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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역사학과 민주주의_김정인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5.01 BoardLang.text_hits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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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4월(통권 62호)

[『역사와 현실』135호 시론] 
 
 

역사학과 민주주의

 
 


김정인(현대사분과)

 
 
 
12.3 계엄 이래 매일 민주주의를 성찰하고 파시즘 혹은 극우화를 우려하며 얼어붙은 마음으로 봄을 맞았다. 민주주의 잣대로 보면 한국 근현대사는 식민권력과 군사 권력의 독재에 맞선 민주주의 운동의 역사다. 그렇게 반독재운동으로 민주화를 성취하고 이제는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일구었다고 자부하던 2024년 겨울, 계엄의 밤을 맞으며 다시 민주주의는 기로에 섰다. 민주주의를 곱씹으며 해방 이후 역사학1) 이 민주주의와 함께 걸어온 '과거'라는 길을 짚어본다. 지금 여기,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한 발 내딛고 싶을 때 일기장을 펼쳐 보듯이 과거의 힘, 역사의 힘에 기대어본다.
 
 
1. 역사로서의 민주주의

해방 이후 역사학은 민주주의를 어떻게 역사화했을까. 첫 시도는 1947년에 『조선화폐고』를 발간했던 유자후에 의해 이뤄졌다. 그는 1949년에 고대부터 근대까지 한국사를 대상으로 한 민주주의 통사인 『조선민주사상사』를 발간했다. 이 책은 홍익 인간주의로부터 출발해 민본 민주 사상의 기원과 흐름, 각 시대 반정(反正) 운동의 민본사상과 민주 정신, 그리고 민주제도 등을 다루며 민주주의의 한국사적 계보를 구축했다.2) 그리고 이후 40여 년의 독재 시대에 역사학에서는 민주주의가 아닌 민족주의의 역사화가 주를 이뤘다.

4.19 직후의 통일운동과 1965년 한일 협정 체결로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역사학은 민족주의의 역사화에 나섰다. 식민주의사학과 문헌고증사학을 비판하며 내재적 발전론을 제기했다. 민주주의는 민족주의 역사에 내재한 논리이자 실천으로 다뤄졌다. 조지훈은 1964년에 발간한 『민족운동사』에서 3·1운동을 초계급적·전민족적 연합운동이자 민족자결주의라는 국제 민주주의에 근거한 비폭력 시위 항쟁이라고 평가했다.3) 민족운동의 내적 논리로서 민주주의를 언급한 선구적 연구였다.

강만길은 분단적 역사 인식을 비판하며 통일 민족 국가 수립을 일차적 과제로 삼는 통일민족주의 역사학을 제창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민족운동의 시기 구분을 위한 잣대로 활용했다. 즉 민족운동의 계보를 조선말·대한제국기의 민주주의 운동과 반외세 운동, 일제 시기의 민주주의 운동과 항일운동, 해방 후 분단 시대의 민주주의 운동과 민족통일 운동으로 정리했다.4) 서중석도 통일로 나아가는 민족적 정체성을 일깨우는 역할에 충실한 통일 민족주의 역사학을 지향했다. 그는 제도사의 측면에서 민주주의를 역사화했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제시한 이래 한국인 사이에서 민주정체에 대한 다양한 관심이 표출되었던 사실에 주목했다. 또한, 해방 후 민주주의 역사를 선거제를 중심으로 살피면서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야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갖추어졌다고 주장했다.5)
 
통일민족주의 역사학과 함께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민중적 민족주의 역사학도 제기되었다. 민중적 민족주의 역사학에서도 민주주의의 역사화가 부차적이지만 조명을 받았다. 이만열은 민중 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사관의 정립을 주장하며 한국 민중의 해방 과정이 곧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이라고 규정했다.6)

이처럼 독재 시대에 민주주의는 민족주의 역사학에 의해 역사화되었다. 그리고 6월 항쟁이 한창이던 1987년 6월 25일 서강대 동아문화연구소는 '아세아에서의 민주주의 수용'이라는 주제로 국제 학술회의를 열었다.7) 한국 민주주의 역사와 관련해서는 「한국에 있어서의 민주주의의 수용(이광린)」, 「한국 신문을 통해서 본 민주주의 가치 수용(유재천)」, 「민족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 한국의 경우(서대숙)」, 「해방 전후 시기에 활동한 우파 정치지도자들의 자유민주주의 수용과정과 정치활동 : 이승만, 신흥우, 김구의 경우에 대한 하나의 소묘(김학준)」, 「한국 사회에서 서구민주주의 가치가 미친 영향(이만갑)」, 「한국 전통 가치 의식과 서구민주주의(김태길)」 등의 주제로 당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중진 학자들이 발표했다.
 
