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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누구를 위한 지속가능한 산림개발인가? ②_김태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6.01 BoardLang.text_hits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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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5월(통권 64호)

[기획연재] 
 
 

누구를 위한 지속가능한 산림개발인가? ②:

일제의 조선산림개발 정책을 중심으로

 

 


김태현(근대사분과)

 
 
1. '국방의 숲'에서 '수익의 숲'으로
 
본 연재는 “누구를 위한 지속가능한 산림개발인가?”라는 물음을 출발점으로 삼아,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추진한 산림정책의 실제 목적과 그 이면에 담긴 지향점을 규명하고자 한다. 앞선 제1부에서는 산림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추진된 일제의 식민지 산림정책이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했으나, 당시 조선의 임업 기반이 미비했던 탓에 실제로는 국경 지역 장악과 군용 목재 확보 등 국방적 성격이 더욱 두드러졌음을 밝혔다.
 
이번 제2부에서는 그렇다면 일제가 경제적 자원으로 조선의 산림자원을 활용한 시점은 언제 부터인지 확인해보고자 한다. 근대 국민국가가 자국의 산림을 수익 창출의 자원으로 재편한 것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국가들도 식민지에서 근대적 임업정책을 재정정책의 일환으로 적용하며 산림 개발을 추진하였다. 특히 식민지의 산림 자원은 단순한 자원 공급원이 아니라, 제국 본국의 목재 수급을 보완하고, 식민지 재정을 자립시키기 위한 핵심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식민지에서 시행된 산림 개발 정책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를 둘러싼 경제적 요인들과 재정 구조를 함께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고는 조선총독부가 1916년 전후 시기를 기점으로 벌채 사업을 본격화한 역사적 전환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1916년 전후의 국유림 확보 과정과 산림 수익의 변동, 그리고 민유림 조림정책의 재정적 부담 구조를 분석할 것이다.
 
이때 산림 수익이라 함은 임야에서 생산된 원목, 제재목, 기타 임산물의 판매를 통해 획득한 이윤을 가리킨다. 근대 국민국가에서 국유임야 수입은 일반적으로 중앙 재정에 편입되었으며, 식민지 조선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한 형태로 운영되었다. 다만 그 제도적 구성은 시기에 따라 변화하였다. 1907년부터 1911년까지는 「한국삼림특별회계법」에 따라, 1911년부터 1916년까지는 「조선삼림특별회계법」에 근거하여 산림 수익이 별도 회계로 관리되었으나, 1916년 이후 해당 법령이 폐지되면서 영림창의 수익은 조선총독부의 관업수입에 편성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제도 변화는 조선총독부 산림정책의 중대한 방향 전환을 반영하는 동시에, 일제의 식민지 재정 운용 전략이 중앙집중적 통제에 점점 더 무게를 두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1916년 「조선삼림특별회계법」의 폐지를 기점으로, 총독부는 영림창이 생산한 산림 수익을 제한 없이 활용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로써 조선의 산림은 본격적으로 ‘벌채 중심의 수익 자원’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본고는 이 제도 전환의 구체적 양상을 중심으로, 총독부가 어떤 방식으로 국유림의 벌채 사업 기반을 구축하였는지, 이 과정에서 산림 수익 구조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조림 정책은 어떤 방식으로 병행되었으며 그것이 어떤 한계를 드러냈는지를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검토는 일제 산림정책이 식민지 재정 확보 정책이었음을 입증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다시 말해, 본 글은 산림정책의 수익 중심 전환이 단순한 재정 운영상의 선택이 아니라, 식민지 통치 구조와 직결된 제도적 결정이었음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2. 삼림특별회계와 '제국의 수익원'으로서의 조선 산림
 
