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역사랑' 2025년 5월(통권 64호)
[기획연재]
섬에서 만나는 고려사 ②:
강화 천도와 강도(江都) 건설 - 수도가 된 섬, 강화도 1
박종진(중세1분과)
1. 강화천도 논의
몽골과 전쟁 중이던 1232년(고종 19) 7월 고려는 강화도[江都]로 천도하였다가 1270년(원종 11)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에 따라 강도는 40년 가까운 기간 동안 고려의 수도였다. 먼저 천도 과정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1231년 8월 살례탑이 이끄는 몽골군이 함신진[咸新鎭, 義州]을 통하여 고려 영토에 들어오면서 몽골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를 몽골의 1차 침입이라 하는데, 이때 몽골군은 개경을 거쳐 충주까지 왔으며, 다음 해 1월 강화가 성립되자 몽골군은 개경에서 회군하였다. 고려에서는 몽골이 회군한 직후인 2월에 천도 논의가 시작되어 그해 5월까지 몇 차례 관련된 논의를 하였다. 5월 23일에는 4품 이상의 관리가 모여서 회의를 하였는데, 이때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은 성을 지키면서 몽골군과 맞서자고 했지만 재추[宰樞, 2품 이상의 고위 관리] 정무(鄭畝)와 대집성(大集成) 등만 도읍을 옮겨서 난을 피하자고 하였다. 6월 어느 날 최우는 자기 집에 재추들을 모아서 다시 천도를 논의하였다. 이때 유승단(俞升旦)은 몽골과 화의를 주장하였고, 야별초 지휘(指揮) 김세충(金世冲)은 개경에서 힘을 합하여 사직을 보존하자고 하였지만 집권자 최우는 김세충을 죽여서 천도 반대 여론을 누르고 강화 천도를 결정하였다. 최우가 그 전해 12월 강화도가 피난지로 적합한지 알아본 것을 보면 그는 그 전해부터 강화도로 천도하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한강과 예성강이 바다와 만나는 경기만의 한가운데를 막고 있는 강화도는 개경과 가까울 뿐 아니라 한강ㆍ임진강ㆍ예성강이라는 물길을 통하여 내륙의 여러 지역과 연결되었다. 강화도는 바닷길을 통하여 주변의 섬, 국토의 북부와 남부, 더 나아가서 외국으로 나가는 길목이기도 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강화도는 혈구(穴口)ㆍ해구(海口)라는 이름을 가지기도 했다. 또 강화도는 갯벌이 발달되어 선박의 진입과 접안이 어려워서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데 매우 유리하였다. 이렇게 강화도는 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국방의 요충지였다. 강화도로 천도한 것은 강화도가 몽골군의 예봉을 피하기 쉬운 섬일 뿐 아니라 개경과 가까워서 개경을 중심으로 편성된 교통로를 그대로 이용하여 조세를 징수하고 지방을 통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화천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예전에는 강화로 천도하여 세계역사상 짧은 기간에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몽골을 상대로 30년 가까이 맞서 싸워서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대세였다면 지금은 무인집권자 최우가 정권 유지를 위해서 아무 준비 없이 무리하게 천도를 단행하여 백성들의 피해가 컸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강화 천도에 대한 평가와 무관하게 강화도는 40년 가까이 고려왕조의 수도, 강도가 되어 국가 운영의 중심 무대가 되었고, 강화도의 역사에서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적지 않다.
2. 천도 과정과 경로
강화 천도를 결정한 최우는 바로 천도를 결행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 세가에는 6월 16일(을축) 최우(崔瑀)가 왕을 협박하여 강화(江華)로 천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7월 7일 고종이 강화 객관에 들어가고 태조와 그의 아버지인 세조의 관[梓宮]을 강화로 옮기면서 강화 천도가 이루어졌다.