역사학에서 민주주의의 역사화는 2000년대에 들어와서 본격화되었다. 역사학 밖으로부터의 자극도 민주주의 역사 연구를 고무했다. 먼저 사회과학에서 근대 민주주의 성립기를 다룬 『독립협회, 토론공화국을 꿈꾸다』, 『1898, 문명의 전환』 등의 저서와 다수 논문이 생산되었다.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해방 이후 민주화운동 역사를 정리한 『한국민주화운동사』를 내놓았는데 역사학자들이 집필에 참여했다.9) 한편, 역사학에서의 민주주의의 역사화에는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첫째 민족주의 역사학의 자장 안에서 민족운동에 대한 민주주의적 해석이 본격화되었다. 박찬승은 독립운동이 민족의 독립만이 아니라 자유평등민주 등의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면서 전개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민주라는 가치지향, 즉 주권재민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독립운동 진영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평가했다.10) 둘째 소장 역사학자들은 집단 혹은 개인의 민주주의론을 분석하면서 민주주의의 역사화를 시도했다. 이태훈은 민주주의가 한국 근현대 정치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임에도 식민지기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다는 문제의식에서 1920년대 초반 신지식인층의 민주주의론을 검토했다.11) 홍정완은 해방 직후 사회철학자인 한치진이 펼친 민주주의론을 분석했다.12) 이상록은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도 비판과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정치세력, 혹은 지식인 집단 간의 민주주의론의 차이와 공통점을 드러내는 연구를 진행했다.13)

2012년에는 역사학대회가 '역사 속의 민주주의'를 주제로 열려 이틀 동안 동서양의 민주주의의 역사를 다뤘다. 이 무렵부터 민주주의 역사에 대한 연구와 함께 민주주의적 시각, 즉 민주주의적 사관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재구성하는 흐름도 나타났다. 졸저인 한국 민주주의 3부작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2015),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2017), 『모두의 민주주의』(2025) 역시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해석했다. 그런데 해방 직후 유자후가 한국사 전체를 대상으로 민주주의 역사를 재구성했던 작업에 대한 평가 및 대안적 연구성과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앞으로 민족주의 사관이 오래도록 지배했던 역사학에서 민주주의 사관의 범주와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개진되기를 기대해 본다.
 
 
2.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역사학에서 민주주의는 역사화의 대상으로만 다뤄진 것이 아니었다. 역사학은 1980년대부터 역사운동을 통해 민주화 시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민주주의 공고화를 일궈냈다. 한국 근대역사학은 역사운동 과정에서 성립되었다. 조선말기·대한제국기에 시작된 애국적 역사운동은 국민 의식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망 이후에도 역사운동은 계속되었다. 박은식과 신채호의 활약은 그 자체가 역사운동이자 민족운동이었고 전통 역사학을 계승·발전시킨 근대역사학의 정립을 의미했다. 백남운은 일원론적 역사 발전과 역사의 합법칙성에 입각해 한국사를 정리하여 연구 수준을 고양했다. 이러한 역사운동의 전통은 해방 직후 신민족주의 신민주주의 역사학자들의 역사 연구와 현실 참여를 통해 계승되었다. 하지만, 문헌 고증 사학이 부상하면서 역사학의 과거 청산은 좌절했고 역사운동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역사운동은 1980년대에 민중사학의 등장과 함께 부활했다. 그 근저에는 5.18이 자리하고 있었다. 5.18은 역사학을 '어떤 눈으로 역사를 바라 봐야 하고 지금 여기서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지'를 성찰하는 길로 이끌었다. 민중사학은 '역사 발전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선언적 명제에 기초하여 역사를 민중의 주체성이 확대되어가는 과정으로 해석하고, 이를 토대로 민중이 주인 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변혁의 전망을 모색하는 실천적인 역사학'을 지향했다.14) 소장 역사학자들은 민중사학을 제기하며 학술 운동에 뛰어들었다. 망원한국사연구실, 역사문제연구소, 한국근대사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 구로역사연구소 등의 연구소와 학회를 결성하고 역사 대중화 운동을 전개했다. 민중사학자들이 내놓은 첫 대중서인 『한국 민중사』(1987)는 출판사 대표가 구속되면서 필화사건을 일으킬 만큼 파장이 컸다. 이후 민중사학자들이 내놓은 대중서는 인기를 끌었고 대중 강좌에도 시민들이 몰렸다.
 
