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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마을에서 역사하기 ①_박수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5.01 BoardLang.text_hits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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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4월(통권 62호)

[기획연재
 
 

마을에서 역사하기를 시작하며 1화

 
 


박수진(고대사분과)

 
 
 
1. 대학원에서 직장인으로 가는 과정
 
나는 한국고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지금도 공부를 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던 내가 어쩌다 ‘마을에서 역사하기’를 쓰게 된 것일까. 이것은 그 이야기이다.
 
가장 큰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현실적이고 당연한 이유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 대학원 시절을 잠깐 돌이켜보자. 나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학부와는 다른 학교의 대학원을 진학했는데, 진학한 학교의 사학과가 내가 진학하던 해에 BK21사업에 선정이 됐다. 때문에 나는 다른 학교 대학원생보다 비교적 덜한 노력으로 많지는 않더라도 일종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석사과정 시절 대학원 생활은 늘 쪼들리는 생활이었지만, 남들도 다 그런 생활을 하는 것 같아 보여 잘 버텼다.
 
석사 과정을 마친 이후 운이 좋게도 대학에 있는 박물관에서 2년 동안 조교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내 평생 처음으로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본 것이 이때였다. 역시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8시간을 꼬박 근무할 수 있어서 다른 조교들에 비해 많이 벌었던 것 같다. 조교를 하면서 석사 논문도 마칠 수 있었다.
 
문제는 박사과정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이 끊기는 경험은 예상 했음에도 힘든 경험이었다. 첫 학기 등록금은 모은 돈으로 간신히 충당했지만 이후의 수입은 보장할 수 없었다. 미래도 처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대학에 취직을 한다’는 생각은 너무 먼 이야기였다. 박사 논문을 언제 마무리할 지도 까마득했다(결국 아직도 못 쓰고 있다).
 
처음으로 선배들에게 ‘어렵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그 말 한 마디가 뭐라고 처음에는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는데, 막상 하고 나니 많은 선배들이 도와줘서 여기저기서 주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때는 모든 것이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역사학과 관련 없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료 연구자들도 있었고, 나도 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성북문화원이다.
 
성북문화원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한 선배가 말을 해줬다. 문화원? 성북구? 모두 생소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조금만 가면 있는 곳이 성북구인데 간송미술관과 길상사를 가본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성북구에 대해 자료를 좀 찾아 봤는데 고대사에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원하지 말까?’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역사와 관련이 있긴 했지만, 한 지역만을 두고 공부한다는 것은 왠지 편협하게 느껴졌고, 시대조차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결국 지원을 했다. 그때는 ‘잠시만 일하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자’라는 생각이었다. 운 좋게 채용이 되었다. 그 전까지 연구 인력이 없었기 때문에, 바로 ‘향토사 연구팀’의 팀원 없는 팀장을 맡았다. 2013년 3월의 일이었다. 팀원이 충원된 것은 두 달 후의 일이었다.
 
 
2. 마을에서 역사를 하며 느낀 과제
 
처음 담당한 업무는 선잠제와 선잠단지에 관한 것이었다. 모두 생소했다. 아니, 사실 처음 들어봤다. 자료를 처음부터 찾기 시작했다. 처음은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다음은 각종 논문들과 관련 책자.. 배운 게 이런 식으로 자료를 찾는 것이라 과정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언제 제사를 지내고, 어떻게 지내는 지, 어떤 음악을 사용하는 지 등등을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선잠제향 혹은 향선잠의(享先蠶儀)라고 불리는 이 제사는 1908년 신주가 사직단으로 옮겨지며 폐지되었고, 199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주민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주민들이 복원을 하자, 성북구청도 함께 지원해서 제사를 치르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문제는 어떠한 고증도 없이 이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선잠에게 제사 지내는 의식은 황후가 주관했는데, 조선에서는 그런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복원된 선잠제에서는 왕비가 당당히 선잠단지까지 행차를 하고 있었다. 성북동 주민들이 중심이 된 ‘선잠제보존위원회’가 있었지만 전문적인 제례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럴 기회와 여건도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제사는 종묘제례를 주관하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주관했다. 그냥 선잠단지에서 선잠제향을 치르는 것으로만 의미를 계승하고 있었다.
 
