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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바다를 고대의 시선으로 ②] 영흥도선과 고대의 선박:고대인이 바다에 도전했던 방식_임동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5.31 BoardLang.text_hits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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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5월(통권 51호)

[고대의 바다를 고대의 시선으로] 
 

영흥도선과 고대의 선박

- 고대인이 바다에 도전했던 방식 -

 

임동민(고대사분과)

 
 

 

1. 들어가며

 
바다라는 구조는 현대의 과학기술로도 온전히 정복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환경이다. 그렇지만 고대인들은 교역, 어로, 외교, 전쟁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바다에 도전하였다. 도전의 방식은 배를 움직이는 항해술, 배를 건조하는 조선술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항해술은 자신이 타고 있는 선박의 위치를 바다 위에서 정확히 파악하고, 선박의 진행 방향을 따져서 원하는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기술이다. 선박의 위치와 진행 방향은 해양 과학, 환경, 지리 등 다양한 분야의 기초 지식을 토대로 파악하게 된다.1) 동아시아 역사 속의 항해술 발전단계는 원시항해술, 정량적항해술, 수학적항해술로 크게 구분하는데,2) 고대 동아시아의 항해술은 원시항해술 단계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다시 시인거리 연안항해-천문관측 대양항해 단계로 구분된다. 시인거리 연안항해는 육상의 지표물을 눈으로 보면서 항해하는 방식이다. 천문관측 대양항해는 하늘에 떠 있는 여러 천체를 통해 선박의 진행 방향을 파악해서 항해하는 방식이다. 

배를 만드는 기술은 선박에 싣는 화물의 종류나 무게, 선박의 용도, 재료의 식생환경 등에 따라 좌우되지만, 근본적으로는 항해술의 발전 과정과도 관련된다. 주로 연안항해에 나서는 지역이나 시기에서는 연안의 자연환경에 맞는 선박을 만들게 되고, 천문을 관측하여 시인거리를 벗어난 원양으로 나가는 경우에는 더 큰 파도에 맞설 수 있는 선박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고대의 사람들은 어떠한 배를 만들어서 바다에 도전하였을까? 사료가 부족한 한국 고대사 영역에서, 조선술을 살펴보는 작업은 대단히 어렵다. 과거에는 부족한 자료들을 간추려서, 한국 민족의 위대한 고대 해양기술을 그려낸다는 당위를 가지고 접근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관점은 현대인의 시각에서 고대인을 이해한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갖는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해역은 큰 틀에서 서로 유사한 해양환경을 공유하고 있으며, 조선술의 영역에서도 일정한 보편성이 확인된다. 또한 중국과 일본에는 한국에 비해 고대 조선술과 관련한 문헌, 고고, 회화자료가 상대적으로 많다. 따라서 고대 동아시아의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시각에서 한국 고대의 조선술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번 연재에서는 고대 동아시아의 조선술을 살펴본 뒤, 한국 고대의 조선술을 추정하고, 영흥도에서 발견된 고대 선박을 소개하려고 한다.3) 
 
 

2. 고대 동아시아의 조선술, 어떠한 배를 만들었나?

