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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한양의 옛사람과 풍류 ①_김성희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5.02 BoardLang.text_hits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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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4월(통권 62호)

[기획연재
 
 

옛 서울의 주거와 풍류의 흔적을 찾아서 1화

 
 


김성희(중세2분과)

 
 
 
‘다시’ 연재를 시작하며
 
 
새롭게 기획연재를 맡아 글을 시작하면서 ‘다시’ 연재를 시작한다고 말씀드리니, 의아하게 여기실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지난 2012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골목길에서 만난 역사」라는 제목의 글을 웹진에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경복궁 서쪽, 사직단 뒤쪽의 인왕산 자락에서 시작하여 백악산과 낙산을 거쳐 옛 서울을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여유롭게 돌아보고, 남산골에 이르기까지” 골목골목에 깃든 선인의 흔적과 시간의 자취를 더듬어 보겠다고 호기롭게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족한 능력과 의지를 절감하며, 결국 인왕산 자락을 맴돌다 연재를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그 일은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후 언젠가는 이 마음의 빚을 갚겠다고 다짐하며,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의 삶의 자취를 따라 현장을 찾고 사료를 들춰보았습니다. 그렇게 마주한 유서 깊은 도시의 둘레에는 예나 지금이나 많은 이들이 휴식과 여유를 누리던 공간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울창한 산자락의 수목과 그 사이를 흐르던 맑은 시냇물, 시원하게 불어오던 바람과 그 바람이 머물던 바위들은 꼭 예전과 같은 모습은 아닐지라도, 그곳에 살았던 선인들의 자취는 놀랍도록 질기게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그동안 이렇게 만나온 옛 사람들의 흔적을 이야기로 풀어내어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이들과 나누기도 했고, 그 대화의 기록들이 여러 조각의 지면이나 영상 속에 담겨 새로운 조우를 기다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제는 그렇게 흩어져 있던 이야기들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결을 갖춘 글로 다듬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첫걸음은 남산으로 향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의 하루는 숨 가쁘게 흘러갑니다. 우리는 각자의 치열한 일상 끝에 지친 심신을 위로받고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휴식과 여유를 찾아 나섭니다. 선인들이 거닐던 공간을 따라가며 풀어내는 제 이야기가 독자 여러분께도 잠깐의 휴식과 여유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산 자락의 조선시대 주거와 풍류의 흔적1)
 
 
산 속의 흰 널문짝 홀로 쓸쓸한데 山裏蕭然白板扉
작은 시내 내린 비에 풀들이 무성하다 小溪新雨草菲菲
앉아서 한 조각 석양빛을 보노라니 坐看一片斜陽色
살짝 물든 푸른 이끼 나그네 옷에 비치네 輕染蒼苔照客衣
 
맑은 낮 산중 누각 뜰에 한가득 객들이 淸晝山樓客滿庭
따수운 햇살 잔바람 맞으며 파란 과녁에 활을 쏘네 輕風煖日射帿靑
떼 고운 마당은 삼청동에 못지않고 莎場不讓三淸洞
솔바람은 도리어 백호정보다 낫다오 松籟還勝白虎亭

- 정약용 <어느 여름날 누산정사에서 지은 잡시[夏日樓山雜詩]> 부분
 
 
위에 인용한 시는 20대 초반, 남산 자락 호현방(好賢坊)에 거주하던 정약용 선생이 자택 주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그가 그려낸 남산의 여름 풍경은 한양의 이름난 명승지와 견주어도 오히려 모자람이 없는 듯하다. 고운 잔디 위로 풍류객이 오가고, 시원한 솔바람이 불어오던 푸르른 산자락. 도성 사람들의 삶과 휴식의 터전이 되어주던 그 너른 품을, 오늘 우리는 얼마나 또렷이 기억하고 있을까?
 
 
그림 1. 정선, 「목면조돈(木覓朝暾)」(1741)
출처: 간송미술관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는 물론, 우리나라 사람 누구에게든 남산은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남산이 차지하는 자리는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바쁜 도시의 일상에 쫓겨 어두운 터널로 지나고 마는 이 초록 섬은, 식민화의 바람으로 고유의 풍정을 잃기 시작하더니, 이내 밀려온 도시화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차츰 우리의 삶과 멀어지고 말았다. 한때 푸르게 빛나던 선인의 자취는 이제 오래된 그림과 빛바랜 사진 속에 갇혀버렸고, 가까스로 소멸을 면한 옛 기억들조차 차가운 콘크리트 숲 속에 근근이 세 들어 살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렇게 오래도록 잊고 지낸 남산의 너른 품에, 이제 조심스레 한 걸음 내디뎌 보려 한다.
 
