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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신라왕경 톺아보기 ⑥_이동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6.02 BoardLang.text_hits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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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5월(통권 64호)

[기획연재] 
 
 

신라왕경 톺아보기 ⑥:

통일기 신라 왕경의 토목 공사


이동주(고대사분과)

 
 
수도의 세련된 미관. 기와건물
 
1988년, 전 세계의 이목이 서울로 쏠린 가운데 제24회 올림픽이 화려하게 막을 올렸다. 무려 160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는 그야말로 인류 공동체의 축제이자, 사상 최대 규모의 스포츠 행사였다. 당시 방송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혼성 4인조 그룹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가 울려 퍼졌고, 폐허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전쟁 이후의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찬사와 함께 세계인의 뇌리에 급부상했다. 여의도에 우뚝 솟은 63빌딩은 부흥한 서울의 자존심이자, 번영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 눈부신 외양 뒤에는 조명되지 않은 그늘도 존재했다.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외국인의 시선을 의식해 ‘환경 정비’라는 이름 아래 판자촌을 강제로 철거하고, 도시의 추레함을 가림막으로 가리기에 분주했다. 특히 세계로 생중계될 성화 봉송 경로 주변은 철저한 정비의 대상이었다. 서울에서 판자촌이란 국가의 이미지를 갉아먹는 가난의 상징이자, 축제의 분위기를 해칠 ‘불편한 진실’로 간주되었다.
 
 
그림 1. 1988년 서울올림픽의 상징인 주경기장과 마스코트 호돌이
출처: etoday
 
 
그림 2. 1987년 4월, 철거에 맞서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주민들과 공권력 간의 대치 상황
올림픽의 화려한 조명의 이면에는 성화 봉송 길 옆이란 이유로 강제 철거된 상계동 173번지 판자촌도 존재한다.
출처: 연합뉴스
 
 
세계의 무대에 선 한국은 스스로를 포장하고 연출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서울의 판자촌은 주민의 의사와 상관없이 지도에서 지워졌고, 외국인의 시선에서 ‘가려야 할 현실’로 존재를 감췄다. 환희의 불꽃 너머로, 도시의 미관은 그렇게 정비되어 갔다.
 
이보다 앞서 1388년, 위화도 앞에 선 이성계는 깊은 침묵 속에서 결단의 날을 갈았다. 명나라를 향한 무모한 진격 앞에서 그는 회군을 단행하였다. 9일 만에 개경에 입성한 그는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하며 고려의 운명을 뒤흔들었다. 마침내 1392년, ‘조선’이라 이름 붙은 새 왕조가 역사에 첫 발을 내딛는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개경은 고려의 수도였기에 찬탈의 이미지로 인해 국정을 운영하기엔 부담이 되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이성계는 즉위와 함께 남경 천도를 지시했다. 여러 곳을 물색한 결과 정도전과 여러 신하들은 명분과 실리를 겸비한 남경을 천도의 후보지로 낙점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제는 도시의 미관이었다. 궁궐과 같은 권위의 상징물은 차치하더라도, 일반 민가가 여전히 초가로 이루어진 상황은 수도의 위상을 떨어뜨릴 수 있었다. 수도는 단순한 정치·행정의 중심지를 넘어, 한 국가의 문명과 품격을 집약적으로 상징하는 공간이다. 외교사절들은 이곳에서 국왕을 배알하며 국가의 위엄과 문화를 직접 경험하게 된다. 그들의 눈에는 건축물, 복식, 기물, 음식 등 모든 것이 이질적이고 인상적으로 비쳤을 것이며, 이러한 체험은 귀국 후 보고서로 정리되어 왕에게 올려졌다.1) 수도의 면모는 곧 국가의 위상으로 이어졌고, 새 왕조는 그에 걸맞은 면모를 갖추는 데 고심하였다. 여기서 조선 초 승려 해선(海宣)의 생각 역시 88올림픽 조직위원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新都의 大小人家가 모두 띠[茅]로 집을 덮어서,
中國 사신이 왕래할 때에 보기가
아름답지 못하고 또 火災가 두렵습니다.
만약 別窯를 설치하고,
나에게 기와 굽는 일을 맡게 하여,
사람마다 값을 내고 이를 사가도록 허락한다면,
10년이 차지 아니하여,
성안의 閭閻이 모두 기와집[瓦屋]이 될 것입니다.”2)
 
