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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비평] '고려 거란 전쟁', 변화하는 국제 정세, 살아남은 고려 외교_이승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3.05 BoardLang.text_hits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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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2월(통권 48호)

[미디어 비평] 

 

'고려 거란 전쟁', 변화하는 국제 정세, 살아남은 고려 외교

 

 

이승민(중세1분과)

 
 
 
고려의 역사를 주제로 한 미디어콘텐츠는 상대적으로 적고 그마저도 호평을 받은 작품은 희귀하다. KBS 고려사 시리즈의 첫 작품이자 이환경 작가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태조 왕건’ 이후 고려시대의 역사는 사극의 소재로서 나름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후 고려시대를 대상으로 한 사극은 ‘태조 왕건’만큼 성공한 작품은 나타나지 않았다. 2000년대 초 KBS 고려사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무인시대’는 초반에 큰 호평을 받았으나 작가 교체 등의 문제로 인하여 결국 초반에 비하면 저조한 시청률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2009년에 방영되었던 ‘천추태후’ 역시 초반에는 20% 중반대라는 시청률을 보였지만 마찬가지로 후반으로 갈수록 시청률은 크게 저하되었다. ‘기황후(2013~4)’는 독특하게도 초반 낮은 시청률에서 출발하여 후반으로 갈수록 높은 시청률을 보였지만 ‘보보경심 려(2016)’, ‘왕은 사랑한다(2017)’는 아예 초반부터 저조한 시청률로 고려시대 사극은 정통 사극이든 퓨전 사극이든 드라마화해서는 성공하기 어려운 시대라는 인식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나 근대를 대상으로 하는 사극 제작이 활발한 데에 비하여 고려시대의 사극은 제작 소식이 잘 들리지 않았다. 이에 더하여 전반적으로 정통 사극의 제작 환경이 점차 어려워지고 시청률 확보가 용이한 퓨전 사극의 제작이 활발해지는 미디어 환경에서 정통 사극을 표방한 ‘고려 거란 전쟁’의 제작과 방영 소식은 그래서 더 반가웠다.

드라마는 거란 2차 침입을 중심으로 강감찬과 양규를 비롯한 무장들의 활약이 전반부를 구성하고 있으며 현종의 몽진과 고려 내부의 권력 및 정치 변화가 후반부를 구성하며 마지막은 귀주대첩으로 마무리할 것으로 보인다. ‘고려 거란 전쟁’은 최근 OTT 등의 활성화로 인하여 전반적으로 낮아진 지상파 시청률과 동시에 초반에 강력한 경쟁자였던 MBC 사극 ‘연인’과의 경쟁구도를 감안하면 나름대로 괜찮은 시청률을 보였다. 최근에는 ‘연인’의 후속작인 ‘밤에 피는 꽃’에 밀려 10% 이하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하였고 17화 이후로는 드라마의 진행에 대한 시청자의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밤에 피는 꽃’의 종영 후에는 다시 원래의 시청률을 회복하였다. 이는 정통 사극에 대한 시청자의 확고한 수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거란 전쟁’에 대한 시청자와 원작자(이 작품은 길승수 작가의 《고려거란전쟁: 고려의 영웅들》이 원작이다.)의 비판은 현재의 드라마 진행이 기대와는 굉장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새로운 패권국가의 등장과 피할 수 없는 전쟁

 
고려와 거란의 전쟁은 당 멸망 이후 동아시아 국제 정세가 재편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고려 성종 대인 993년의 1차 전쟁을 시작으로 1019년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막을 내리는 이 시기는 오랑캐로 취급받았던 거란이 새로운 패권국가로 등장하는 과정, 연운 16주를 되찾지 못하고 온전히 중화로서 자리매김하지 못하는 송, 그 사이에서 결과적으로 국가를 보존했던 고려의 외교가 교차되는 시기였다.

907년 당이 멸망하고 후량이 건국되면서 오대십국 시대가 열렸다. 중원 지역의 지배력이 하나로 모이지 않은 데 비해 북방 지역에서는 야율아보기가 거란 연맹의 수령이 되면서 주변의 실위·해·습·토혼 등을 차례로 정벌하고, 발해를 멸망시키면서 동아시아 북방 지역을 장악했다. 나아가 압록강 일대 여진 10만구를 포로로 잡는 등 남쪽 방면으로의 세력 장악도 본격화되었다. 