민주화 이후 역사학의 민주주의 운동으로서의 역사운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첫째, 민주화의 도정에서 이행기 정의의 실현으로서 요구되는 과거사 청산 운동을 전개했다. 먼저 정부가 조직한 과거사 청산 관련 위원회에 참여했다. 김대중 정부가 4.3사건과 의문사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역사학자들의 참여가 본격화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국정원, 국방부, 경찰청 등 권력기관에 민·관 합동으로 과거사위원회를 설립하고 정부 산하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을 설치했다. 이때 중진 역사학자들은 위원으로, 소장 역사학자들은 실무자로 참여했다.
 
한편, 시민운동가들과 함께 과거사 청산과 관련된 시민단체를 결성했다. 주로 일본의 식민 지배라는 과거사의 청산을 요구하는 역사운동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민주화와 함께 해방 직후 친일파 청산으로 좌절되었던 식민 지배의 잔재를 청산하는 운동이 역사운동의 중심에 섰던 것이다. 먼저 1991년에 친일 청산 운동 단체인 반민족문제연구소(현 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만 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한 시민단체로 성장해 시민의 성금으로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다. 2001년에는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해결을 위한 역사운동단체인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현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가 창립해 한중일 역사 대화를 추진했다. 매년 한중일 평화포럼과 한중일 청소년 캠프를 개최했고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를 결성해 『미래를 여는 역사』(2005),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사 근현대사』(2012), 『평화를 여는 역사』(2025, 근간) 등을 발간했다.
 
둘째, 역사학은 보수세력과 역사 전쟁을 치렀다. 2004년 광복절에 노무현 대통령이 과거사 청산의 의지를 밝히면서 역사 교과서를 전쟁터로 한 역사 전쟁이 본격화했다. 보수적 정치인과 언론, 그리고 뉴라이트 지식인들이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문제 삼았다. 이명박 정부는 교육과학기술부를 중심으로 직접 역사 전쟁의 도발자로 나섰다. 이에 역사학은 시민사회 및 언론과 연대해 강한 응집력으로 보수세력에 맞섰다. 역사학 관련 학회들은 역사학의 전문성 및 역사교육의 정치적 중립 보장을 요구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2011년 교육과정 개정 과정에서는 역사교육과정개발정책연구위원회가 마련한 교육과정에 명시된 '민주주의'를 교육과학기술부가 임의로 '자유민주주의'로 수정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반발하며 역사교육과정개발정책연구위원회에 참여한 역사학자와 역사 교사 24명 중 21명이 사퇴했다. 또한, 이명박 정부는 8월 15일을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로 기념하자는 건국절 논쟁을 야기했다. 역사학은 광복절이 해방과 정부 수립 모두를 기념하는 의미를 담아 제정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강하게 반발했다.

역사 전쟁은 박근혜 정부에서 절정을 맞았다. 2013년에는 1,000여 개가 넘는 오류와 친일·독재 미화로 논란이 된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가 교육부의 검정을 통과해 논란이 되었다. 결국 교학사 교과서가 채택률 0퍼센트대를 기록하자 2015년에는 청와대가 직접 나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나섰다. 이에 역사학은 기민하게 대응했다. 먼저 역사학 관련 학회·연구소와 시민단체 등 485개 단체가 한국사교과서 국정화저지네트워크를 결성했다. 역사교사 2,255명은 국정화 반대를 선언했다. 역사학자들은 전국적인 역사 교과서 집필 거부 선언으로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맞섰다. 그러자 청와대와 교육부는 극우 세력이 10월 30일 서울대에서 열린 역사학대회에 난입하도록 방조했다.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은 2016년에 드러난 국정농단사건의 전조였다. 국정 역사 교과서는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틀 만인 5월 12일에 대통령 지시로 폐기되었다.
 