 
사람이 물에 젖지 않고, 물에 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초보적이고, 값싼 방법은 자연에 널려 있는 나무를 베어서, 묶은 뒤에 뗏목처럼 활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평평한 뗏목은 거친 파도를 만났을 때, 부서지거나 전복될 위험이 있다. 또 다른 방법은 지름이 큰 나무를 구해서, 반으로 자른 뒤, 속을 파내어 카누 형태의 선박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옆에서 부딪히는 큰 파도에 취약하고, 많은 화물과 사람을 실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고대 동아시아의 사람들은 가장 만들기 쉬운 카누 형태의 선박을 맨 밑에 두고, 양옆과 앞뒤로 나무판을 덧대어 선체를 크게 만드는 방식을 고안하였다. 이렇게 하면, 가장 단순하고 튼튼한 카누형 선박을 바닥에 배치하여 안정성을 높이는 동시에, 더 많은 사람과 화물을 싣고 더 높은 파도를 헤쳐가며 항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선박도 결국은 나무의 지름과 높이가 전체 선박의 규모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전근대의 인간이 만들었던 가장 발달한 형태의 배는 나무판으로 구조를 짜서 올리는 선박이었다. 이른바 ‘대항해시대’를 다룬 콘텐츠나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나오는 선박들은 목재를 여러 장 겹쳐서 선박의 구조를 만드는 형태였다. 이러한 선박은 부재와 부재 사이를 정교하게 결합하지 않으면, 바닷물이 새어 들어오거나 파손되어 버릴 우려가 컸으므로, 상당한 기술적 발전을 요구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조선술의 발전 과정은 통나무를 파낸 카누 형태의 선박에서, 점차 나무판을 덧대어 선체를 크게 만드는 순서로 이해되며,4) ‘독목주(獨木舟)’-‘준구조선(準構造船)’-‘구조선(構造船)’ 단계로 구분하기도 한다.5) ‘독목주’는 큰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속을 파서 만드는 배로서, 카누와 같은 형태이다. ‘준구조선’은 독목주에 목재를 덧붙여 선폭이나 적재 톤수를 늘리고 안정성을 높인 형태이다. ‘구조선’은 여러 목재를 이어서 만드는 선박이다. 

고대 동아시아의 조선술은 대체로 ‘준구조선’과 ‘구조선’ 단계에 해당하였다. 동아시아의 ‘준구조선’ 자료는 일본에서 다수 출토되었는데, 3~6세기 무렵에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6)  일본에서 확인된 준구조선의 실물 부재, 배 모양 토기나 회화 등은 준구조선의 구조를 살펴보는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해준다. 이러한 준구조선은 밑바닥에 카누 형태의 선박을 두고, 선수(船首)와 선미(船尾)를 높게 만들면서 측면에 목판을 덧대는 형태이다. 
 
준구조선은 단순한 카누형 선박에 비해 더 많은 사람과 화물을 싣게 해준다는 점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지만, 구조선 단계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다만, 여러 기항지에 머물면서 노잡이의 휴식과 식수 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시인거리 연안항해에는 적합한 선박이었다. 
 
 
<그림1> 일본 준구조선 관련 자료 (축척부동)
 

그렇다면 ‘구조선’ 단계의 조선술은 어떠한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구조선과 관련한 문헌 기록이 확인된다. 예를 들어, 3세기 후반 서진 시기의 ‘대선’은 2천여 명을 태우고, 배 위에서 말을 달릴 정도의 크기였다고 전한다.13) 동진의 승려 법현이 413년 귀국길에 탔던 동남아시아 상선(大舶)은 승선 인원 200여 명 규모에, 작은 배를 함께 갖추었던 구조선이었으며, 수마트라 일대에서 광저우까지 50일 만에 주파하는 배였다.14)
 
남북조시대에도 조선술의 발전은 이어졌는데, 쓰촨성 청두 만불사(萬佛寺)에서 발견된 불교 조각에서는 구조선 모양의 선박 그림이 확인된다.(<그림2>) 이러한 조각의 연대에 대해서는 다소 논쟁이 있지만, 대체로 남북조시대의 구조선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로 이해하는 데 무리는 없다. 그림 속의 선박은 선수와 선미가 유선형으로 표현되었고, 갑판 위에 구조물이 있으며, 돛대에 설치된 돛은 바람을 받고 있다.15)
 