 
해선은 단순한 승려라기보다는 기와 제작에 전문 지식을 보유하고 있던 승장(僧匠), 즉 기술직 승려로 보인다. 그의 건의에 따라 설치된 “별와요(別瓦窯)”는 초기에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자연재해로 인한 생산 차질이 지속되면서 점차 그 운영이 파행적으로 변모하였다. 특히 민가에 공급되어야 할 기와를 부유층이 사적으로 횡령하는 사례가 빈번해지자, 결국 정부는 별와요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해선의 발언을 통해 살펴보면, 신도(新都)인 한양은 국가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가옥이 초가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외국, 특히 중국 사신의 왕래 시 외관상 보기 좋지 않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말하자면 전근대 사회에서 기와건물은 단순한 건축양식을 넘어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상징성을 지닌 구조물이었다. 이를 통해 권위와 위계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또한 기와는 내구성과 영속성을 갖추고 있어 국가의 문명 수준과 통치 역량을 상징하였으며, 외국 사신 등 외부 방문객에게는 문명국가로서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기능도 수행하였다. 즉 기와건물은 국가의 선진성과 위상을 드러내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수도에 기와건물이 집중된다는 것은 세련된 미관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기와건물이 증가하면서 하나의 공간은 그렇게 중심성을 표방할 수 있게 되었다. 기와건물은 도시화를 상징하는 기준이 된 듯 하다. 이는 비단 고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라벌, 통일국가의 중추로 거듭나다.
 
우여곡절 끝에 결성된 나당연합군은 육로로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해로로는 당의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백제를 협공하였다.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를 격파했고, 당군은 해상으로 백강을 건너 사비성에 접근하였다.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었다. 660년 7월 13일 김법민은 백제 태자 융을 무릎 꿇린 후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일갈하였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서
獄中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안에 있구나.”3)
 
 
백제의 사직이 마침내 무너지는 그날, 상주 금돌성에서 이 소식을 보고받은 김춘추는 깊은 회한에 잠겼으리라.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딸 고타소랑과 사위 품석, 그들의 한 맺힌 죽음이 비로소 해원되었다. 긴 세월 가슴 깊이 맺혔던 응어리는 무너진 적국의 운명 앞에서 서서히 풀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661년 6월, 그는 선도산 자락에 누워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4)
 
통일의 대업은 장자인 법민에게 계승되었다. 이후 나·당 연합군의 지속적인 군사 공세 속에 고구려는 점차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마침내 668년 9월 21일, 고구려 왕은 천남산을 사신으로 보내 영공(英公), 곧 영국공 이적(李勣)에게 항복 의사를 전달하였다.5) 이는 한반도에서 각축하던 삼국이 마침내 신라 중심의 하나의 통일국가로 재편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제 서라벌은 통일국가의 중추로 부상하게 되었다.
 
통일국가의 중심이 된 서라벌은 그 위상에 걸맞은 장엄함을 갖추어야 했다. 왕이 거처하는 월성이 먼저 정비되었고, 궁궐 영역은 더욱 확장되었다. 태자의 거처인 동궁이 창건되었으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듯 곳곳에 사찰이 정비되거나 새로 창건되었다. 오랜 전쟁의 상흔을 뒤로한 채, 서라벌에는 다시금 토목공사의 붐이 일어났다. 이는 새로운 질서와 이상을 상징하는 공간 재편의 서막이었다.
 
 
대규모 토목공사의 붐
 
문무왕 재위 19년, 왕경은 대규모 토목공사로 분주했다. 그 현장을 증언하듯, 당시의 공사를 보여주는 물질자료들이 오늘날에도 여럿 확인된다. 기와와 전돌 같은 건축 자재는 필수였고, 이를 감당하기 위해 왕경 외곽 각지에서는 권역별로 공방이 가동되었다. 양질의 흙, 물, 연료, 교통로 등 여러 조건이 갖추어진 곳에 공방이 들어섰고, 그곳에서 생산된 기와들은 월성 일대로 속속 공급되었다.
 