이처럼 역사학은 학회와 연구소를 기반으로 혹은 시민단체를 결성해 민중사학의 제기와 역사 대중화 운동, 과거사 청산 운동, 역사 전쟁 등으로 이어진 역사운동을 펼쳤다. 그것은 민주화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공고화에 일조한 '실천적 역사학'의 구현 과정이었다.
 
 
3. 문화로서의 민주주의

역사학은 역사운동을 통해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소임에 충실했다. 동시에 역사학 '안'에서는 긴 독재의 시간 동안 견고한 아성을 쌓은 민족주의와 민족주의 역사학이 비판을 받는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이 일어났다. 비판은 역사학 밖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경제사학계가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창하며 민족주의 역사학의 침략과 저항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를 비판했다. 이영훈은 민족주의 역사학의 단일민족론이 강고한 도덕주의적 규범성을 갖고 있다고 비판했다.15) 역사학 내에서는 탈민족·탈근대론이 대두해 민족주의와 민족주의 역사학에 대한 비판에 나섰다. 임지현은 역사학은 물론 남북의 권력과 남한의 운동권 모두 종족 민족주의에 입론해 있다고 주장했다.16) 또한, 남한의 한국적 민주주의와 북한의 주체사상 모두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동원한 동원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고 비판했다.17) 윤해동은 해방 후 민족주의가 민주주의의 확장에 부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비판했다.18) 그리고 민주주의를 비롯한 모든 이념이 민족주의와 결합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에서 뿌리내리기 어려웠을 만큼 민족주의는 괴물이었다고 주장했다. 김기봉은 민족주의 역사학의 해체를 주장했다. 그는 식민과 분단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미완의 근대'로 설정하고 민족 문제의 해결을 근대의 완성으로 보는 통일민족주의의 폐기를 주장했다. 또한, '민족이라는 초역사적인 실체의 기억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이 국사'라며 국사의 해체를 제안했다.19) 민족주의 역사학이 민족 개념을 자의적으로 확대해석하고, 그를 바탕으로 전근대 시기부터 민족사의 허상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탈민족·탈근대론자들은 민족주의 역사학과 함께 1980년대에 제기된 민중사학도 비판했다. 민중사학이 '과학적·변혁적 민중론'이라는 규범성·도식성에 갇혀 민중의 실상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한 채 변혁을 지향하는 지식인이 염원하고 있던 민중상을 그려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민중을 계급 혹은 계급연합으로서의 변혁 주체가 아니라, 피지배층, 하층민, 사회적 약자, 소수자 등을 지시하는 개념, 즉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때로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모순을 느끼고 그것에 저항하는 존재로 정의한 '새로운 민중사'를 제안했다.20)

민족주의 역사학과 민중사학에 대한 비판은 곧 '역사학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임지현은 기존의 역사학은 권력의 편에서 역사로서 국민을 계몽하는 '권력의 역사학'이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역사학은 시민사회에 기반한 시민의 역사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1) 여기서 시민의 역사학이란 참여민주주의, 지역 자치운동, 페미니즘운동, 녹색운동, 평화운동 등 정치권력과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다양한 흐름의 시민운동과 접목하며 자신의 입지를 마련하는 역사학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임지현은 민족주의·민중주의를 역사학의 내용과 학자를 분별하는 '옳은 노선'으로 강요하며 그것의 정치화를 진보라고 여기는 역사학에 '문화혁명'을 요구했다.

이와 같은 민족주의 역사학과 민중주의 역사학에 대한 비판과 역사학의 민주화 요구는 기성 역사학의 학문 풍토에 대한 문화적 전환을 제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문화적 전환은 기성 역사학의 성찰이 아니라 1980년대에 소장 역사학자들이 민중사학을 제기한 것처럼 2010년대에 들어 소장 역사학자들이 일군 '신문화운동'을 통해 실현되었다. 그것은 역사 소비 시대를 맞아 역사학이라는 학문 영역 너머 대중과 직접 소통을 시도한 신문화운동으로 한 세대 만에 이뤄진 문화적 전환이었다.

