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나의 책을 말한다] 조선후기 조선·청 관계와 ‘사신외교’_김창수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5.03 BoardLang.text_hits 305
페이스북으로 공유 트위터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웹진 '역사랑' 2024년 4월(통권 50호)

[나의 책을 말한다] 

 

조선후기 조선·청 관계와 ‘사신외교’

(전남대학교출판문화원, 2023)
 
 

 

김창수(중세2분과)

 
 
 
조선-청의 정식 관계는 전쟁 끝에 시작되었다. 청의 황제라는 지위를 조선이 인정하지 않았고, 이것은 이후 병자호란으로 연결되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인조정권은 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가운데 청은 중원에서 패권을 확립하였고 청일전쟁이 종결되는 고종 32년(1895)까지 조선왕조와 외교관계를 지속하였다.
 
필자는 250여 년 동안 지속되었던 조선・청 관계의 구조, 전쟁으로 시작된 양국 관계가 안정 국면으로 접어든 18세기의 특성, 개항을 통해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 19세기 후반의 상황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더하여 의례(儀禮)라는 위계가 명확한 관계 속에서 하위에 위치했던 조선이 자신의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측면을 부각시켰다.
 
이 책에서는 ‘사신외교(使臣外交)’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사신’과 ‘외교’는 각각 전근대와 근대를 대표하는 용어인 동시에 조선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상징한다. 교섭이라고 하는 보편적 외교활동과 함께 교섭의 배경이 되는 조선 후기의 역사적 상황을 각각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사신(使臣)과 재자관(齎咨官)을 선택하여 이들의 파견 양상과 활동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사신은 고위 관원이 정·부사의 직함을 띠고 국왕의 명령문서를 청 황제에게 전달하는 방식이었고, 재자관은 역관(譯官)을 책임자로 삼아 청의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전달하였다. 사신과 재자관은 조선・청 관계가 시작되는 인조 15년(1637)부터 양국 관계가 해체되는 고종 31년(1894)까지 북경으로 파견되었다는 장기지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조선・청 관계에서 사신과 재자관은 청의 수도에서 청 관원을 대상으로 교섭할 수 있는 존재였다. 셋째, 사신으로 선발되는 정사와 부사는 2품급의 고위 관료와 그 후보군이라는 계층성을, 재자관은 중인 신분의 역관이 담당했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상세한 내용은 책을 통해서 확인하도록 하고 여기에서는 필자의 주요 논증내용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자 한다.
 

1. 비정기 파견의 자율적 결정

 
조선-청 관계는 청이 요구한 의례에 따라 유지되었다. 조선은 청의 절일(節日: 성절, 동지, 정조)에 맞추어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야 했고, 해당 사행에는 신하가 올리는 형식의 문서와 정성이 담긴 선물을 지참해야 했다. 중국에서 표방한 만국래조(萬國來朝)의 이념을 매년 준수한 나라는 조선뿐일 정도로 양국의 관계는 의례적 측면에서 매우 긴밀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1960년대부터 중국적 세계질서(Chinese World Order)에서 ‘전형적’ 조공국으로 평가받아왔다.
 
분명 조선은 명대(혹은 몽골제국)부터 이어져온 중국 중심의 질서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렇지만 정기사행 외에 훨씬 더 많은 빈도로 파견되었던 비정기 사행에서는 다른 측면이 나타났다. 비정기 사신 즉 별사(別使)는 청의 조·칙(詔勅)을 받거나 중대한 외교현안(반란, 범월 등)이 발생했을 때 파견되었다. 그런데 별사를 언제 파견할지, 혹은 정기사행에 합쳐서 보낼지, 혹은 조·칙을 받지 않았을 때도 보낼지 여부는 오롯이 조선의 결정 사항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청과의 우호를 강화할 필요가 있을 경우, 별사를 선발하여 신속히 파견함으로써 외교적 성과를 얻어냈다. 이와 같은 관행을 극대화한 방식은 정조시기 이른바 ‘진하외교’로 나타난다. 정조는 조서를 받기 전에 청의 경사 당일에 참석하도록 사신을 미리 파견하였다. 건륭제는 정조의 외교방식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해당시기 조선-청 양국의 우호도는 최고조에 달했다.
 
다른 한편 재자관의 존재는 조선-청 양국 외교의 실무적 층위를 잘 보여준다. 역관을 수반으로 하는 재자관은 10명 내외의 소수 인원을 파견하였고, 황제에게 올리는 문서와 물품을 가지고 가지 않았던 만큼 복잡한 의례 과정을 간략히 할 수 있었다. 재자관이 담당한 업무는 표류민송환, 불법월경, 피로인 송환, 군사문제[軍務], 일본의 정세[倭情], 국경문제[疆界], 금지물품밀수, 교역, 공물, 세자의 죽음 통보 등으로 조선・청 양국의 외교 현안 전반에 걸쳐 있었다.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담론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실무외교가 재자관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은 조선-청 관계의 특수한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2. 교섭 활동과 비공식적 접촉

 
근대이행기 국제관계사의 시각에서는 대체로 조선-청 관계를 사대(事大)에 기반한 전근대적 외교로 규정한다. 근대외교의 주요한 지표는 국가 간 평등, 외교관의 상주, 그리고 교섭권인데 이것이 모두 조선에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청는 불평등한 관계였다. 다만 교섭권에 초점을 맞춰보도록 하자. 교섭권과 관련해서 중국 전통의 외교관념인 ‘인신무외교(人臣無外交)’의 원칙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인신무외교’는 ‘사신은 군주의 명령을 전달하기만 하고 일체 사사로운 교류[外交] 활동을 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은 ‘인신무외교’의 원칙을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게도 적용하였다.
 