고려는 후삼국 통일 이후 거란에 대한 적대적 외교를 선언했다. 거란이 보낸 낙타를 만부교 아래에서 죽이고 사신을 유배보내는 행위는 상대를 적이라고 분명하게 규정하는 적대적인 외교이다. 이와 함께 고려는 후주-송과 책봉관계를 맺어 중원 왕조에 대한 외교를 중심축으로 만드는 한편 지속적으로 북방 변경을 확장하면서 청천강 이북 지역에 성을 축조했다. 성종 초에는 비록 여진의 반발로 물러났으나 압록강 지역에 관성(關城)을 쌓으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1차 전쟁 발발 전, 거란과 고려는 상호 적대적 관계로서 본격적으로 부딪치지 않았지만, 사이에 있는 여진을 공격하고 장악해가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거란이 송과의 전면전, 중원 진출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고려를 공격하여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993년 1차 거란과의 전쟁은 대립과 갈등 위에서 시작했으나, 사실 전투보다는 외교에 치중되어 있었다. 소손녕을 필두로 압록강을 넘은 거란군은 청천강을 경계로 진을 치고 고려에게 항복을 요구하다가, 항복이 지연되는 듯하자 안융진을 공격하면서 강화 회담으로 고려를 끌어들였다. 고려는 안융진 방어에 성공하는 한편으로 서희가 거란의 핵심 의도를 파악하여 적극적으로 외교 회담을 이끈 결과 압록강까지의 영역이 고려의 영토임을 양국이 인정했던 것이다. 
 
 

<천추태후> 서희, <고려거란전쟁>에서 1차 전쟁을 다루지 않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서희와 소손녕의 교섭은 양쪽 모두에게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었다. 거란은 고려와 책봉관계를 맺음으로써 송에 대한 고려의 사대를 철회시켰고, 고려는 송에서 거란으로 책봉국을 바꾸는 것의 대가로 압록강 동쪽 280리의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양국이 우호관계로 거듭난 것은 아니었다. 이듬해 2월경부터 고려와 거란을 왕래하기 위한 성곽과 해자 등을 만드는 계획에 착수했는데, 사실상 명분은 조공로였으나 실제로는 흥화진을 포함한 주요 군사 방어시설을 구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드라마 전반부의 가장 큰 인상을 남긴 흥화진은 압록강을 넘어 처음으로 마주하는 고려의 최전선의 진(鎭)으로서 1차 전쟁의 결과로 설치된 강동 6주의 하나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고려와 거란의 책봉 관계는 송의 입장에서 뼈아픈 일이었다. 이미 거란은 고려를 공격하기 전인 990년경에 당항(黨項)과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송의 서북쪽 배후를 장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이 고려가 거란에게 책봉을 받자, 송은 동아시아 국제 사회 내에서 입지가 더욱 좁아지게 되었다. 
 
결국 송과 거란의 전면전이 시작되고 그 결과 송이 거란에게 막대한 세폐를 지불하고 숙질(叔姪) 관계를 맺을 것을 서약한 ‘전연의 맹’이 맺어진다. 거란과 송은 실제로는 힘의 차이가 분명했으나, 의례적으로는 황제로서 격식을 갖춘 두 명의 천자(天子)가 양립한 구도였다. 이후 동아시아는 표면적으로 안정적인 정세를 이루게 되었다. 고려가 몇 차례 송으로 사신을 보내 거란 견제를 시도했으나, 이미 거란에게 군사적으로 밀리고 있었던 송이 고려와 협력하여 거란을 견제하는 것은 당시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비로소 거란은 군사․정치․외교면에서 송과 고려, 서하 등 동아시아 여러 국가의 우위에 서게 된다. 
 
 

다시 전쟁, 거란이 내세운 명분 ‘친조’와 실리 ‘강동 6주’

 
1010년 거란 성종은 고려에 대한 친정을 선언한다. 성종 대의 전쟁과는 달리 황제가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한 것이다. 거란은 7월 목종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사신을 보냈다. 고려에서는 8월과 9월에 걸쳐 거란에 사신을 보내 이를 해명하고 외교로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동시에 거란이 전쟁을 강행하고자 하는 분위기를 알아차렸던 것으로 보인다. 10월 전쟁을 대비해 군사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임명해 군사 30만 명을 통주에 편성했고, 거란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공식적인 선전포고가 전해지자, 거란에 재차 사신을 보내는 등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고려는 전쟁을 준비하면서도 전쟁을 치르지 않기 위해 양면으로 움직인 것이다. 외교에서 모 아니면 도를 외치며 적대 국가를 만드는 것이나,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주전론만이 옳은 길이라고 여기는 것만큼 위험한 전략은 없을 것이다. 
 