역사 소비 시대를 맞아 소장 역사학자들은 대중의 역사 인식을 장악하고 있는 재야사학의 보수적이고 패권적인 민족주의 역사관을 여과없이 비판했다. 2015년 여름 소장 역사학자들은 '젊은 역사학자 모임'을 결성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6년에 역사학이 친일 식민사관, 즉 매국사관을 추종한다고 공격하는 재야사학 비판에 나섰다. 그들은 재야사학을 사이비 역사학'이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사이비 역사학'의 고대사 인식에서 오히려 식민사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2) 소장 역사학자들의 재야사학에 대한 비판은 1990년대 이래 역사학이 추구하는 다양한 방향성을 무시한 채 대중을 향해 오직 하나, 자신들의 사관만이 옳음을 강요하는 파시즘적 역사 인식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듬해 1월에는 2015년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운동으로 모였던 대학원생, 즉 소장 역사학자들이 만인만색 네트워크(power to the people, history to the people, 이하 만인만색)를 결성했다.23) 만인만색은 '역사 해석의 다양성과 역사 연구의 전문성을 동시에 지향하며 공론장을 통해 대안적인 연구와 교육을 펼치되, 인권과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방향에서 회원 모두가 차별받지 않는 권리를 누리며 다수결을 절대 원칙으로 삼지 않도록 운영'하는 네트워크 조직이었다. 또한, 만인만색은 다양한 역사 해석을 앞세운 팟캐스트 '만인만색 역사공作단'을 통해 대중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시도했다. 그해 12월에는 한국역사연구회의 스타트업사업단인 역사공장(Histofacto)이 출범했다. 역사공장은 역사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기획하고 생산해 대중과 공유하는 사업들을 추진했다.
 
그런데 2010년대 역사소비시대에 역사학이 마주해야 하는 대중 역사는 민족주의 사관을 절대시하는 보수성에 기반해 있고 시장 논리를 쫓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역사가 갖는 공공적·시민적 가치를 훼손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역사학과 대중 역사가 시민성 함양이라는 공동의 가치를 지향하며 함께 참여하는 공론장으로서의 시민 역사가 제안되었다.24) 그리고 때마침 역사학은 시민 역사의 시험대이자 지지대라 할 수 있는 공공역사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공공역사란 대학이나 연구소와 같은 전문 학술 공간을 넘어 사회의 다양한 공적인 삶에서 수행되는 역사 관련 활동과 실천을 가리킨다.25) 2024년 12월에는 본격적인 공공역사 연구와 활동을 추진할 공공역사협회가 발족했다.
 
이처럼 2010년대에 들어 역사학에서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수평적 역사 인식을 기반으로 새로운 세대가 역사학 안팎의 소통을 시도하는 신문화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 역사학은 그것의 영향 아래서 전방을 향해 직선으로만 달리는 것이 아니라 전방위로 달리는 역사학의 다채로운 '민주주의' 궤도를 건설 중이다. 그것은 역사학이 전문성을 무기로 역사를 독점하는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의미한다.
 
 
4. 지금 여기, 현재로서의 민주주의
 
해방 이후 역사학은 민주주의 역사를 연구하고 민주주의 운동을 추진했으며 지금은 역사학의 민주화라는 문화적 전환이 진행 중이다. 더불어 민주주의 관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해석하는 작업과 한국 민주주의 역사를 구축하는 연구도 전에 없이 활발하다. 만인만색이 출간한 『한뼘 한국사』에서 언급했듯이 '역사적 사실은 그것을 보는 거리, 각도, 위치에 따라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인물 군상의 모습에 돋보기를 대고 여러 측면을 이해'하는 역사 인식, 즉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역사 인식이 아니라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역사 인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역사학에서 민주주의는 연구의 관점이자 대상으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다.
 