정부는 생산에서 납품까지의 전 과정을 면밀히 관리했을 것인데, 각 공방은 정해진 기일 내에 물품을 납품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공방이 동시에 운영된 만큼, 물품의 혼입이나 납품의 지연 등 여러 변수도 배제하기 어려웠다. 언필칭 공사 책임자의 문책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광범위한 공사 현장에는 필연적으로 물류와 인력의 효율적 배치가 요구되었고, 납품의 혼선을 최소화하기 위한 다양한 방책이 고안되었을 것이다. 우선 <그림 3>의 자료들을 보자.
 
 
그림 3. ‘調露二年’명 전돌(좌), 전돌(안압지1752)(중), 수인전(手印磚)(우)
출처: 국립경주박물관(좌, 중), 中國西安博物館 이동주 촬영(우)
 
 
조로 2년명이 새겨진 전돌은 경주 월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세상의 빛을 보았다. 측면에는 3행으로 “調露二年/漢只伐部君若小舍/三月三日作康”이라 새겨진 명문이 확인된다. 제작 시기는 가는 획으로 적었으나, 소속부와 인명, 관등은 상대적으로 크게 표기되어, 명문을 중요도에 따라 시각적으로 구분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이 전돌에 새겨진 관인이 곧 제작자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사는 신라 17등 관등 가운데 13급에 해당하는 말직에 해당한다. 각 관청에서 행정 실무를 담당한다. 따라서 680년 한지벌부의 군약 소사가 공방의 작업을 감독하고 검수한 것이라 해석하는 편이 설득력이 있다.
 
월지에서 출토된 또 하나의 전돌에는 양면에 손바닥 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이처럼 손바닥이 찍힌 전돌은 중국 동한 중기, 광저우 지역의 전실묘에서 처음 출현한 이래 남북조 시대 북방으로 확산되었고, 당대 중원에서 그 절정을 이루다가 명대를 지나며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중국 학계에서는 이러한 손바닥 자국이 단순한 실수나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물품 검수나 납품 확인을 위한 일종의 ‘영수증’처럼 기능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 전돌을 분석한 결과 주인공은 남성으로 추정되며, 신장은 153.39~159.96㎝ 사이, 체중은 50.71~51.41㎏의 범위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전돌을 양손으로 옮긴 후 그 흔적을 미처 지우지 못했던 건 아닌가 추정하였다.6) 손바닥 자국을 통해 당시 신라인의 체질 조건을 재구성할 수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었다.
 
다만 여기서 되묻고 싶은 것은 그 흔적이 그저 옮기다 생긴 흔적에 불과했을까? 중국의 사례처럼 의도적인 행위였다면 어떨까? 공급처에서 물량이 발주되면, 공방은 분주해진다. 소성 과정에서 열기가 조금만 어긋나도 불량품이 나오기 쉽고, 이는 납품 차질로 이어진다. 여러 공방에서 납품되는 혼란 속에서 누군가 약삭빠르게 물품을 가로채 자신의 작업물이라 주장한다면, 시비가 벌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공신력 있는 식별 표시가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예컨대, ‘군약’이라는 관원이 검수를 마쳤다는 명문을 새기거나, 손바닥 자국이나 특유의 부호, 제작자명 혹은 공방을 상징하는 기호를 남겨 생산자를 명확히 밝혀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돌에 찍힌 손바닥의 주인은 다름 아닌 제작자이거나, 혹은 그 작업을 최종 확인한 감독자였을 가능성은 없을까. 소성(燒成) 과정에서 전돌의 크기가 다소 수축되었을지라도, 손가락의 배열이나 손바닥의 윤곽은 하나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되어, 제작 또는 검수의 주체를 증명해주는 인장과도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편 아래 <그림 4>은 문무왕 19년(679) 왕경의 대규모 토목공사를 증언하는 실물자료인 중판연화문 수막새, 무악식 암막새, ‘儀鳳四年皆土’명 기와, 귀면와를 정리한 것이다.
 