이것도 훌륭한 일이었지만, 이때 처음으로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선잠제향을 제대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산을 주는 성북구청부터 만났다. 그리고 곧 어떤 ‘행사’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 됐다. 먼저 문제가 된 왕비의 행차는 고증을 떠나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예산을 써서 진행하는 행사이기 때문에, 의미를 살리는 만큼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도 중요했다. 행렬에 왕비가 있는 것은 주목을 끌기에 좋은 요소였다. 기록이 남아 있다고는 하나 당장 제사를 복원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조선 시대의 의례 전문가도 아니었고, 안다고 해도 그것을 재현해 내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기존에 해오던 관성을 깨는 것이 어려웠다. ‘선잠제보존위원회’의 분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제례를 다시 살려내서 유지해 온 만큼 지금의 방식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것을 ‘잘못되었다’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
 
 
그림 1. 2013년 선잠제향 중 제례
 
그림 2. 2013년 선잠제향 중 왕비행차
 
 
결국 오랜 논의 끝에 왕비의 행차는 그래도 두되 왕비는 선잠단지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했다. 제사의 방식은 기존과 같이 하기로 했고, 선잠보존위원회의 역할도 건드리지 않았다. 더욱이 행사를 진행하며 선잠보존위원회야 말로 선잠제향에 대한 애정이 많아 더 나은 방식, 더 정확한 방식으로 제향이 진행된다면 얼마든 기존의 방식을 수정할 용의가 있음을 알게 되기도 했다.
※ 선잠제향 복원은 그로부터 10년이 넘게 진행된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 10년 간 선잠단지가 발굴·복원되었고, 선잠박물관도 생겼다.
제사의 절차는 여러 번의 학술회의로 꽤 명확하게 복원되었으며, 음악 역시 복원되었다. 10년이 넘는 이제야 복원에 조금 가까워진 것이다.
다음으로 한 것은 서울시 보조금 사업을 따와서 진행하는 일이었다. 사업의 이름은 ‘서울시 동네 관광 상품.’ 서울시의 보조금을 받아 각 지역의 한 개 지역에 대해 관광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사업은 내가 일하는 성북문화원과 2012년 9월에 출범한 성북문화재단과 함께 진행했다. 나도 처음, 문화재단도 막 출범한 상황에서 시작된 일이었으니 좌우충돌을 하며 일을 진행했다. 당시 우리가 담당한 지역은 정릉과 의릉 두 조선왕릉이 있는 곳이었다. 자료조사를 정리한 ‘이야기자원 모음집’ 그 모음집을 바탕으로 한 책자발간(『동소문 밖 능말 이야기』(성북문화원, 2013), 정릉과 흥천사에 각각 서로를 소개한 안내판 설치, 탐방, 탐방코스 개발 등 다양한 일들을 실시했다.
 
모두 처음 하는 일이라 낯설고 힘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행정이었다. 박물관에 있을 때도, BK21 사업에서도, 각종 알바를 할 때도 나는 행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모두 내 일이었다. 예산을 짜는 것, 집행하는 것, 무엇을 구입하거나 결제 할 때마다 지출결의서를 만들어 영수증을 첨부해 서류를 만드는 것 등등 모든 것이 힘들었다. 이제야 말할 수 있지만 솔직하게 이런 행정이 그때까지는 ‘쉬운 일’ 혹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혹은 ‘덜 중요한 일’로 생각했다. 하지만 세금을 쓰는 일은 절차를 지켜야하는 것이 당연했다. 때론 과하고 불필요한 부분까지 요구하는 것 같아도 절차에 맞게 일을 돌아가게 하는 것도 행정이었다. 그럼에도 행정이 중요한 것을 느낀 것은 시간이 더 지나서의 일이었다. 
 
마을에서 역사를 하기 위해서 벌써 두 가지 과제가 생겼다. 고증과 관례가 부딪칠 때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행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의 마을에서 역사하기는 이렇게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