 
<그림2> 남북조시대 구조선 관련 회화자료
 
 
일본의 회화자료에서도 구조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1세기 《성덕태자회전(聖德太子繪傳)》,(<그림4-①,②>) 12세기 말 《길비대신입당회권(吉備大臣入唐繪卷)》 등에는 수와 당에 보냈던 구조선 그림이 있다.(<그림4-③,④>) 구조선의 선체는 목판을 이어 만들었고, 갑판 위에는 목조 건축물을 올렸으며, 유선형 선수와 선미는 먼바다에서의 항해 능력을 담보하였다. 다만, 이러한 그림은 후대 일본인의 당선(唐船) 이미지가 투영된 작품으로 평가되므로,18) 그보다 앞선 시기의 구조선 이미지를 짐작하는 참고자료 정도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림3> 일본 고대 구조선 관련 회화자료
 
 
이상에서 살펴본 동아시아 고대 선박 관련 자료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에서는 3~6세기 무렵에 ‘준구조선’을 주로 활용하다가, 늦어도 7세기경에는 ‘구조선’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구조선과 관련된 문헌 자료가 확인되며, 남북조~수당 시기에는 구조선을 묘사한 회화자료도 확인된다. 본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한국 고대의 조선술은 준구조선을 주로 활용하다가 구조선 단계로 변화하는 일본의 조선술과 일찍부터 구조선을 활용한 중국의 조선술 사이에 위치하였다.
 


3. 고대 한국의 조선술, 어떠한 배를 만들었나?

 
고대 한국의 사람들은 어떠한 배를 만들었을까? 안타깝게도 이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주는 실물 자료는 극히 적다. 따라서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앞서 살펴본 고대 동아시아의 조선술을 염두에 놓고, 문헌과 고고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먼저, 한반도에서도 주로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배 모양 토기가 확인된다. 이러한 토기는 대체로 ‘독목주’ 또는 ‘준구조선’ 형태를 갖추고 있다. 가야 지역에서 나온 배 모양 토기는 4~5세기에 만들어졌고, 일본의 배 모양 토기와 유사한 형태가 많다. 가야와 일본 열도의 사람들이 긴밀한 교류를 통해 유사한 배 모양 토기를 활용한 것으로 생각된다.23) 
 
백제의 준구조선과 관련하여, 다양한 백제계 유물이 확인된 오사카의 한 유적에서는 한반도에서 자생하는 전나무과 수종으로 제작된 준구조선 선박 부재가 출토되었다.24) 유적의 성격과 함께 나온 유물의 특성을 고려할 때, 이 부재는 백제에서 사용된 준구조선 선박 부재일 가능성도 있다.

국내에서는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처음으로 준구조선 부재가 출토되었다. 이 부재는 선박 측면에 결합하는 부재로 추정되는데, 3세기 말~4세기 초에 만들어진 녹나무 수종의 부재로 확인되었다. 녹나무는 주로 일본에서 생장하기 때문에, 목재의 산지는 일본으로 추정된다.(<그림4>)25) 봉황동 출토 준구조선은 김해와 일본 사이에 준구조선을 통한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림4> 김해 봉황동 유적 출토 준구조선 부재
 
 
이상에서 살펴본 ‘준구조선’ 관련 자료들은 주로 일본 열도와 가까운 한반도 남부에서 확인된다. 양 지역의 유사한 해양환경과 시인거리 내에서 왕래할 수 있다는 특징을 고려하면, 고대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에서는 대체로 ‘준구조선’이 널리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고대 한국에서 ‘구조선’을 처음 활용한 것은 언제일까?

구체적인 자료는 일본, 중국에 비해 극히 적지만, 일부 사료에서 구조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에는 648년, 당에 갔던 김춘추가 귀환하다가, 바다에서 고구려군을 만나자, ‘작은 배(小船)’를 타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26) 고대 동아시아의 구조선에는 다양한 목적에서 작은 배를 함께 싣고 다녔는데, 《위서》에는 방선(舫船)의 옆에 ‘경가(輕舸)’를 달았다는 기록이 보이고,27) 《입당구법순례행기》에도 7명이 탄 ‘정(艇)’을 내려 육지에 보내는 기록이 있다.28) 이러한 작고 빠른 배를 항상 싣고 다닐 정도의 선박은 당연하게도 ‘구조선’ 규모로 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7세기 중반보다 이른 시기에 보이는 ‘구조선’ 관련 흔적은 없는 것일까?