그림 4. 중판연화문 수막새와 무악식 암막새(좌), ‘儀鳳四年皆土’명 기와(중), 귀면와(우)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이 기와들은 이전 것들과 비교했을 때 매우 정교하게 제작되었는데, 당시 신라정부가 얼마나 막대한 국력을 기울여 수도를 장엄히 꾸미고자 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儀鳳四年皆土’명 기와는 연대가 분명한 기와로, 그 자체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무악식 암막새는 아래로 늘어진 턱이 없는 형태가 특징이며, 이 기와의 외면에서도 동일한 명문이 확인되어 정확한 제작 시기를 특정할 수 있다. 이 암막새는 중판연화문 수막새와 짝을 이루는 것으로 보이며, 귀면와의 측면에는 무악식 암막새의 넝쿨무늬가 시문되어 있어 동시대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네 종류의 기와는 679년경 왕경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토목공사의 범위와 성격을 가늠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이들 기와는 주로 월성 내 발천 남쪽과 사천왕사, 동궁과 월지 등 주요 시설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어, 당대 수도 장엄의 실상을 생생히 전해준다.
 
 
길일을 택하다. ‘儀鳳四年皆土’
 
앞서 살펴본 ‘儀鳳四年皆土’명 기와는 왕경의 대규모 토목공사에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서 의봉(儀鳳)은 당 고종의 연호이며, 그 사년(四年)은 679년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명문 가운데 儀鳳四年까지는 일단 시간성을 반영하는 문자가 분명하다. 다만 ‘皆土’의 의미는 굉장히 모호하며 명확한 해석이 어렵다. 즉물적으로 해석하면 ‘모든 것이 토’ 정도의 의미가 된다.
 
사실 이 기와는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가 처음 소개하였다.7) 그는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1919년 6월 월지 동남쪽 밭에서 습득한 것을 1969년 무렵 탁본으로 세간에 알렸다. 그리고 명문의 ‘皆土’를 불전(佛典)에 보이는 ‘전토(全土)’ 혹은 ‘국토(國土)’와 같은 말에 해당된다고 전제한 후 ‘솔토개아국가(率土皆我國家)’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하였다. 어떤 과정을 거쳐 ‘개토(皆土)’란 단어에서 ‘솔토개아국가(率土皆我國家)’라는 문구를 추출했는지 전후 사정은 알 수 없다. 다만 기와의 제작 시점이 삼국통일이 달성된 문무왕대인 점을 염두에 두고 모든 영토는 왕의 땅이라는 사고(思考), 이른바 왕토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간주한 것 같다. 사실 이러한 왕토사상은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는데,8) 대체로 ‘개토(皆土)’를 삼국통일 그 자체의 의미이거나,9) 혹은 ‘의봉사년에 영토를 모두 함께 함’으로 풀이하여 개토를 통합의 의미로 보기도 한다.10)
 
한편 토(土)를 통일이라기보다는 뭔가 땅을 파헤치는 토목공사와 관련된 용어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11) 토목공사와 관련된 견해 역시 입론의 배경에는 기와의 연대가 문무왕대 대역사(大役事)의 시기와 부합한 측면이 고려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후 통일기년으로 보는 견해도 등장했다.12) 즉 일통삼한의 해는 676년이 아니라 의봉사년인 679년으로 보고, 이 해야말로 삼한을 영토적으로 통합한 실질적인 해이자 통일기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개토(皆土)’의 의미를 민족 통일의 의미인 ‘삼국통일’이 아니라 ‘일통삼한’, 즉 ‘삼한을 영토적으로 통합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비교적 최근에는 개토를 기와를 제작한 장인으로 보거나,13) 벽사 마크로 추정하는 등14) ‘儀鳳四年皆土’를 둘러싼 논의는 갈수록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 문제를 풀기위해서는 현재까지 출토된 다양한 기와의 명문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명문의 대부분은 제작일, 공급처, 제작지, 제작자 등으로 한정된다. 그렇다면 ‘儀鳳四年皆土’ 역시 이 범주에서 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나라 종을 하나 보기로 한다. 중국 서안의 비림박물관에는 당 예종 2년(711년)에 주성된 경룡관종(景龍觀鐘) 일명 경운종(景雲鐘)이 걸려있다.
 
