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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을 말한다] 조선인들의 청일전쟁: 전쟁과 휴머니즘_조재곤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5.31 BoardLang.text_hits 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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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5월(통권 51호)

[나의 책을 말한다] 

 

조선인들의 청일전쟁

–전쟁과 휴머니즘–

(푸른역사 2024. 2)
 
 

 

조재곤(근대사분과)

 
 

1. 우리 눈의 프리즘을 통한 연구방법 모색

 
1894~1895년의 청일전쟁은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3국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만나는 매개이자 3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한 획을 긋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이 시기는 한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시기로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의 군사적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시작되었다. 반면 중국의 경우 동시대를 대표하는 계몽운동가 량치차오(梁啓超)의 표현처럼 “중국 4천 년의 대몽(大夢)을 환기시킨” 치욕의 사건이었다. 주요 전투현장이 되었던 조선은 막대한 재물과 인적 손실을 입었고,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간의 연구는 타자의 입장에서 객체로서의 역할만이 부각되던 결과 조선과 조선인의 아이덴티티는 별반 부각될 수 없었다. 우리 눈의 프리즘을 통한 ‘조선 사람들이 경험한 청일전쟁’이라는 새로운 범주의 연구방법론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2. 책의 구성


이 책은 청일전쟁의 단서가 된 일본군의 조선 출병 및 왕궁 점령과 인식론의 방향,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인 풍도 해전‧성환 전투의 결과와 피해상, 일본군의 만주 침공 직전 한반도에서 일어난 가장 큰 전투인 평양 전투의 실상과 지역 상황 등을 분석한 것이다. 또한 사건이 함의하는 역사상, 인식의 방향과 파급효과를 중심으로 청일전쟁 기간 조선에서 일어난 전투의 단계별 변화상을 살피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일본 자료는 군부와 외교당국의 공문서 자료는 물론 참전 병사나 전쟁 기획자들이 남긴 문집이나 일기, 메모와 주요 신문의 관련 기사를, 중국 자료는 청일전쟁 관련 각종 기록문서집, 베이징 당안관 등에 소장된 자료 및 지휘관의 일기와 이홍장‧원세개전집과 옹동화문집 등을 살폈다. 한국 자료는 주요 연대기와 공문서 외에 최근 집중 공간된 문집과 일기 자료, 인부와 물자동원을 보여주는 규장각 소장 고문서 등을 활용했다. 이들 자료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문명’의 이름 아래 자행된 동원(mobilization)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피고 그 부당성과 폭력성을 알려야 할 필요성도 절감하게 되었다. 전 3부로 구성한 본 연구는 다음의 목차로 구성하였다.

1부 은폐와 진실 : 일본군의 왕궁 점령과 ‘보호국’ 구상
1. 일본군의 조선 왕궁(경복궁) 점령에 대한 재검토
2. 1894년 7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대한 반향
3. 청국군의 동향과 일본군의 출동
4. 일본의 조선정책 : ‘보호국’ 구상과 실현 과정

2부 야만의 전쟁과 휴머니즘 : 풍도 해전‧성환 전투 
1. 풍도 해전과 성환 전투
2. 동원 시스템과 군표 발행계획
3. ‘야만의 전쟁’과 선전
4. 전쟁과 언론인의 윤리와 책임

3부 반성 없는 역사의 반복 : 평양 전투와 평안도의 현실
1. 평양 전투 직전 청‧일군의 동향
2. 평양 전투의 내용과 평가
3. 평양과 평안도의 현실
4. 북진 물자와 노동 인력 
 
 

 

3. 주요 내용


먼저 청일전쟁으로 가는 과정에서 일본 정부 내의 움직임을 살피고, 전쟁의 단서가 된 일본군 경복궁 점령의 실상을 재검토하여 감추거나 분식된 사실을 복원하였다. 당시 자료의 분석과 재해석을 통해 적어도 다음의 몇 가지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왕궁 점령의 세부계획은 참모차장의 기획 아래 참모본부 출신의 군부 엘리트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담을 넘어온 일본군의 불법적인 왕궁 점령 시 조선군과 수차례의 교전이 있었는데 이때 조선군의 발포는 정당방위 차원이었다. 7월 23일 하루 동안 왕궁 수비병은 5차례에 걸쳐 적극적으로 항전했다. 왕궁 수비병의 해산은 ‘패주’가 아닌 날조된 국왕의 ‘전교(傳敎)’를 그대로 믿고 명령을 수행한 것이었다.  