7세기 이전에도 고구려, 백제 혹은 가야, 왜 등의 여러 나라가 중국에 바다 건너 사신을 보낸 기록은 숱하게 확인된다. 중국과의 빈번한 교섭은 앞서 살펴본 ‘준구조선’ 정도 규모의 선박으로 이루어졌을까? 황해 연안을 따라가는 장거리의 연안항해라면, ‘준구조선’으로 여러 곳에 기항하면서 항해할 수 있겠지만, 위진남북조의 분열기와 고구려-백제의 적대관계를 고려하면 장거리의 연안보다 황해 중부의 원양을 건너는 항로를 활용했을 개연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미 중국의 조선술은 대규모 구조선을 만드는 단계에 진입하였으므로, 시인거리를 벗어난 원양을 항해하는 데 적합한 ‘구조선’이 일찍부터 활용되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472년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상표문에는 ‘방선(舫船)’을 험한 파도 속에 띄워 아득한 나루로 가는 지름길을 찾게 하였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478년 왜왕 무가 송에 보낸 상표문에는 ‘선방(船舫)’을 타고 고구려의 방해를 무릅쓰고 백제를 거쳐 길을 나선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이때 ‘방(舫)’으로 표현된 선박은 2척의 배를 횡으로 연결하여 적재 톤수를 늘린 배이며,29) 중국에서 한 이후 쉽게 확인되는 선박 형태이다.30)
 
 ‘방(舫)’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4~5세기 회화 자료로는 동진 고개지(345~406)의 작품으로 알려진 《낙신부도(洛神賦圖)》의 선박이 있다.(<그림5>) 이 선박은 구조선 2척을 연결하고 그 위에 누대(樓臺)를 설치한 ‘방(舫)’의 모습이다. 물론, 현존하는 《낙신부도》는 북송대 혹은 남송 초기의 모본이므로, 육조시대 원작을 모사하는 과정에서 송대의 상상력이 가미된 것으로 평가된다.31) 따라서 《낙신부도》를 통해 4~5세기 ‘방(舫)’의 모습을 곧바로 유추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문헌에 남은 기록과 종합적으로 판단한다면, 원양 항해에 적합한 수준의 적재 톤수와 안정성을 갖춘 구조선 2척을 연결하는 ‘방(舫)’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림5> 《낙신부도》의 선박32) 
 

동아시아 조선술의 역사 속에서 고대 한국의 위치는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미 구조선을 사용하던 중국과 준구조선을 주로 활용하다가 구조선을 활용하기 시작한 일본 사이에 존재한다. 고대 한국 조선술의 시공간적 위치와 앞서 살펴본 사료의 내용을 고려할 때, 고대 한국과 중국 사이의 바다에서 ‘구조선’이 활용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조선’의 실물을 확인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4. 바다에서 발견된 고대 한국의 선박, 영흥도선


한반도 바다에서 목판을 연결하여 만든 구조선이 실물로 확인된 것은 주로 고려시대 이후에 국한되었다. 그런데, 지난 2012~2013년에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섬업벌 서남쪽 해역에서 고대 한국의 선박이 최초로 확인되었다.(<그림6>)

배가 발견된 영흥도 일대는 남쪽으로 아산만, 서쪽으로 덕적군도, 북쪽으로 영종도, 동쪽으로 대부도를 끼고 있는 요충지이다. 현재도 경기만 도서지역을 오가는 여객선의 항로가 영흥도와 자월도 사이 해역을 지나가며, 조선시대에도 남북 방향 항로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섬업벌은 영흥도 서쪽의 자월도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작은 무인도로, 덕적도로 이어지는 동서 방향의 항로와 영흥도 서쪽을 통과하는 남북 방향의 항로가 교차하는 곳이다. 섬업벌 주변은 조류가 매우 강한 곳이므로, 해양유물 발굴조사도 조류의 흐름이 멈추는 정조 시간에만 이루어졌다.