 
그림 5. 당(唐) 경운종(景雲鐘)
출처: 中國 西安 碑林博物館
 
 
종의 표면에는 도교의 찬양과 주성내력을 가로 18칸 × 세로 17칸의 정칸(井間)에 음각을 해 놓았는데, 당 예종의 친필이라 한다.15) 명문의 말미에는 두 칸에 걸쳐 주성 연대가 나오는데 위의 5칸을 비운 “景雲二秊太歲辛亥金九月癸酉金朔一十五日丁亥土鑄成”이라 썼다. 특히 육십갑자에 오행을 붙여 辛亥金, 癸酉金, 丁亥土라는 특이하게 시간을 표현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십간과 십이지에도 음양과 오행의 구분이 있듯이 육십갑자도 마찬가지이다. 육십갑자에 오행을 배합시키는 것을 납음이라 한다. 여기서 납음이란 궁[宮(土)]ㆍ상[商(金)]ㆍ각[角(木)]ㆍ치[徵(火)]ㆍ우[羽(水)]의 오음을 육십갑자에 배속시키는 것이다. 참고로 아래 <표 1>은 60화갑의 납음표이다. 각 간지에는 오행이 붙어 있다. 따라서 경운종은 연간지인 신해(辛亥)에 금(金), 월간지인 계유(癸酉)에 금(金), 일간지인 정해(丁亥)에 토(土)를 붙인 구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기와에 새겨진 날짜 표기가 이토록 복잡하게 구성되었을까? 이는 단순한 시점 표기가 아니라, 택일(擇日)의 결과가 반영된 흔적이기 때문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중대한 일은 반드시 길일(吉日)을 가려 정한 후에 시행되었으며, 왕경에서 진행된 문무왕 19년(679)의 대규모 토목 공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궁궐의 중수처럼 중차대한 일은 국가적 차원에서 택일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택일은 음양오행의 조화가 가장 극대화되는 시점을 선택하는 행위로, 단순한 신앙의 차원을 넘어 천명(天命)을 받드는 정치 행위였다.
 
 
그림 6. 60화갑 납음표
 
 
중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도성을 건축할 때는 반드시 풍수에 따른 입지 선정[擇吉地]과 더불어, 건축의 각 단계에 적합한 길일과 길한 시각(時辰)을 택하는 택일[擇吉日]을 병행하였다. 이는 단순히 실무적 효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왕조의 존속과 국가의 길흉을 결정짓는 천인합일의례의 한 축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儀鳳四年皆土’를 경운종의 원리에 입각하여 해석해보자. 우선 연간지로 679년은 기묘년(己卯年)에 해당하며, 이는 납음 성두토(城頭土)에 속한다. 679년 기묘년의 월간지는 연두법(年頭法)에 따라 계산하면 5월은 경오[庚午, 路傍土], 6월은 신미[辛未, 路傍土]로 파악된다. 정확한 일간지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二十史朔閏表』를 참고하면 납음이 모두 ‘토(土)’에 해당하는 날짜들로는 다음과 같은 일자들이 후보로 제시된다.
 
5월: 7일 병술[丙戌, 屋上土], 8일 정해[丁亥, 屋上土], 21일 경자[庚子, 壁上土], 22일 신축[辛丑, 壁上土], 29일 무신[戊申, 大驛土]
6월: 1일 기유[己酉, 大驛土], 8일 병진[丙辰, 沙中土], 9일 정사[丁巳, 沙中土], 22일 경오[庚午, 路傍土], 23일 신미[辛未, 路傍土], 30일 무인[戊寅, 城頭土]
 
일본의 칠지문서는 상단에 납음, 중단에 24절기, 하단에 기피일이나 길일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당시 행동거지에 날짜가 얼마나 체계적이고 정교하게 작동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6월 3일은 조로로 개원한 날짜이므로 토(土)에 해당되는 날은 없게 된다. 그리고 5월 중 기피일을 제거하면 그 후보는 5월 7일, 8일, 29일이 남게 된다. 이 날짜 중 하나를 특정하여 기와에 찍은 것이다. 택일의 결과를 반영한 명문기와는 월성을 중심으로 권위건축물에 올려져 도시경관을 장엄하였다.
 
