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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바다를 고대의 시선으로 ①] 고대 인간은 바다를 지배하였나?_임동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3.29 BoardLang.text_hits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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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3월(통권 49호)

[고대의 바다를 고대의 시선으로] 
 

고대 인간은 바다를 지배하였나?

-바다라는 강고한 구조-

 

 

 

임동민(계명대학교)

 
 
 

1. 들어가며

 
2010년 3월, 사람들이 따뜻한 봄을 기대하는 시간이었다. 해군 장교로 군 복무를 하고 있던 나는 여전히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실종자 가족’과 함께 성남함에 올라탔다. 그날은 천안함 사건이 터진 다음 날이었다. TV에서는 함미에 갇혀있는 해군 장병들의 구조 가능성을 보도하고 있었다. 나도 곧 찾아올 봄에 들뜬 마음처럼, 쉽게 구조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성남함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새벽, 성남함은 백령도 현장에 도착했다. 나는 갑판으로 나왔다. 백령도 앞바다는 손에 잡힐 만큼 작을 것 같았지만,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바다는 먹먹할 정도로 드넓었다. 갑판에는 부은 눈으로 멍하니 바다를 쳐다보고 계시는 ‘실종자 가족’이 계셨다. 그 시선은 평생 바다를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육지인의 허탈한 시선이었다. ‘실종자 가족’은 곧 ‘유가족’이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2014년 4월,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계절이었다. 그런데 뉴스에서는 제주행 여객선의 침몰 속보가 흘러나왔다. 그날은 평범한 하루가 될 수도 있었지만, 누구도 잊을 수 없는 하루가 되었다. TV에서는 2010년 3월과 마찬가지로 ‘구조’에 대한 희망을 보도했지만, 결말은 비극이었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통틀어, 바다에서 일어난 참사는 수없이 많았다. 대한민국에서 2022년에 발생한 해양 사고는 2,863건, 인명피해는 412명에 달하여, 하루에 약 8건씩 사고가 발생하여 약 1명씩 피해를 보고 있다.1) 지금의 대한민국은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여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바다에서 많은 사고가 나고, 안타까운 인명피해를 보고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 바다는 스마트폰에서 엄지와 검지로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자, 멋들어진 해적과 해적선이 활약하는 낭만적인 공간이며, 최첨단의 대형 선박이나 잠수함이 수상과 수중을 마음대로 탐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생각은 마치 인간이 바다를 정복했거나 지배했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하지만 천안함 사건 다음 날 아침, 바다를 멍하게 바라보고 계시던 ‘실종자 가족’ 분들의 시선을 떠올려 본다면, 인간이 과연 바다를 정복하였는지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이 순간에도 인명피해를 낳는 해양 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과연 인간은 바다를 지배하였나?
 

2. 바다라는 강고한 구조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농사를 짓고 동물을 기르면서 자연을 ‘정복’해나갔다. 현대 육지에는 도로와 상하수도가 놓이고, 높은 빌딩이 들어서고, 긴 터널과 다리가 만들어진다. 현대의 인간은 ‘육지’의 강고한 구조에 더 이상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이 육지에서 자연을 ‘정복’한 것처럼, 바다도 ‘정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구 표면의 70%를 차지하는 바다 대부분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다. 인간이 ‘정복’한 것처럼 보이는 바다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정복’한 것처럼 보이는 곳마저도 100% 안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현대 과학기술이 끝없이 발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바다는 인간에게 호락호락한 공간이 아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은 인간이 바다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고대의 바다는 어떠하였을까? 유럽 고대의 사람들은 바다를 외계처럼 여겼으며 도전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문학 작품에서도 바다는 괴물과 같은 외계 생명이 사는 위험한 공간으로 묘사되었다. 인간은 위험한 바다에 도전하기도 하였지만, 고대의 사람들에게 바다는 낭만적인 곳이라기보다 변화무쌍한 무서운 공간이었다.2)
 