조선에서도 ‘인신무외교’를 표방하는 경우가 종종 확인된다. 그러나 국가 간 관계를 교섭 없이 유지·조정하는 불가능하다. 조선 사신과 중국 지식인들, 특히 관원과의 교류가 자유로웠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다만 ‘신하의 외교’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특정한 상황이 발생했거나 사신을 비판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을 가질 경우였다. 따라서 중국이 문제삼지 않는다면 ‘인신무외교’ 원칙은 얼마든지 가변적으로 적용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증거로서 조선에서는 사신의 전대(專對) 능력을 중요시하였다. 전대는 《논어(論語)》 「자로(子路)」의 “《시경》 300편을 외워도 정사(政事)를 맡겼을 때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 전대(專對)하지 못한다면 많이 외운들 어디에 쓰겠는가.” 라는 말로 신하의 교섭능력을 뜻하였다. 실제 조선 군신(君臣)이 사신 선발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전대 능력은 중요한 기준이었다. 반면 전대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의 비판도 당연히 존재했다. 전대는 여러 가지 외교적 대응 능력을 포함한다. 외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응 여부의 결정, 공식적 성격의 문서 즉 정문의 제출 여부, 정문의 작성 능력, 비공식 교섭 여부, 비공식 교섭 대상의 확보 등을 모두 포괄한다. 더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사신들이 교섭을 원활히 하기 위한 외교 비용을 지급해주었다. 불우비(不虞備)로 불리는 해당 비용은 순치 연간 정은(丁銀) 기준 100냥에서 강희 연간 중・후반에는 1,000냥으로, 그 이후에는 몇만 냥까지 늘어났다. 따라서 조선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든 외교 수단을 동원했다고 할 수 있다.
 

3. 변화의 계기와 영향

 
조선-청 관계에서 18세기 후반은 변화의 계기였다. 정조의 ‘진하외교’를 통해 사신 파견이 빈번해졌고 건륭제는 조선을 우대하는 조치를 연달아 내렸다. 이즈음 건륭제는 폐쇄적인 궁정연회를 개방했다. 그런데 청에서 매해 개최되는 연회에 참석할 수 있는 외국은 조선이 유일했다. 궁정연회는 연말부터 시작되어 정월 보름 전후까지 여러 차례 열렸는데, 잦은 연회 참석으로 인해 그동안 조선 사신에게 적용되었던 이동의 제한 즉 문금(門禁)이 완화되었다. 연회라는 공식적 공간에서 조선 사신들은 청의 고관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고, 문한을 매개로 하는 교류가 지속되면서, ‘인신무외교’의 분위기는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궁정연회를 계기로 사신의 사적 교류는 점차 확대되었다. 19세기 들어서면 조선 사신은 개인 간 교류를 넘어 문인 집단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기윤(紀昀), 옹방강(翁方綱) 등 중요 문인을 비롯하여 강전전계(江亭展禊), 고사수계((顧祠修禊), 용희사(龍喜社)와 같은 문인 모임과 지속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서는 만인(滿人)과의 교류도 종종 나타났다. 조선이 청을 이적(夷狄)으로 규정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가 만주족이라는 종족의 문제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만인 지식인과의 교류는 청 인식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세기 후반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서양의 실제적인 압박 속에서 사신의 문한 교류망은 교섭 기반으로 활용되었다. 고종 3년(1866) 왕비 책봉의 요청을 위해 북경을 방문한 조선 사신은 프랑스가 병인박해를 이유로 조선을 침공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청의 예부상서를 포함하여 청 관원들로부터 정확한 정보와 조언을 받고자 하였다. 이러한 ‘인신외교(人臣外交)’의 대상이 된 청 관원들은 거의 대부분 문한교류망의 범위에 있던 인사들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개항 전후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서양의 침략이라는 새로운 변수는 외교 관행에 일정한 변용을 일으켰던 것이다.
 

4. 전통의 지속과 변용

 
고종 13년(1876) 조선은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고, 뒤이어 1880년대 유럽 각국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약의 세계에 진입했다. 그러나 고종 31년(1894)까지 조선은 기존의 관행에 따라 북경에 정기, 비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했다. 새로운 국제환경 속에서 사신 파견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우선 1880년대까지 사신은 새롭게 등장한 외교사안도 종래의 사신 및 재자관을 통해 처리했다. 임오군란 및 갑신정변 등과 관련하여 대원군 방환 및 청군 주둔을 요청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조약, 국경 획정, 군대 주둔, 홍삼세 면제, 공사(公使) 파견 등 소위 근대적 사안들은 재자관을 통해 전달 및 교섭하였다. 근대이행기 국내외의 격변 속에서 사신 등의 파견빈도는 이전보다 높아졌다. 한편 사신과 재자관은 사안에 따라 공조함으로써 교섭의 효과를 높였고, 여기에 1880년대 중반부터 천진(天津) 주재하는 조선 관원들도 합류하였다.
 
사신과 재자관이 여전히 중요한 외교주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북경에서 교섭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이후 청은 조선의 외무(外務)를 서울-천진으로 단일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통적 관계를 유지하는 한, 조선은 사신과 재자관을 언제든지 북경으로 파견할 수 있었고, 필요에 따라 북양아문을 거치지 않고 황제에게 직접 전달함으로써 교섭 대상을 다변화하였다. 근대이행기에도 전통적 외교방식은 여전히 일정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 연구를 통해 사신의 파견 구조, 사신의 교섭활동, 시기적 변화, 관행의 지속 및 변용을 논증하고자 했다. 필자의 역량과 근면함의 부족으로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조선-청 관계를 공부하는 동학들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