‘儀鳳四年皆土’는 간단한 명문 같지만 그 속에는 우주의 기운과 정치적 정당성을 연결하는 의례적 선택이었다. 신라 중대 왕실은 삼한을 일통했다는 자신감과 왕조의 영속성을 보장받기 위해 부단히 고민했던 것 같다.
연간지, 월간지, 일간지가 모두 土에 해당하는 의미를 가진 ‘儀鳳四年皆土’ 명 기와는 그렇게 왕경의 대규모 토목공사에 소비되었다.16)
 
다음에는 천년의 사치품, 당와(唐瓦)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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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宣和奉使高麗圖經』
2) 『太宗實錄』 卷11, 太宗 6年 1月 28日. “海宣嘗言於國曰: “新都大小人家, 皆蓋以茨, 於上國使臣往來, 瞻視不美, 且火災可畏. 若置別窰, 使予掌以燔瓦, 許人人納價買之, 則不滿十年, 城中閭閻, 盡爲瓦屋矣.”
3) 『三國史記』 卷5, 新羅本紀 5 太宗武烈王 7年 7月. “十三日, 義慈率左右夜遁走, 保熊津城, 義慈子隆與大佐平千福等出降. 法敏跪隆於馬前, 唾面罵曰, “向者, 汝父枉殺我妹, 埋之獄中. 使我二十年間, 痛心疾首, 今日汝命在吾手中.” 隆伏地無言.”
4) 『三國史記』 卷5, 新羅本紀 5 太宗武烈王 8年 6月. “王薨. 諡曰武烈, 葬永敬寺比, 上號太宗. 高宗聞訃, 擧哀於洛城門.”
5)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 6 文武王 8년. “九月二十一日, 與大軍合圍平壤. 髙句麗王先遣泉男産等, 詣英公請降.” 
6) 민찬홍·김현희, 2023 「경주 월지 출토 손자국 흔적 전돌에 대한 시론」 『新羅文物硏究』 16, 5~36쪽
7) 大坂金太郞, 1969 「[儀鳳四年皆土]在銘新羅古瓦」 『朝鮮學報』 53
8) 李基東, 2005 「新羅'中代'序說 -槿花鄕의 진실과 虛妄-」 『新羅文化』 25
9) 권오찬, 1980 『신라의 빛』, 경주시 ; 윤경렬, 1984 『경주고적이야기』, 경주박물관학교 ; 高敬姬, 1993 「新羅 月池 出土 在銘遺物에 對한 銘文 硏究」, 東亞大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0) 국립중앙박물관, 2011 『문자, 그 이후』, 통천문화사
11) 朴洪國, 1988 「月城郡 內南面 望星里 瓦窯址와 出土瓦窯에 대한 考察」 『嶺南考古學』 5 ;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12) 崔珉熙, 2002 「〔儀鳳四年皆土〕글씨기와를 통해 본 新羅의 統一意識과 統一紀年」 『慶州史學』 21 ; 최민희, 2018 「儀鳳四年皆土 글씨기와와 皆土 재론-납음 오행론 비판-」 『한국고대사탐구』 30
13) 김창호, 2022 『한국고대 와전명문』, 서경문화사
14) 조성윤, 2020 「新羅 儀鳳四年皆土명 瓦의 皆土의 의미」 『한국기와학보』 1
15) 王翰章, 1986 「景云钟的铸造技术及其铭文考释」, 『文博』
16) 이동주, 2013 「新羅 '儀鳳四年皆土'명 기와와 納音五行」 『歷史學報』 220 ; 2019 『신라 왕경 형성과정 연구』, 경인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