고대 한반도의 바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과 신라 사이의 바다를 오갔던 사신들의 경험을 살펴보면, 목숨을 건 항해를 하다가 배가 침몰하거나, 표류하여 엉뚱한 곳에 도착하기도 하였고, 용궁을 다녀왔다거나 신선을 만났다고 하는 등 신기한 체험담을 남기기도 하였다. 사신들은 해룡, 해신, 산신 등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불경을 암송하는 등의 종교적 행위를 통해 위험한 사행길에서 안전을 보장받고자 하였다.3)
 
당에 유학했던 일본 승려 엔닌(圓仁)도 사신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갔는데, 도착할 즈음에 좌초하여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배가 완전히 파손되기 직전까지 이르자, 사람들이 넋을 잃고 울면서 부처님께 발원하였다고 한다.4) 바다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곳은 나무로 만든 선박뿐인데, 선박마저 훼손되면 그 위의 사람들은 목숨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페르낭 브로델은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에서 장기 지속의 구조로서 바다를 역사 서술의 심층에 배치하였고, 사회경제와 정치의 시간을 그 위에 쌓아 올렸다.5) 그의 구조사는 인간을 역사의 동력으로 강조하기보다, 변하지 않는 바다의 강고한 구조를 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유고집 형태로 출간된 《지중해의 기억》에서도 해양의 거대한 구조 속에서 고대 지중해의 역사를 서술하였다.6)
 
고대 유럽인이나 당-신라-일본을 오간 동아시아의 사람들도 바다라는 강고한 구조를 마주하였다. 한반도에 살았던 고대인들은 한반도 주변의 바다를 두렵고 무서운 심정으로 대했을 것이다. 그들이 마주했을 바다는 어떠한 환경이었을까?
 

3. 한반도의 바다

 
한반도를 둘러싼 바다는 크게 서쪽의 황해, 남쪽의 남해, 동쪽의 동해로 구분된다. 황해는 한국과 중국 사이의 수심이 낮은 천해로서, 연안의 조류는 전체적으로 매우 빠른 편이고, 조수간만의 차이도 극심하다. 중국과 한국의 큰 강은 대부분 황해로 흘러 들어가며, 하천에서 흘러온 토사와 조류가 만나 광대한 갯벌을 형성한다. 황해의 해안선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만, 도서, 갯벌, 하천 하구 등이 다양한 해안 지형을 형성한다. 크고 작은 섬과 만은 외해의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천혜의 항구로 발전하기 쉽고, 큰 하천의 하구는 내륙 수운과 연결하는 결절점 역할을 하였다.
 
남해는 통상적으로 전라남도 남해안에서 부산광역시 남해안까지의 바다를 지칭한다. 남해 연안의 조류는 빠른 편이며, 황해와 만나는 전남 해안의 조류가 가장 빠르다. 남해의 해안선도 리아스식 해안으로, 크고 작은 만과 도서가 긴 해안선을 이루고 있어, 자연적인 항구 발달에 유리하다. 남해 동부의 부산, 거제 일대와 일본 쓰시마는 직선거리 약 49.5km의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접해있는데, 날씨가 좋으면 양쪽 해안의 지표물이 보일 정도로 가깝다.
 
동해는 한국, 러시아, 일본에 둘러싸인 태평양 부속 연해이며, 조수간만의 차이가 적고 조류가 느린 편이다. 바람은 황해, 남해와 마찬가지로 계절풍의 영향을 받으나, 연안에서는 국지풍, 해륙풍의 영향도 크다. 연안의 지형은 단조로운 편이며, 원산만, 영일만, 울산만 등 일부 만을 제외하면, 자연적인 항구 발달에 제약이 큰 바다이다.
 