강화 천도를 결정한 다음 날인 6월 17일(병인) 최우는 2령(領)의 군대를 동원하여 강화에 궁궐을 짓기 시작하면서 천도 준비를 시작하였는데, 왕이 7월 6일 개경을 출발해서 다음 날 강화 객관에 들어갔으니 거의 준비 없이 천도를 결행한 셈이다. 이렇게 큰 준비 없이 강압적으로 천도를 단행하였기 때문에 혼란은 불가피하였다. 천도 직후 고종도 강화 객관에 들었고 고위 관리였던 이규보의 가족은 강도 북쪽 하음현의 객사 서쪽 행랑을 빌려서 살았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일반 민들의 사정은 이보다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왕이 개경에서 강화로 갈 때인 7월 초에는 장마가 열흘이나 계속되어 흙탕물이 정강이까지 차고, 사람과 말이 엎어지고 넘어졌다고 한다. 그때 최우는 녹전거(祿轉車) 100여 대를 빼앗아 집안의 재물을 강화도로 옮겼고, 자기 자신은 먼저 자기의 족당을 거느리고 개경 남쪽에 있는 경천사(敬天寺)에 가서 하루 유숙하고 강화로 들어갔다(李齊賢, 「櫟翁稗說」 前集2).
그때 개경에서 강화로 이동했던 교통로는 고종과 최우의 행적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고종은 개경을 출발하여 승천부에서 하루 머물고 강화로 이동하였다고 하니 고종 일행은 개경 나성(羅城) 남문인 회빈문(會賓門)을 나와서 바로 남쪽으로 내려와서 승천부에 도착하였고, 다음날 승천부의 포구인 승천포에서 배를 타고 강화도 북쪽 포구인 승천포로 건너왔을 것이다. 이곳은 지금 강화도 천도공원으로 조성된 곳이다. 한편, 최우 일행은 개경 남문을 나와 서남쪽에 있는 경천사로 갔다가 다시 승천포로 이동하여 고종과 같은 길로 강화도로 들어왔을 것이다. 개경 – 승천포 - 강도를 잇는 이 길은 강화 천도 시기에 매우 중요한 교통로였다. 몽골 사신이 드나들었던 곳도 이 길이고 고려의 관리와 군사들도 이 길로 강도와 개경을 왕래하였다. 또 전국의 많은 물자들도 개경을 거쳐 이 길로 강도로 들어왔다.

그림1. 천도경로
강화도 북단의 포구 이름도 승천포였다.
그림2. 고려천도공원에 있는 고종사적비(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3. 강도의 건설
고려정부는 강화로 천도한 후 새로운 수도인 강도(江都)를 건설해 나갔다. (고종 19년에 강화 천도 후 개경은 ‘구경(舊京)’ 혹은 ‘구도(舊都)’로 불렸고, 강화현은 ‘강화군(江華郡)’으로 승격되었고, ‘강도(江都)’ 혹은 ‘신도(新都)’라 불렀다. 강도는 ‘강화도성(江華都城)’을 줄인 말이다.) 이와 관련된 것으로 『고려사』 병지에 1233년(고종 20)에 강화 외성(外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처음 보인다.(『고려사』 세가에는 1237년에 강화 외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있다.) 강도 시기 쌓은 강화 외성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필자는 현재 강화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강화중성」이 이때 쌓은 외성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회에서 살펴 보겠다.) 개경에서 외성이자 도성인 나성(羅城)이 고려시기 개경의 성곽 중 가장 늦은 1029년에 축조된 것과 달리 강도에서는 외성을 가장 먼저 축조한 것이다. 전쟁 중 임시로 옮긴 수도였기 때문일 수 있다. 외성이 축조되면서 강도의 지리적 공간도 정해졌다. 지도에서 보는 ⊂ 모양의 성곽②가 「강화중성」, 곧 강도 외성이다. 1235년에 강화도 해안에 제방을 쌓은 것이 확인되는데, 결과적으로 현재 「강화중성」과 해안 제방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강도시기의 외성, 곧 강도의 공간이 되었다. 강화도 전체를 강도로 볼 수도 있지만 임시 수도 강도의 지리적 공간은 외성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림 3. 강도의 성곽체계
⊂ 모양의 성곽②가 강도 외성, 곧 지금 「강화중성」이다.