이곳에서의 발굴조사는 어떤 스쿠버다이버가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할 수도 있었다. 2010년에 섬업벌 주변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던 일반인이 청자 4점을 발견하고, 당국에 신고하면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2010년부터 2013년까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수중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량의 청자와 더불어, 조사구역 중심부에서 선박 1척을 확인하였다. 이 선박은 ‘영흥도선’으로 명명되었다. 그런데 선체 내부에서는 단 한 점의 청자도 확인되지 않았고, 화물로 적재한 철제솥과 도기만 확인되었다. 

영흥도선은 선체 하부를 이루는 길이 약 6m의 중앙 저판 1개를 중심으로 측면에 붙어 있는 부재 2개가 3단으로 결구된 채로 발견되었다. 목재의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는 8세기로 나왔고, 함께 나온 도기는 통일신라 유물로 판단되었다. 따라서 영흥도선은 한반도 바다에서 나온 최초이자 가장 오래된 8세기 신라 구조선으로 밝혀졌다.(<그림6>)33)
 
 
 
 
<그림6> 영흥도선 관련 자료
 

영흥도선은 구조선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구조선을 만드는 과정에서 직면하는 기술적 어려움은 ‘여러 부재를 어떻게 이어 붙일 것인가?’, ‘배의 아랫부분과 측면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등의 질문과 관련된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만곡부종통재(만곡종통재)라는 부재를 통해 해결하였다. 이것은 배 아랫부분 부재의 측면에 ‘ㄴ’자 형의 굴곡진 부재를 덧붙이고, 그 위에 측면 부재를 얹는 형태로 배의 구조를 완성하는 것이다. 영흥도선에서 발견된 중앙 저판 1개 외에 다른 부재는 만곡부종통재와 관련될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고려선 가운데 11세기를 전후로 하는 초기 선박에서 만곡부종통재의 모습이 확인되며, 그 이후부터 기술적 변화에 따라 점차 사라진다. 따라서 영흥도선의 만곡부종통재는 고려선의 초기 특징과도 연결된다.34)
 
최근에는 영흥도선의 구조와 특징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도 제출되었는데, 영흥도선의 저판은 중앙저판을 중심에 두고, 좌우에 측저판을 연결한 뒤, 그 위에 만곡부종통재를 얹는 구조로 복원되었다.(<그림7>)35) 이러한 8세기 신라 구조선의 특징은 비교적 자료가 많이 축적된 고려시대 선박의 기원 내지는 연결고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림7> 영흥도선 발굴 실측도면
 
 

5. 나가며


고대 동아시아에서 조선술의 발전은 대체로 카누 형태의 ‘독목주’에서, 목판을 덧댄 ‘준구조선’을 거쳐, 목판으로 선박의 밑바닥부터 측면과 갑판의 모든 구조물을 완성한 ‘구조선’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일본에서는 대략 6세기까지 ‘준구조선’을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실물 부재를 비롯하여 배 모양 토기와 회화자료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그리고 늦어도 7세기 무렵에는 수와 당까지 도달하기 위한 ‘구조선’을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본문에서 자세히 언급하지 못했지만, 7세기 《일본서기》 기록을 고려하면, 백제나 신라의 조선술이 일본에 전해졌을 개연성도 있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구조선’과 관련한 기록이 나타나며, 남북조~당 시기에 구조선 모습을 그린 회화자료도 확인된다. 