1907년 제정된 「한국삼림특별회계법」은 통감부가 조선의 국유림을 직접 운영하며 수익과 지출을 별도 회계로 관리하도록 한 제도적 장치였다. 이 특별회계는 일본과 조선 간의 산림 출자 구조와 이익 분배, 국경지역 공동 경영이라는 형식을 명목상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1913년 이후 일본 본국은 긴축 재정 기조 아래 식민지 재정의 자립과 수익성 강화를 요구하게 된다. 조선총독부는 이에 호응하여 자체 수익사업을 본격 확대하였고, 그 중심에는 산림 사업이 있었다. 산림은 반복 가능한 자원으로서, 장기적으로 벌채-조림의 선순환 구조만 잘 설계된다면 안정적 재정 수입원이 될 수 있는 분야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감안하여 기존의 제한적 회계 구조—즉, 수익의 사용 범위가 제한된 삼림특별회계—를 폐지하고, 산림 수익을 총독부 일반재정에 유입시키는 방안을 적극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삼림특별회계는 ‘재정 유연성을 저해하는 장벽’으로 간주되었고, 1916년 결국 일본 제국의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이 조치는 조선 산림이 더 이상 조선 내 공동재로 인식되지 않고, 제국 전체의 재정 자원으로 완전히 통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조선 산림의 경영은 점차 벌채 중심으로 전환되며, 그 성격은 명백히 ‘제국의 수익원’으로 재정의되었다.
 
 
표 1. 영림창의 벌목조재와 입목 처분(1910~1925)
출처: 『朝鮮總督府統計年報』, 각 년판 ; 『朝鮮林業逸誌』 1933, 301-302쪽
 
 
삼림특별회계의 폐지는 단순한 회계 제도 개편에 그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이 조치를 계기로 영림창의 조직 구성과 사업 운영 방식을 전면적으로 개편하였다. 기존 영림창은 국경 지역 치안과 국방을 명분으로 군 출신 인사들이 주도했으나, 삼림수익을 본격적인 재정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한 총독부는 인력을 임학과 출신의 전문 기술자로 재편하였다. 일본 본국에서 임학과 졸업생과 산림기사들을 대거 파견하였고, 이들은 각 사업소별로 '가시업안(假施業案)'이라는 준계획서를 수립해 사업 지구를 설정하고, 벌채 대상 구역과 생산 목표량을 체계적으로 마련하기 시작했다.
 
벌채 사업의 양적 확대는 수치로도 명확히 드러난다. 「조선삼림특별회계법」이 폐지되기 이전인 1910~1914년 영림창의 평균 직영 벌채량은 약 6만 6천㎥ 수준이었다. 그러나 법령 폐지 이후인 1915년부터는 직영 벌채량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벌채 수익을 중앙 재정에 직접 편입할 수 있는 체계를 확보한 뒤, 이를 본격적인 재정 수익 사업으로 활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벌채 계획은 과학적 임상조사에 기반한 지속 가능한 임업 경영과는 거리가 멀었다. 입목량 산정은 대부분 '목측 개산(目測槪算)' 방식, 즉 육안에 의존한 추정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로 인해 계획된 생산량과 실제 생산량 사이에 괴리가 자주 발생하였다. 벌채 이후 조림 사업도 체계적으로 시행되지 않아, 산림 생태계의 황폐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다시 말해, 조선총독부의 산림경영은 단기적 수익 극대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장기적 자원 보존이라는 임업의 기본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었던 것이다.
 
1923년의 관동대지진은 조선 산림정책의 또 다른 전환점을 형성하였다. 일본 본토의 대규모 재해 복구를 위해 목재 수요가 급증하자, 조선총독부는 영림창이 보관 중이던 원목을 일본으로 긴급 수출하고, 동시에 대규모 벌채 작업에 착수하였다. 총독부는 각 산지에 제재소를 긴급 배치하고, 단 2주 만에 4만㎥ 이상의 제재목을 생산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 사례는 영림창의 조직과 물류체계가 제국 본국의 위기 상황에 즉각 반응할 수 있도록 운영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긴급 동원은 조선 내부의 목재 수급 체계를 심각하게 교란시켰다. 단기적으로는 본국 수요에 대응했으나, 이후 조선 사회에서는 장기간에 걸친 목재 부족 현상이 구조화되었다. 이와 더불어 무분별한 벌채는 산림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을 심각하게 훼손하였으며, 총독부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일부 내부 문서에서는 임상조사의 부재와 수익 일변도의 운영방식이 지속 가능한 산림경영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반성적 평가가 등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의 산림정책은 여전히 수익 중심의 기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운영되었다.
 