<고려거란전쟁> 승천태후를 위한 효심으로 고려 영토를 정복하겠다고 말하며 전쟁을 선언하는 거란 성종 
 
 
한편, 성종은 친정에 나선 만큼 분명한 전쟁 명분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천명’을 받은 천자이자 황제로서 자신이 책봉한 고려 국왕 목종이 강조에 의해 폐위되었으므로 이를 바로잡고 벌하는 ‘정벌’이 명분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내부의 권력 관계 변화나 폭정 등으로 왕위 교체가 발생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이른바 ‘황제의 정벌’이 성사되지는 않았다. 전쟁은 명분으로 출발하지만 결국 실익의 문제이다. 명분과 실리는 무엇을 선택하는 지가 아니라 어떤 명분과 실리를 결합시켜 얻을 것인지를 봐야 한다. 거란은 명분으로서 현종의 친조를, 실리로서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한다. 즉 친조를 통해 고려가 거란에게 사대하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확인받고, 나아가 거란의 입장에서 조금 쉽게 내어준 영토를 다시 받아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끝내 거란은 고려에게 현종의 친조도 강동 6주도 받아내지 못했다.
 
 

전쟁의 양면, 희생자와 영웅

 
성종은 결국 개경까지 진입했고,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한다. 압록강에서 개경까지 국토의 반을 지나는 전선(戰線)의 길이만큼이나 전쟁의 참화를 겪는 희생자가 생겼을 것이다. 여기에서 드라마를 통해 전쟁 영웅으로서 양규가 재조명된다. 도순검사로서 흥화진 방어에 성공한 양규는 이에 그치지 않고 아군을 수습하고 거란군을 공격하여 3만여 명의 고려인을 구했다. 
 
양규가 다른 드라마보다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전투와 성과가 자세히 그려진 점도 있지만, 포로가 된 고려인을 드라마적 상상력을 발휘해 입체적으로 그려내면서 그들을 구한 양규의 영웅적 면모가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고려거란전쟁> 포로가 된 고려인들을 구하는 양규와 군사들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리는 지점으로서 약하고 보호 대상이 되는 어린 아이가 포로가 되어 끌려다니고, 폭력에 노출되고, 노역에 동원되는 것은 전쟁의 이면에 일어날 수 있는 그려냈다. 전쟁에서 무기를 든 군사가 아니라 노인들, 아이들, 여성들을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고려-거란 전쟁이 그러했고, 현재의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양규는 그러한 현실적 역사 위에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약한 자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포로들을 구했으며, 함정임을 알았더라 하더라도 피하지 않는 모습을 그려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이 『고려사』에서 기록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 더욱 드라마의 캐릭터를 돋보이게 해주었다. 양규가 결국 죽고 거란군은 압록강 서쪽으로 물러난 뒤 포로로 잡혔던 소녀가 아버지를 만나는 것은 결국 희생자와 영웅의 등장이 전쟁의 양면임을 보여준다. 이 드라마의 전반부가 ‘정통 사극’으로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치열한 전투 장면과 함께 전쟁의 역사가 가진 양면성을 함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정통 사극’을 원한다면

 
‘고려 거란 전쟁’의 전반부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영웅 서사의 주인공으로서 양규라는 실존인물이 입체적으로 그려졌던 반면 후반부는 전쟁 이후 고려의 개혁과 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현종은 거란군에게 점령되었던 개경을 재건하는 동시에 사회 전반의 개혁을 모색한다. 이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박진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전쟁으로 두 아들을 잃은 호족으로 설정되었는데 아들의 상실에 대한 책임을 현종에게 돌린다. 그는 현종의 몽진 중에 현종을 암살하려 시도하였고 암살 시도 실패 후에는 김훈과 최질의 반란을 뒤에서 조종한다. 박진은 아마도 역사 고증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 위하여 가상으로 설정된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실존 인물에 비하여 가상의 인물은 역사적·극적 상상력을 가미하는 데에 더 자유로운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인물상이 입체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김훈과 최질의 반란의 원인인 ‘무신에 대한 차별’이 이미 극 중에서 복선으로 제시된 상황인데 박진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하여 반란을 사주한다는 것은 굳이 필요한 설정이었을까 한다. 특히, 정통 사극을 표방한 ‘고려 거란 전쟁’에서 말이다.

어떤 시청자는 말한다. “박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놓아줘라. 그 어떤 설득력도 없다.” 전반부의 호평과 달리 후반으로 갈수록 ‘고려 거란 전쟁’은 시청자들의 비난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해묵은 역사 왜곡 문제나 고증과 같은 콘텐츠의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다. 드라마가 재미가 없고 그 서사가 시청자들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근원적인 문제이다. 이 시대를 다룬 정통 사극이 계속 등장하고 이를 통하여 사람들이 고려시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고려시대 전공자로서의 존재론적 의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고려 거란 전쟁’이 마지막에는 부디 ‘풍부한 재미’와 ‘설득되는 서사’로 유종의 미를 거두길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