고대 한국의 조선술은 ‘준구조선’에서 ‘구조선’으로 변화한 일본, 일찍부터 ‘구조선’이 활용된 중국 사이에 위치한다. 흥미로운 것은 한반도 남부에서는 일본 ‘준구조선’과 유사한 배 모양 토기, 혹은 실물 부재가 출토되며, 중국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에서는 중국과 유사한 ‘구조선’ 관련 표현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시인거리를 벗어나는 원양을 건너 중국에 왕래하는 항해에서는 ‘구조선’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고, 시인거리 내의 연안을 따라 일본에 왕래하는 항해에서는 ‘준구조선’을 오랫동안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구조선’이 갖는 명백한 장점을 고려한다면, 일본을 연결하는 장거리의 연안항해에서도 점차 ‘구조선’이 활용되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중국과 한국의 조선술이 일본까지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한국의 바다에서 활용된 ‘구조선’의 실제 모습은 영흥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영흥도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영흥도선’은 8세기 신라선이자, 여러 목재를 이어서 만든 ‘구조선’으로 확인되었다. ‘영흥도선’은 바다에서 발견된 유일한 한국 고대의 ‘구조선’으로 가치가 크다. 또한 여러 장의 저판과 만곡부종통재의 활용이라는 선박의 구조적 특징은 고려 초기의 선박으로 이어지고 있어서, 한국 고중세 선박의 변화과정을 알아보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지금까지 한국의 바다에서는 주로 고려시대 선박이 다수 확인되었다. 고려시대 선박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청자와 함께 발견되는 사례가 많았다. 반면에, ‘영흥도선’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의 선박은 청자만큼 상징적인 유물을 갖고 있지 않았다. 고무적인 것은 최근 태안이나 진도 해역에서 백제, 영산강 유역의 기와, 토기가 확인된다는 점이다. 앞으로 ‘영흥도선’ 외에 고대 선박이 추가로 발견될 날도 멀지 않았다. 특히 백제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통틀어 가장 많은 중국 도자를 수입한 나라였으므로, 중국 도자를 적재한 선박이 나타날 수도 있다. 앞으로 서해안에서 갯벌 체험이나 낚시, 스킨스쿠버를 해볼 계획이라면, 스쳐 지나가는 토기편도 다시 살펴봐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미주>
 