 
3. 조림은 부실했고, 책임은 지방으로
 
표 2. 관업수입 및 영림창의 세출입 결산(1916~1925)
출처: 大藏省, 1998『明治大正財政史』1,湘南堂書店, 851-893쪽
 
 
재정 확충을 위한 「조선삼림특별회계법」 폐지 이후, 영림창의 사업은 수익 창출 위주로 급격히 전환되었다. 실제로 1916년부터 1925년까지 영림창의 평균 연간 수익은 약 74만 6천 원으로, 동기간 총독부 전체 관업수입 대비 평균 10.5%를 차지하였다. 이는 평양광업소, 전매사업(소금, 연초, 인삼), 철도사업 등과 함께 영림창이 총독부 재정 기반을 구성하는 주요 수입원 중 하나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영림창 수익의 증가는 곧 벌채량의 증가를 의미하며, 이는 조선총독부가 산림자원의 질적·양적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재정 수익을 우선시했다는 점을 드러낸다.
 
당시 조선의 요존 국유림 정보당 평균 입목축적은 32.5㎥에 불과하였으며, 이는 조선의 산림이 상대적으로 우량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풍부한 자원 상태가 아니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적절한 조림정책이 병행되지 않는 지속적 벌채는 필연적으로 자원 고갈과 산림 황폐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총독부는 이 시점에서 영림창의 수익 증대와 병행하여 산림자원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체계적인 조림정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산림 수익이 급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상응하는 조림과 복구 정책은 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벌채지에서는 인공 조림이 아닌, 이른바 '천연갱신'이라는 이름으로 방치되었고, 조림 의무는 사실상 형식적으로만 존재하였다.
 
민유림의 경우 조선총독부는 간헐적으로 인공조림의 필요성과 재정적 수요를 제기하였으나, 실제 실행에는 소극적이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총독부가 제출한 조림계획에 따르면, 민유림 무입목지의 인공조림을 위해 약 1억 5천만 원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산정되었지만, 실제로 확보된 예산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더욱이 이 비용조차도 중앙정부 차원이 아닌 지방 도당국의 재정 부담으로 전가되는 구조였다.
 
즉, 총독부는 국유림의 수익은 중앙에서 회수하면서도, 조림과 산림 복구에 필요한 재정적 책임은 지역 사회에 떠넘기는 이중구조를 고착시켰다. 민유림에 대한 복구책임 또한 대부분 도 단위에서 담당해야 했으며, 이는 지방 재정의 압박과 행정적 부담으로 직결되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총독부의 산림정책은 조림과 유지 관리를 전면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으로 접근하지 않았으며, 재정 독립계획의 일환으로 수익 확보만을 목표로 삼았던 전형적인 식민지 행정의 작동 방식—즉 “이익은 제국이, 부담은 식민지 주민이 지는” 구조—를 산림 행정에서도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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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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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駐箚軍經理部, 1914 『朝鮮駐箚軍永久兵營・官衛及宿舍建築經過槪要』
朝鮮總督府 殖産局, 1922 『朝鮮の林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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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山林会, 1933 『朝鮮林業逸誌』
 
2.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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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학술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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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 2024 「일제의 한국삼림특별회계법 제정 배경과 영림창 운영의 성격(1905~1910)」 『도시연구』 36
박우현, 2019 「1920년대 조선사업공채 정책 변화와 재원조달의 부실화」 『한국사연구』 185
배재수・김태현, 2021 「일제강점기 조선의 목재수급과 산림자원의 변화 : 빈약한 산림자원, 과도한 용재생산」 『아세아연구』 64
이형식, 2011 「무단통치 초기(1910.10~1914.4)의 총독부」 『일본역사연구』 33
 
4. 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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