등을 통해 그의 이미지를 이상적 지식인으로 형상화했다. 영화에서는 김정희의 일생과 한국전쟁 이후 평양의 재건과정 등을 소개하고 있지만 영화의 곳곳에 ‘김일성의 혜안’과 ‘김일성의 은혜’ 등을 강조하는 정치적인 메시지가 등장한다.
 
 
그림 3. 김정희의 삶을 다룬 영화 '한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
 
사실상 북한에는 김정희 이외에도 많은 대표건축가들이 존재하며 대부분이 해방 직후부터 1970-80년대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희가 북한 건설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은 이유에 대해서는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 몇몇 인물들의 삶을 소설 및 영화로 제작하면서 ‘이상적이면서 모범적인 인간상’을 제시하는데 그 선정방식은 분야와 인물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김정희 삶을 통해보면 비교적 짧은 생을 살았지만 김일성과의 관계와 북한의 역사에서 중요한 건축설계의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 좌천과 반성의 스토리가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질 법 하지만 당대 함께 활동한 노식, 김응상 등의 업적과 비교했을 때 크게 두드러지는 점은 나타나지 않는다. 북한에서의 김정희가 기념되고 기억되는 방식은 추후에 더 많은 고민과 연구가 필요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4. 기록영화 – 순결한 량심을 조국에 바친 지식인들 김정희 부분
 
 
7. 건축가와 건축주
 
건축가들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개인사를 살펴보면 보통 그들의 건축주가 누구인지 함께 알아볼 수밖에 없다. 그와 동시에 역사적으로 큰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을 역사를 살펴보면 국가계획을 함께 주도해 나갔던 설계가들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한 연구자는 김정희와 김일성의 관계를 히틀러와 알베르트 슈페어와의 관계에 비유하곤 한다. 히틀러는 2차대전의 승리를 예상하며 베를린 개조계획이었던 “게르마니아” 계획을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지시했는데, 이 프로젝트는 독일의 패전으로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반면 김일성은 김정희를 통해 김일성광장 일대와 대동강유원지 등을 완성하고 평양을 확대해나가면서 본인의 목표를 실현시켰다. 아마도 김정희가 오래 살아있었더라면 김일성은 더 많은 도시계획을 꿈꿨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건축가로서 빛과 그림자의 시대를 모두 경험한 김정희는 결국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고 그의 업적은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다. 그가 어떤 정체성을 가진 건축가인지 판단하기에는 자료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지만, ‘수령님이 총애하신 건축가’라는 사실은 이후 자료가 발굴된다고 해도변하지 않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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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자료
『노동신문』, 『정로』, 『평양민보』, 『건축과 건설』
 
2. 논저
김정동, 2001 「잊혀진 건축가 김충국에 대하여」 『한국건축역사학회지』10-1
김정희, 1953 『도시건설』, 평양: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과학원
리화선, 1993 『조선건축사』 2, 발언
박동민, 2018 「건축가 김정희와 평양시 복구 총 계획도: 신화와 역사」 『건축역사연구』27-2.
박성래, 1995 『한국 과학기술자의 형성연구』, 한국과학재단.
이왕기, 2000 『북한건축 또 하나의 우리모습』, 서울포럼.
평양건설전사 편찬위원회, 1997 『평양건설전사 2』,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谷川 竜一, 2021, クズネツォフ ドミトリー「北朝鮮の都市計画家・金正熙_朝鮮戦争休戦(1953 年)以前の履歴解明とその分析」, 『日本建築学会計画系論文集』86(781).
 
3.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