1) 한국해양대학교 1종도서편찬위원회, 2002, 《고등학교 항해》, 교육과학기술부, 8~10쪽.
2) 조지프 니덤 지음, 왕링‧루구이전 공동연구, 김주식 옮김, 2016, 《조지프 니덤의 동양항해선박사》, 문현, 442~457쪽.
3) 본 연재는 다음의 논문을 수정, 요약한 것이다(임동민, 2022, 「고대 동아시아의 해양기술을 통해 바라본 백제 한성기 항해술과 조선술」, 《해양문화재》16).
4) 조지프 니덤 지음, 왕링‧루구이전 공동연구, 김주식 옮김, 2016, 앞의 책, 81~82쪽.
5) 정진술, 2009, 《한국 고대의 해상교통로》, 韓國海洋戰略硏究所, 81~136쪽.
6) 柴田惠司, 1995, 「古代日本の船とその周邊」, 《日本學》14 ; 松木哲, 1995, 「船と航海を推定復原する」, 《日本の古代3:海をこえての交流》, 中央公論社 ; 禹在柄, 2002, 「4-5世紀 倭에서 加耶‧百濟로의 交易루트와 古代航路」, 《湖西考古學》6‧7.
7) 近つ飛鳥博物館, 1994, 《修羅!-その大いなる遺産:古墳·飛鳥を運ぶ-》(平成11년 특별전도록), 123쪽 도17.
8) 神戸市立博物館, 2000, 《海の考古學》, 19쪽 도77.
9) 大阪歷史博物館 상설전시실 복제품 촬영(2011.12.12.).
10) なにわの海の時空館 야외전시품 촬영(2011.12.16.).
12) 近つ飛鳥博物館, 2000, 《殘されたキャンバス》(平成12년 특별전도록), 54쪽 95.
13) 《晉書》卷42, 列傳12 王濬
14) 大舶上亦二百許人 䝴五十日粮 (…) 常行時 正可五十日 便到廣州 (…) 卽乘小舶入浦 覓人欲問其處(《高僧法顯傳》)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엮음, 임상희 교감 및 역주, 2013, 《고승법현전-고려재조대장경본의 교감 및 역주-》, 아연출판부, 50~51쪽 및 261~265쪽 참조)
15) 발견 과정, 연대 관련 논란 등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가 참고된다(김혜원, 2003, 「중국 초기 淨土 표현에 대한 고찰-四川省 成都 발견 造像을 중심으로-」, 《미술사연구》17, 3~16쪽 ; 董華鋒·何先紅, 2014, 「成都萬佛寺南朝佛教造像出土及流傳狀況述論」, 《四川文物》2014-2, 76~77쪽).
16) 四川博物院・四川大學博物館・成都文物考古研究所, 2013, 《四川出土南朝佛教造像》, 中華書局, 115쪽 도판39.
17) 四川博物院・四川大學博物館・成都文物考古研究所, 2013, 앞의 책, 106쪽 도판36-2.
18) 石井謙治, 1983, 《圖說 和船史話》, 至誠堂, 19~29쪽.
19) e國寶(일본 國立文化財機構所藏 國寶·重要文化財) (원자료 : 東京國立博物館 소장). https://emuseum.nich.go.jp/detail?langId=ja&webView=&content_base_id=100205&content_part_id=001&content_pict_id=005
20) 石井謙治, 1983, 앞의 책, 28쪽 도43.
21) 일본 國立九州博物館 전시품(복제) 촬영 (원자료 : Minister Kibi's Adventures in China (Kibi daijin nittô emaki), 소장처 : Museum of Fine Arts Boston).
22) 일본 國立九州博物館 전시품(복제) 촬영.
23) 鈴木廣樹, 2019, 「한‧일 출토 주형토기‧埴輪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삼국‧고분시대 출토자료를 중심으로-」, 《도서문화》54.
24) 大阪府敎育委員會, 2009, 《蔀屋北遺跡 Ⅰ 本文編》 ; 권오영, 2007, 「주거구조와 취사문화를 통해 본 백제계 이주민의 일본 기내지역 정착과 그 의미」, 《한국상고사학보》56 ; 문동석, 2011, 「大阪府 四條畷市 蔀屋北 遺跡에 대하여」, 《일본어문학》54 ; 岩瀨透, 2011, 「蔀屋北遺跡出土の準構造船」, 《蔀屋北遺跡Ⅱ》, 大阪府敎育委員會, 228~238쪽.
25) 동양문물연구원, 2014, 《김해 봉황동유적》, 동양문물연구원.
26) 《三國史記》卷5, 新羅本紀5 眞德王 2년(648)
27) 玄常裝輕舸於舫側(《魏書》卷97, 列傳85 島夷桓玄)
28) 便下艇差射手二人水手五人遣令尋陸地問其䖏名(《入唐求法巡禮行記》卷1, 開成 4년(839) 4월 17일)
29) 舫船載卒 一舫載五十人與三月之食[[索隱]枋船 枋音方 謂並兩船也 亦音舫](《史記》卷70, 張儀列傳10) ; 造船二百艘 二船爲一舫(《魏書》卷38, 列傳26 刁雍)
30) 박순발, 2016, 「백제의 해상 교통과 기항지–대 중국항로를 중심으로」, 《백제학보》16, 17~19쪽.
31) 스서우첸, 문정희역, 2008, 「洛神賦圖 전통의 形塑와 發展」, 《미술사논단》26.
32) 北京 故宮博物院 소장품(https://www.dpm.org.cn/collection/paint/234597.html).
33)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4, 《영흥도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34) 윤용혁, 2015, 「옹진 ‘영흥도선’의 구조 특징과 역사적 성격-장보고 시대의 신라 연해 선박-」, 《백제문화》52.
35) 허문녕, 윤용희, 2022, 「통일신라기 선박구조 이해 - 월지배와 영흥도선 선체 구조 연구-」, 《해양유산연구》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