외성 축성과 함께 1234년(고종 21) 1월에는 각 도(道)에서 민정(民丁)을 징발하여 궁궐과 관아들을 지었고, 그다음 달에는 죽은 참정(參政) 차척(車倜)의 집을 봉은사(奉恩寺)로 삼고 민가를 철거하여 임금이 거둥하는 길[輦路]을 넓혔다. 이때는 비록 천도한 초창기이기만 구정(毬庭)과 궁전(宮殿), 절[寺社] 등의 이름은 모두 개경[松都]의 것을 따랐고, 팔관회(八關會), 연등회(燃燈會), 행향도량(行香道場)도 모두 옛 법식대로 하였다고 한다. 기록은 확인되지 않지만, 강화로 천도할 때 태묘, 사직, 국자감도 강도로 옮긴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천도 후 2년 정도 지나면서 강도는 외성을 비롯해서 궁궐과 관청, 태묘와 사직, 국자감, 절 등 국가 운영에 필요한 시설들을 갖추게 되었다. 천도 후 비교적 빠른 시간에 주요 시설들을 강도에 갖출 수 있었던 것은 개경의 시설 중 주요한 문서나 재물 등 핵심적인 것을 모두 강도로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또 고종 21년 정월 궁궐 남쪽 마을에 불이 났을 때 수천 채의 집이 탔다는 기록에서 궁궐 근처에 민가도 많이 들어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234년에 갖추어진 강도의 주요 시설들은 그 후 필요에 따라 보완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와 관련된 대표적인 기록으로 1244(고종 31)년 8월 본궐의 전각인 강안전이 개축된 것과 1250년 중성을 쌓은 것이 있다. 중성은 외성 안에 쌓은 성이다. 이에 따라 강도의 성곽은 천도 후 처음 쌓은 외성, 궁궐을 지으면서 쌓은 궁성과 함께 3중의 성곽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외에도 태묘와 국자감을 새로 지은 기록이 있다.
그렇지만 강도시기에도 개경은 여전히 국가운영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고려시기의 교통로는 개경을 중심으로 편성되었고, 그를 통하여 조세가 개경으로 운반되었다. 강도 시기에도 개경을 중심으로 편성된 교통로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고, 강도 시기에도 고려정부는 이 길을 통해서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고 지방에서 조세를 운반하였다. 1234년(고종 21) 최우가 강화에 저택을 지으며 주요 재목을 개경에서 실어 온 것이나 1238년 이규보가 ‘붉은 오얏을 처음 먹으면서’라는 시에서 “모든 물건을 옛 서울에 의지하니(凡物仰舊京), 옛 서울을 갑자기 버리기는 어렵다(舊京難遽棄).”고 할 정도로 강도 시절에도 개경은 여전히 국가운영에서 중요한 곳이었다.
그림 4. 강화읍 전경
궁궐을 비롯해서 강도의 핵심 시설은 이곳에 있었다.
강화산성 남장대에서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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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박종진, 2022 『고려왕조의 수도 개경』 눌와
尹龍爀, 1991 『高麗對蒙抗爭史硏究』 一志社
이희인, 2012 『고려 강도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김창현, 2005 「고려시대 강화의 궁궐과 관아」 『국사관논총』 106
박종진, 2002 「강화천도 시기 고려국가의 지방지배」 『한국중세사연구』 13
신안식, 2010 「고려 江都時期 도성 성곽의 축조와 그 성격」 『軍史』 78
홍영의, 2017 「강화천도의 배경과 의의」 『강화 고려도성 기초학술연구』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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