고대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러한 바다의 구조 속에서 다양한 목적을 갖고 바다에 도전하였다. 황해는 생업의 터전이자, 중국과의 교섭, 교류를 위한 중요한 통로였다. 황해는 천혜의 항구가 발전하기 좋은 조건이었고, 내륙 수운과의 연계도 좋았으므로, 인간의 해양 활동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황해는 조수간만의 차, 빠른 조류, 넓은 갯벌, 암초 등과 같은 자연의 제약이 큰 바다였으므로, 지역 해양정보를 장악한 해양 세력의 도움 없이는 도전할 수 없었다.
 
남해는 황해처럼 항구 발전에 유리한 바다였다. 하지만 황해와 마찬가지로 조류나 암초와 같이 지역 해양정보에 능통한 해양 세력의 존재가 중요하였다. 또한 남해 동부 연안은 전통적으로 일본과의 교섭, 교류를 위한 교두보로도 중요하였다.
 
동해는 황해, 남해에 비해 천혜의 항구가 발달하기 어려운 자연조건이었으며, 대외교류의 통로로 활용되는 비중도 상대적으로 낮았다. 하지만 높고 험준한 산으로 가로막힌 동해 연안은 육상 교통보다 연안을 통한 해양 교통이 필요하였고, 울산부터 원산, 함흥까지 일부 지역은 좋은 항구로 활용될 수 있었다.
 

4. 바다에 대한 고대인의 도전

 
한반도에 살던 고대인은 바다라는 강고한 구조에 그저 순응하거나 혹은 회피하며 살아갔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는 어업, 무역, 외교, 탐험, 정복, 종교 등 다양한 이유에서 무서운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바다에 대한 도전은 때때로 목숨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먹먹한 일이었지만, 인간들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강고한 구조에 맞서 싸웠다. 고대인이 바다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해양 지리정보의 숙지, 안전한 기항지의 확보, 그리고 해양 기술의 발전이 필수적이었다.
 
해양 지리정보에는 해저지형, 해류, 조류, 바람 등과 더불어 연안의 지표물이나 포구에 대한 정보 등이 있다. 이러한 정보들은 현대 항해에서고 항구에 드나들 때 여전히 강조되는 정보이다. 1950년대 《연안수로지》만 보더라도, 주요 항구 설명에는 반드시 해류, 조류, 바람 등의 정보와 암초, 갯벌 등의 위험 요소, 모든 종류의 높은 육상 지표물(산, 굴뚝, 건물, 나무, 암석)을 상세히 부기하였다.
 
안전한 기항지의 확보는 해양 지리정보의 획득을 위해서도 필요하였으며, 식수와 식량의 보급, 선원의 휴식을 위해서도 긴요하였다. 《선화봉사고려도경》에도 큰 바다에서 바람을 걱정하지 않지만, 물의 있고 없음은 생사를 가른다고 하여,7) 항해에서 식수가 얼마나 중요한지 기록하고 있다. 또한 조류의 흐름이 강한 한반도 연안을 항해하려면, 일정하게 변화하는 조류를 따라 정기적인 항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조선시대 포구 네트워크를 분석한 연구를 보면, 한양을 드나드는 선박들은 강화, 김포, 파주의 여러 포구에 정박하면서 항해하였다.8)
 
다음으로 해양 기술은 크게 항해술, 조선술, 항로로 구분된다. 항해술은 선박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에서 출발하는데, ‘시인거리 연안항해’, ‘천문관측 대양항해’, ‘정량적 항해’ 등으로 세분된다. 시인거리는 눈으로 지표물을 볼 수 있는 거리이다. 시인거리 연안항해는 눈으로 지표물을 볼 수 있는 거리 안에서 항해하는 것이며, 선사시대부터 활용된 안정적인 항해술로 여겨진다. 그러나 시인거리는 날씨에 따라 변화무쌍하며, 연안항해는 좌초의 위험성이 높고 조류와 바람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므로, 무조건 ‘안전한’ 항해라고 볼 수는 없다.
 