그런데 12.3 계엄으로 민주주의가 기로에 서면서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계보가 유린당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탱했던 암묵지(暗 知)로서의 상식(common sense, 공통 지각)이 무너지고 있다. 사실(fact)와 허구(fiction)가 뒤엉킨 팩션(faction)이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에서 상영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지독한 확증편향 현상, 나와 우리 편이 무조건 옳다는 파시즘적 심리에 더해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는 계엄 세력을 목도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그들은 민주주의 언어를 절취해 자신들의 갑옷으로 사용하고 있다. 스스로를 '민주투사'라고 부르고 있고 서부법원 폭동을 '민주화 투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말의 오염'으로 민주주의 운동의 계보를 뒤엎을 수는 없다. 허구와 거짓에 기반한 선동을 일으키면서 '민주화'라는 개념을 전유하려는 계엄세력이야말로 독재 시대에 반공주의를 이념적 무기로 공권력을 동원한 폭력도 불사했던 극우·보수세력의 계승자들이다. 반면, 유신독재에 저항하면서 결집한 재야세력과 학생운동세력, 개발지상주의에 저항하며 성장한 민중운동 세력,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공고화를 일군 시민운동 세력이 정당, 민중 조직, 시민단체로 연대하며 반계엄세력을 형성하고 민주주의를 위기로부터 구하고자 분투하고 있다. 눈앞에서 진실보다 거짓이 득세하고 사실보다 허구가 판을 치는 위기적 현상이 빈발해도 그것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량은 지식인과 청년과 시민이 쌓아 올린 민주주의 운동의 '전통'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이 역사의 힘이고 과거의 힘이다. 이 담담한 진리를 소설가 한강은 문학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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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이 글에서 ‘역사학’은 주로 한국사학을 지칭한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사학 중에서도 민주주의를 다루는 만큼 한국 근현대사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 점을 염두에 둔 일독을 요청드린다. 이 글에는 필자가 쓴 논저들이 인용되어 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양해를 부탁드린다.
2) 김정인, 2013 「민주주의의 눈으로 본 역사학」『역사교육』126, 346쪽
3) 조지훈, 1964 『한국민족운동사』, (나남, 1993 재출간), 15쪽, 22쪽
4)  강만길, 1985 「4월 혁명의 민족사적 맥락」『한국민족운동사론』, 한길사, 74쪽
5) 서중석, 2008 『대한민국 선거이야기』, 역사비평사, 25쪽
6) 이만열, 1984 「민중의식 사관화의 시론」『한국민중론』, 214쪽
7)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과 토론은 서강대 동아문화연구소에서 펴낸 『동아연구』 12에 실려 있다.
8) 이황직, 2007 『독립협회, 토론공화국을 꿈꾸다-민주주의 실천 천 일의 기록』, 프로네시스; 전인권 외, 2011『1898, 문명의 전환』, 이학사
9)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2010『한국민주화운동사』 1·2·3, 돌베개
10) 박찬승, 2007 『민족주의의 시대』, 경인문화사, 51쪽
11) 이태훈, 2008 「1920년대 초 신지식인층의민주주의론과 그 성격」『역사와현실』67
12) 홍정완, 2010 「일제하-해방후 한치진(韓稚振)의 학문체계 정립과 ‘민주주의론’」『역사문제연구』24
13) 이상록, 2010 「1960-70년대 민주화운동 세력의 민주주의 담론」『역사와현실』 77; 이상록, 2010 「4․19민주항쟁 직후 한국 지식인들의 민주주의 인식」『사총』71
14) 김성보, 1991 「‘민중사학’ 아직도 유효한가」 『역사비평』 16, 49쪽
15) 이영훈, 2004 「민족사에서 문명사로의 전환을 위하여」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휴머니스트, 45~46쪽
16) 임지현, 1999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소나무, 83쪽
17) 임지현 외, 2000 『우리 안의 파시즘』, 삼인, 41~42쪽
18) 윤해동, 2010 『근대역사학의 황혼』, 책과함께, 210~212쪽
19) 김기봉, 2006 『역사를 통한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 푸른역사, 178쪽
20) 이용기, 2010 「‘새로운 민중사’의 지향과 현주소」『역사문제연구』 23, 16쪽
21) 임지현, 1999 「권력의 역사학에서 시민의 역사학으로」『역사비평』 46, 62쪽
22) 테이 정, 2018 「‘사이비사학’ 비판을 비판한다」『역사비평』 124(2018년 가을호), 456쪽
23)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2018 『한뼘 한국사』, 푸른역사, 4~5쪽
24) 김정인, 2019 「역사소비시대, 대중역사에서 시민역사로」『역사학보』 241, 29~30쪽
25) 이동기, 2016 「공공역사: 개념, 역사, 전망」『독일연구』 31, 1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