 
그림 2. 남산에 오르다 마주친 소담스러운 꽃
 
 
한양 도성의 앞산, 남산
 
한양은 백악산·인왕산·목멱산·낙산이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분지형 도시이다. 도성 내부의 지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면서 완만히 낮아지는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그 고저를 따라  청계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그림 3. 「조선성시도」(1830)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18세기 중반경 한양의 인구는 19만 명 남짓이었던 것으로 추산되는데, 그 많은 사람이 다 어디에 살았을지 문득 궁금증이 인다. 이즈음 한양 거주민이었던 정약용 선생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생활하는 방도는 마땅히 먼저 물길과 땔나뭇길을 살펴보고, 다음은 오곡, 다음은 풍속, 다음은 산천의 경치 등을 살펴야 한다.
 
- 정약용 <택리지에 발함[跋擇里志]> 부분
 
 
선생은 『택리지(擇里志)』에 붙인 발문을 통해 사람이 살 만한 곳의 조건에 대하여 논한 바 있다. 그 말대로 도성 안에서 먹거리와 물, 땔감을 구하기 쉽고, 풍속과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면 곧 선생이 깃들어 살던 남산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남산은 고도가 280m 남짓으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깊은 계곡에 울창한 수림으로 풍광이 좋았으며, 산마루에 오르면 도성과 한강을 두루 조망할 수 있는 명승으로 꼽혔다. 일찍부터 그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시가 두루 읊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남산에 앉아서 보니 층층 성이 드높은데 南山坐對層城高
어구 가의 수양버들 홍교 위를 스치누나 御溝楊柳拂虹橋
상원 속에 핀 꽃에는 붉은 노을 무르녹고 上苑花發蒸紅霞
태액의 잔잔한 물결 포도빛으로 넘실대네 太液波暖漲葡萄
큰 집들은 구름 닿고 봄은 언덕 가득한데 甲第連雲春滿塢
동풍은 부슬부슬 가랑비를 불어 보내누나 東風吹送如酥雨
천만 가지 꽃들 모두 고운 자태 머금어서 千紅萬紫總含姿
어서 오라 마루의 북 칠 필요가 전혀 없네 相催不用臨軒鼓
 
-이승소 <목멱산 꽃구경[木覓賞花]>
 
 
애써 재촉하지 않아도 상춘객의 발길이 향하던 아름다운 남산에는, 그 수려한 경관에 이끌린 많은 이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 특히 동서로 길게 펼쳐진 남산의 북쪽 자락은 청계천 이북의 북촌과 서촌에 대응되어 ‘남촌’으로 불렸다. 남촌에는 흔히 가난한 선비들이 주로 살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유력 가문의 주거도 이 일대에 많이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현재의 중구 필동과 회현동 일대는 양지바르고 경치가 수려하여 예로부터 훌륭한 주거지이자 문화공간으로 주목 받았으며, 문인들이 교유를 나누던 아름다운 누정(樓亭)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앞서 정약용 선생이 찬미했던 회현방의 아름다움은, 이처럼 살기 좋았던 남산 자락의 옛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기억의 조각이라 할 수 있다.
 
 
그림 4. 「도성도(都城圖)」(1776) 남산 부분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남산의 공원화, 그 고된 변화의 시작
 
천만 송이 꽃들이 고운 자태를 뽐내던 남산은, 근대의 격변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남산의 공원화는 그 고유한 모습을 하나둘 앗아가기 시작했다. 1897년, 일본 거류민들이 남산 북쪽 자락 일부를 임차해 ‘왜성대공원’을 조성한 것을 시작으로, 예장동과 회현동 일대가 점차 잠식되었고, 종국에는 남산 전체가 공원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임차를 통한 공원화’라는 외양은 실상 점거와 파괴의 수단에 불과했다.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되면서 남산에 대한 일본인의 점유는 점점 파괴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으며, 남산 동쪽 자락에 자리잡은 장충단獎忠壇은 그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말았다.
 
 
그림 5. 좌측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장충단공원‧파고다공원‧남산‧남산공원의 모습
출처: Taisho Hato에서 발행한『경성명소백경(京城名所百景)』우편엽서첩
 
 
서울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를 나서면 곧바로 만나게 되는 장충단공원은 대한제국 시기 국가를 위해 목숨을 잃은 이들의 제향祭享을 위해 건립한 장충단이 있던 자리이다. ‘단(壇)’은 흙이나 돌로 평지보다 높이 쌓아 올려 제사나 의식을 지내는 곳을 뜻하는데, ‘사직단(社稷壇)’이나 ‘원구단(圜丘壇)’ 또는 ‘대보단(大報壇)’과 같이 조선시대에는 특정한 목적을 가진 제향 공간으로서 단을 설립하였던 예가 많이 보인다.
 