천문관측 대양항해는 하늘에 떠 있는 천체를 관측하여 선박의 위치와 방향을 파악하고 시인거리를 벗어난 먼바다를 항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 항해술은 인간의 해양활동 반경을 대폭 넓혀줬다는 의미가 있지만, 악천후를 만나면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잃고 표류하게 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한 “Vikings” 시리즈에도 주인공이 목숨을 걸고 하늘을 보면서 방향을 잡아 브리튼 섬으로 건너가는 장면이 나온다.
 
정량적 항해는 나침반, 해상시계 등의 발달 이후, 언제나 선박의 위치와 방향을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항해하는 기술을 말한다. 학계 일각에서는 고대 한국에서도 정량적 항해 단계에 도달했을 가능성을 언급하지만, 일반적으로 중세 이후에 도달한 것으로 이해한다. 참고로, 현대 항해술은 GPS와 전자해도 등을 통한 전파 항해 단계에 이르렀다.
 
바다에 도전한 해양 기술은 항해술 외에 조선술이 있다. 고대 동아시아의 조선술은 대체로 뗏목이나 카누 단계에서 준구조선 단계를 지나 구조선 단계에 이르렀을 것으로 이해된다. 뗏목과 카누는 가장 초보적인 조선술로서, 커다란 통나무를 엮거나, 반으로 잘라 속을 파서 만드는 기술이다. 준구조선은 구조선에 준하는 선박을 의미하며, 카누 모양의 배를 아래에 놓고, 위에 나무판을 덧대어 적재량과 안정성을 증대시킨 선박이다. 특히 고대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된다. 이 선박은 적재량의 한계로 인하여, 연안의 여러 기항지를 거치는 연안항해 단계에 적합한 선박이다. 마지막으로 구조선은 목재로 만든 판을 여러 장 덧대어 일정한 구조를 만든 선박이다. 구조선은 준구조선에 비해 규모와 안정성, 적재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선박이다. 참고로, 구조선은 중세 이후에도 널리 활용되었으며, 현대의 조선술은 선박 재료를 금속으로, 동력원을 화석연료 등으로 바꾸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었다.
 
 
 
 
항해술과 조선술의 변화에 맞추어, 고대 동아시아의 항로도 여러 종류로 변화되었다. 먼저, 황해에서는 황해연안항로, 황해중부횡단항로, 황해남부사단항로 등의 항로가 있었다. 황해연안항로는 선사시대 이후 널리 활용된 항로이며, 시인거리 연안항해의 항해술과 준구조선의 조선술로 항해 가능한 항로였지만, 해양 지리정보의 숙지와 안전한 기항지의 확보가 필수적인 항로였다.
 
 
 
 
황해중부횡단항로는 황해도에서 산둥반도까지 황해에서 가장 짧은 약 180km 정도의 원양을 횡단하는 항로이다. 개척 시점에 관한 논란이 존재하나, 한반도 중남부와 중국 사이의 교류와 교섭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킨 항로라는 점은 분명하다. 다만, 시인거리를 벗어난 원양을 일부 항해해야 하므로, 천문관측 대양항해 단계의 항해술과 원양 항해에 적합한 준구조선 혹은 구조선 단계의 조선술이 필요했을 것이다.
 
황해남부사단항로는 한반도 서남해안에서 중국 강남지역 사이를 비스듬히 가로질러 가는 항로로서, 빠르면 신라 하대 이후 활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항로는 중국 강남지역과 직통한다는 의미가 크지만, 대단히 먼 원양을 항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천문관측 대양항해 혹은 정량적 항해 단계의 항해술과 구조선 단계의 조선술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남해의 항로는 일본 열도까지 대체로 시인거리 내에서 항해가 가능했으므로, 남해연안항로를 기본적인 항로로 하였다. 간헐적으로 한반도 서남해안에서 제주도를 거쳐 일본 고토열도에 도달하는 남해사단항로도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동해의 항로로는 동해 연안을 연결하는 연안항로가 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고대 일본과의 연결을 위해 동해의 원양을 가로질러 가는 다양한 횡단항로가 활용되기도 하였는데, 한국과 중국 사이의 빈번한 교류와 교섭 항로로 활용된 황해중부횡단항로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먼 횡단거리와 강한 파도를 이겨낼 필요가 있었다.
 