청국군의 중국 내 병력 편성과 조선 출병 준비 과정과 요구사항, 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영접 과정, 아산에 도착한 청국군에 대한 인력과 우마‧양식‧선박 제공, 각종 비용 지출 내역 등을 구체적으로 살폈다. 이를 날짜별로 상세히 기술한 「아산현청국군병주찰시전용하성책(牙山縣淸國軍兵駐紮時錢用下成冊)」 등 규장각 고문서의 복잡한 내용을 각기 표로 정리하고 분석했다. 일본 또한 ‘인량어적(因糧於敵, 적에게서 식량을 취함)’ 식으로 그때그때 강제적 동원과 징발, 즉 현지조달로 병참을 동원하는 방식을 끝까지 견지하였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현실적 처지와 피해에 관해 집중적으로 살폈다. 

청일전쟁 시기 일본이 조선 정부를 강박하여 관철시킨 「조일잠정합동조관」과 「(조‧일) 양국맹약」‧「신식화폐 발행장정」의 내용과 결과를 분석하고 러일전쟁 시기 유사한 형태로 진행되었던 「한일의정서」와 「대한시설강령」‧「대한시설세목」 등을 통해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하는 과정을 비교하여 청일전쟁 당시와 이후 러일전쟁 시기의 일제 국권 침탈의 성격과 외압의 규정성과 강도를 알아보았다. 전쟁 기간 일본군은 조선인들에게까지 엄한 전시 군율을 적용했다. 평양전투를 거쳐 전쟁이 종결될 때에 이르기까지도 인부와 지역민의 가벼운 절도행위에 대해도 임금 지불 중지, 헌병 순사의 가택수색과 장형(杖刑)‧유형‧노역형은 물론 심지어 참형(斬刑) 집행이라는 매우 가혹한 처분으로 해결했다.
 
 

4. ‘유원지의’와 ‘내자불거’의 상생 네트워크

 
청일전쟁 전 기간에 걸쳐 일본군 지휘관과 병졸은 물론이고 종군인부와 종군특파원들까지도 청국군과 지역주민을 무차별 살해하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일본군들 사이에는 참살(斬殺)을 무용담 정도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만연했고 실제로도 그러한 상황은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본인 인부 또한 자국인들에게는 하등 인민으로 차별받던 존재였지만 조선에 들어온 이후에는 다른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릇된 선민의식을 가지고 조선인의 재물 약탈과 구타, 부녀자 강간 등을 자행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군대의 묵인 아래 총과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고서 청국군과 조선인 살해에도 참여하는 등 전투병의 역할도 대행하고 있었다. 특파원들은 객관적이고 정확한 사실 보도보다는 언론인의 윤리와 책임을 상실하고 제국주의의 나팔수로서 ‘문명과 야만’이라는 도식을 적용한 인국모멸(隣國侮蔑)의 배외적인 충군 애국주의로 시종하면서 일본 군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했다. 

이 같은 시대 상황에서도 청국과 일본의 전투장이 되었던 해당 지역주민들은 ‘유원지의(柔遠之義)’를, 동학농민군은 ‘내자불거(來者不拒)’의 따뜻한 인도주의 정신을 보였다. 요컨대 1894~1895년 청일전쟁 기간 조선의 민중들은 이방인들의 폭력으로 강요된 통제와 동원이라는 차별과 배제의 현실에서도 타자를 대하는 방법에서 열린 태도(open arms)를 견지하고 있었다. 공존을 위한 힘없는 자들의 포용, 그것은 같은 기간 전투력을 상실한 패잔 동학농민군과 청국군 잔류자와 상인들을 수색‧살해‧집단처형했던 일본군의 행위와는 크게 대비되는, 진정한 의미의 휴머니즘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