 
   
그림 6. 「경성유람안내도」(1920년대 후반)에 묘사된 장충단 일대의 모습.
아래 부분 사진 중앙에 표기된 '운동장'이라는 명칭은 장충단공원에 만들어진 원형 경기장을 일컫는다.
지금의 장충체육관 자리에 해당하며, 엄복동의 자전거 경주도 이곳에서 벌어진 적이 있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그림 7. 『半島の翠綠』 (朝鮮山林會, 1926)에 수록된 장충단공원 전경. 사진 우상단에 원형의 장충단공원 운동장이 보인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남산 동쪽 기슭의 이 너른 마당은 본래 어영청(御營廳)의 분원인 남소영(南小營)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오개혁 시기 어영청의 폐지와 함께 남소영도 사라지고, 대신 1900년 10월 27일 고종황제의 명에 따라 을미사변으로 순절한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 1841~1895)과 훈련대장 홍계훈(洪啓薰, ? ~ 1895) 이하 장병, 그리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당시 순직한 이들을 위한 제단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그림 8. 김홍도,「남소영도」(18세기)
출처: 고려대학교 박물관
 
 
1900년은 명성황후의 5주기이자, 생전 나이로 만50이 되는 해였다. 이러한 사실을 되뇌며 깊은 슬픔을 토로하기도 하였던 고종은 궁궐에 침입한 일인들로부터 황후를 지키려다 희생된 충신들을 위해 성역화된 제향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은연중 명성황후에 대한 그리움과 추모의 심정을 남산 자락에 아로새기려 했던 것이다.2)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 역시 장충단비의 글씨를 직접 적어 모후를 기리고자 하였다.
 
 
그림 9. 장충단비
출처: 서울역사편찬원
 
 
원래 장충단의 권역은 현재 공원의 담장을 훌쩍 넘어 국립극장과 신라호텔 부근까지를 아우르는 넓은 규모였다. 신라호텔 자리에 제단이 있었고, 장충단비와 비각을 비롯한 여러 부속 건물들이 그 주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림 10. 옛 장충단의 부속 건물
좌측 사진은 장무당, 우측 사진은 장무당과 양위헌
출처: 박희용, 2016 「대한제국기 남산과 장충단(奬忠壇)」『서울학연구』65, 65쪽
 
 
그러나 1908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은 이후, 장충단 제사는 1909년 10월 15일 제향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중단되었다. 나라를 위한 충절과 항일 정신을 기리는 의식이 식민권력의 심기를 거스른 탓이었으리라. 이어 같은 해 11월 4일,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이 장충단에서 치러졌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침탈한 일제는 아예 장충단비를 뽑아내어 버리고, 부속 건물을 해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건한 추모의 공간이었던 장충단 경내에는 벚나무 수천 그루가 이식되고, 연못, 놀이터, 산책로 등이 만들어지며 완연한 행락지로 변모해버렸다. 이즈음 일본인들의 꽃놀이 장소로 전락해버린 창경궁의 안타까운 상황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림 11. 장충단공원 벚꽃 사진 엽서
꽃구경 나온 상춘객들의 모습과 사진 오른편의 '사쿠라맥주' 광고판을 통해 휴식 공간으로 전락한 장충단의 실태가 엿보인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이에 더해 일제는 상하이사변 당시 전사한 일본군 병사의 동상을 장충단공원에 세웠고,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인 박문사(博文寺)를 장충단 제단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건립하였다. 이 박문사의 건축에는 광화문의 석재와 선원전 건물 등 경복궁을 파괴하면서 확보한 부자재가 사용되었으며, 경희궁 흥화문을 통째로 옮겨와 정문으로 삼기도 하였다. 조선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들을 파괴하려는 일제의 시도는 이처럼 수십 년에 걸쳐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완수되었다.
 
 
그림 12. 1935년 전후에 촬영된 장충단공원과 박문사 일대 전경
오른쪽 언덕 위의 건물은 1932년 10월 26일에 낙성된 춘무산(春畝山) 박문사(博文寺) 본당이다.
사진 왼편에 보이는 대문은 1932년 4월에 이곳으로 이전된 경희궁 흥화문(興化門)으로, 박문사의 총문(總門) '경춘문(慶春門)'으로 사용되었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비록 광복 이후 박문사 등 장충단 부지에 일제가 지은 건물과 기념물들이 모두 철거되었지만, 이후 그 빈자리에 체육관과 극장, 호텔과 정치 단체의 건물 등이 들어서면서 장충단의 원래 면모를 회복할 기회는 영영 상실되고 말았다. 지금은 장충단비만이 덩그러니 남아 이 공간에 서린 본연의 정신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2000년대 후반 공원 정비 사업으로 경내에 있던 주점 등 행락 시설과 운동시설을 철거하고 주변 수목을 정비함으로써 차분한 추모의 기운이 다소간 회복될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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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본 원고는 2021년 서울역사편찬원에서 간행한 『서울 역사 답사기』 5에 수록된 필자의 글을 저본으로 하여 내용을 보완한 것이다.     
2)『고종실록』권40, 고종 37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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