한국사의 관점에서 해양 기술의 변화 과정을 살펴본다면, 먼저 선사시대에는 시인거리 연안항해와 뗏목이나 카누 형태의 선박을 기본으로 활용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시인거리 연안항해와 준구조선을 기본으로 활용하면서, 중국의 기술을 수용하여 천문관측 대양항해, 구조선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남북국시대 이후에는 천문관측 대양항해와 구조선 단계의 해양기술이 사용되었고, 원양을 가로질러 가는 다양한 항로가 활용되었다. 중세부터 구조선 선박의 세부적인 발전, 나침반을 활용한 정량적 항해의 정착이라는 특징이 확인되며, 근현대에는 항해술과 조선술 측면에서 본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 다만, 해양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현대에도 다양한 해난사고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오래전의 고대인은 목숨을 걸고 당시의 해양기술을 최대한 활용하여 바다에 도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5. 고대의 바다를 탐구한 기존의 시선과 앞으로의 방향

 
한국 고대의 바다, 그리고 바다에 도전한 고대인을 탐구하려는 노력은 조선 후기 역사지리서에서부터 간헐적으로 확인된다. 근대 역사학에서 고대 한국의 바다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 민족주의, 식민주의 역사학이었다. 민족주의 역사학에서는 식민지로 전락한 당시 상황에서 빼앗긴 영토를 대체할 상징으로 바다에 주목하면서, 바다로의 진출, 민족의 해양영웅 장보고, 백제의 해외경략 등을 강조하였다. 이와 달리,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의 한국 고대 해양사 연구는 식민 지배의 정당성 확보라는 목적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러한 연구에서는 고대 일본과 중국 사이의 항로를 탐구하면서 백제, 신라 등의 역할에 주목하였지만, 큰 틀에서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지배와 같은 식민주의 역사학의 이해를 공유하였다.
 
해방 이후 한국 고대사 연구는 식민주의 역사학의 극복과 ‘고대국가’에 관한 탐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해양사는 상대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1980년대까지 한국 고대 해양사 연구 성과는 주로 해군, 해운학, 조선학 등의 해양 관련 분야에서 도출되었다. 예를 들어, 6.25 전쟁 직후인 1954년 해군에서 간행한 《한국해양사》는 민족 구원의 상징이자 재건의 마중물로서 바다에 주목하면서, 고대의 해양환경과 해양기술을 정리하고 고대 해양사를 서술하였다.9) 1980년대 말부터 황해를 건너 이루어진 고대국가의 해외 활동에 관한 학계의 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바다를 진출과 정복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점은 그 이전까지의 고대 해양사 서술과 궤를 같이하는 한계로 생각된다.
 
역사학계의 고대 해양사 연구는 한국의 경제성장과 맞물려 ‘세계화’, ‘해양강국’ 등의 표어가 유행하던 1990년대 이후 2000년대까지 급증하였다. 이 시기의 고대 해양사 연구는 민족 해양영토 수호, 민족사 정체성 수립, 우리 민족의 우수한 해양기술 연구, 폐쇄적 한국사에서 진취적 한국사로의 전환 등을 연구 목표로 삼았다. 특히 장보고와 같은 고대 해양 영웅에 주목한 연구도 증가하였는데, 학계, 기업, 정부 차원의 장보고 기념 사업과 맞물린 결과였다.
 
2000년대 말 무렵부터는 일국사적, 민족주의적 고대 해양사 연구 경향을 비판하면서, 고대의 해상 교통로를 보수적인 관점에서 정리하거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국가별 해양사를 검토하는 동시에, 영산강 유역과 같은 지역 단위의 해양사 연구도 증가하였다. 또한 연구의 공간적인 범위가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로 점차 확장하였다. 물론 이 시기에도 민족주의적 연구의 잔상이 있었지만, 현대 국민국가 경계를 기준으로 해석하지 말고 고대사 자료에 입각하여 실증적으로 접근하자는 분위기, 혹은 ‘지배-피지배’ 등의 개념보다 동아시아의 해양교류라는 개념에서 접근하자는 분위기가 대두하였다.
 
일제시대부터 1990~2000년대까지, 고대 한국의 바다와 이곳에 도전한 고대인을 바라보는 연구 시각은 다분히 ‘근대’, ‘민족’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바다는 진출과 정복의 대상이 되었고, 이곳에서 활약한 민족의 해양영웅이나 해양강국에 관한 관심이 컸었다. 하지만 민족주의적 해양사 연구에 관한 최근의 비판적 시선을 고려한다면, 앞으로는 고대 당시의 관점에서 바다라는 강고한 구조와 여기에 도전한 고대인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6. 나가며

 
이 글은 앞으로 이어질 [고대의 바다를 고대의 시선으로] 연재의 마중물 성격이다. 지금까지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바다는 현대의 관점에서 낭만적으로 그려졌다. 과거 연구에서는 고대 한민족의 ‘우수한’ 해양 기술을 강조하거나, 바다를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혹은 고대 정치체의 ‘해외’ 진출에 집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선의 해양사 연구가 바다라는 역사의 무대를 오해한 것은 아닐지 우려가 남는다.
 
이어지는 연재에서는 바다라는 강고한 구조에 도전한 한국 고대의 역사를 고대의 시선에서 다뤄볼 예정이다. 이번 연재의 지향점은 잃어버린 우리 민족사의 자존심을 바다를 통해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며, 바다를 인간이 도전할 수 없는 절대적인 구조로 강조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고대의 관점에서 고대인이 어떻게 바다라는 구조에 도전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목표이다.
 
이를 위해, 다음 연재에서는 최근 출수된 영흥도선과 고대의 선박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바다에 도전한 고대의 해양기술을 살펴보려고 한다. 3번째 연재부터 9번째 연재까지는 백제, 영산강 유역, 가야 각국, 신라 등에 살았던 고대인의 바다 도전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 10번째 연재에서는 고대의 바다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해양 네트워크’의 개념을 제시하며 마무리하려고 한다.
 
흔히 역사학은 특정 시간, 공간에 살았던 인간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포유류에 속하는 인간의 활동은 근본적으로 육지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역사학에서 다루는 공간은 육지를 중심으로 하며, 우리가 말하는 역사는 보통 ‘육지사’를 의미한다. 그런데 지구 표면의 약 70%는 육지가 아니라 바다이다. 한반도도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따라서 ‘육지사’에 대비되는 ‘해양사’의 관점이 필요하다. 앞으로 연재할 글들이 바다라는 구조에 도전했던 고대인의 역사, 즉 ‘해양사’에 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한다.
 
 
 
<미주>
 
1) e-나라지표 해양사고 통계 ()
2) Barry Cunliffe, 2017 On the Ocean ; The Mediterranean and the Atlantic from Prehistory to AD1500, Oxford University Press.
3) 김창겸, 2009, 「당에서 신라를 다녀간 사신들의 항로와 해양경험 : 《태평광기》를 중심으로」, 《신라사학보》17. 
4) 《入唐求法巡禮行記》 卷1, 6월 28일~7월 2일.
5) Fernand Braudel, translated by Sian Reynolds, 1995(1975), The Mediterranean and the Mediterranean world in the age of Philip II,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Fernand Braudel, 주경철, 조준희 역, 2017~2019,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3》, 까치.
6) Fernand Braudel, 강주헌 역, 2012, 《지중해의 기억》(개정판), 한길사.
7) 《宣和奉使高麗圖經》 卷33, 舟楫 供水
8) 전종한, 2017, 「근대이행기 조강 연안의 포구 성쇠와 포구 네트워크」, 《대한지리학회지》52권2호.
9) 海軍本部戰史編纂室, 1954, 《韓國海洋史》, 啓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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