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의 사회사] 머나 먼 유배 길 -조선의 유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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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 먼 유배 길 -조선의 유배 (1)

심재우(중세사 2분과)

1.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 유배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르미 벤담. 우리에게 공리주의자로 잘 알려진 그는 1791년 원형감옥 ‘파놉티콘(Panopticon)’이란 것을 설계하였다. 파놉티콘의 구조는 감옥의 중앙에 감시탑을 세우고 원형의 벽면 둘레에 죄수들의 감방을 배치하는 형태로, 감방은 밝게 하고 감시탑은 늘 어둡게 해서 죄수들이 교도관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자연히 파놉티콘에 갇힌 죄수들은 보이지 않는 감시탑 속의 누군가로부터 늘 감시받고 있다고 느끼게 되고, 나중에는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고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벤담이 설계한 뒤 별로 주목받지 못한 파놉티콘 감옥은 훗날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에 의해 새롭게 주목받게 되었다. 푸코는 잘 알려진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이 파놉티콘의 감시 체계를 사회 전체를 해석하는 데 활용하여, 근대 자본주의사회는 권력자가 만인을 감시하는 거대한 감금사회, 감시사회로 이해하였다.


<그림 1> 파놉티콘 : 벤담이 설계한 원형 감옥 ‘파놉티콘’의 설계도. 『감시와 처벌』(강원대 출판부, 박홍규 번역) 앞부분에 실려 있다.

사회에 대한 푸코의 진단이 과연 적실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최근 들어 전자주민카드, 전자출입증 등 각종 전자문서를 통한 권력기관의 개인 사생활 파악이 가능해지면서 푸코의 경고는 엄연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의 지적처럼 이제 가정, 학교, 군대, 병원, 공장 등은 감옥과 다름없는 또 하나의 감시 통제기구일지도 모르겠다.

  푸코의 심오한 철학적 담론은 제쳐두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늘날 죄인의 신체를 구속하는 대표적인 감시 기구가 감옥이란 사실이다. 우리나라 현행 형법에 등장하는 형벌은 사형, 징역, 금고, 자격상실, 자격정지, 벌금, 구류, 과료, 몰수 등 모두 9종인데, 사형 다음의 무거운 형벌인 징역과 금고는 감옥살이를 의미한다. 다만 같은 감옥살이라 하더라도 죄수들이 일을 해야 하는 징역형에 비해, 노역에서 면제된 금고형이 더 가벼운 형벌이었다. 그럼 조선시대는 어떠했을까?

  조선시대에도 감옥이 있었지만, 감옥은 형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를 가둬두는 곳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구치소인 셈이다. 따라서 기결수를 가둬둘 감옥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사형보다 한 단계 아래의 큰 죄를 지은 자들에게 별도의 형벌로 다스렸는데, 그것이 바로 유배형이다. 조선시대에 시행된 다섯 가지 형벌로는 사형(死刑), 유형(流刑), 도형(徒刑), 장형(杖刑), 태형(笞刑)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유형이 바로 유배형을 말한다.


<그림 2> 섬으로 보내지는 죄수 : 일본 에도시대에도 조선시대 유배와 같은 추방형이 있었다. 추방형 중에서 가장 무거운 형벌은 ‘엔토(遠島)’, 즉 멀리 떨어진 섬으로 추방하는 것이었다. 『에도시대의 고문형벌』(어문학사, 임명수) 86쪽에 실려 있다.

그럼 유배형은 어떤 형벌인가? ‘귀양’이라는 말로 잘 알려진 유배형은 중죄를 지은 자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타관 땅에 보내 종신토록 살게 하는 형벌이었다. 그런데 오해가 있다. 유배형은 양반들에게만 행해진 형벌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정치범으로서 양반 관료들이 유배된 사례가 많긴 하지만, 일반 평민, 천민들도 유배형에 처해지곤 했다. 또 하나. 조정에서 뿐 아니라 지방의 관찰사 직권으로도 형사 잡범에게 유배형에 처할 수도 있었다.

  어찌 보면 유배형은 형기가 종신이라는 점, 유배지에서 노역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늘날로 치면 ‘무기금고’에 비유할 수 있다. 유배지에서의 활동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유배형이 지금과 같은 좁은 감옥살이에 비해 훨씬 나았다고 할 지 모르겠지만, 그 나름의 적지 않은 애환이 담겨 있었다. 오늘은 조선시대 독특한 형벌인 유배형의 특징은 무엇인지, 유배지 선정과 죄수들의 실제 유배길은 어떠했는지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2. 이름난 유배지들

먼저 유배형의 등급부터 알아보자. 유배형은 죄인의 거주지에서 유배지까지의 거리에 따라 2천리, 2천 5백리, 3천리 등 세 가지 등급으로 나뉘는데, 죄가 무거울수록 더 먼 곳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 3천리 밖으로의 유배가 가능했는가 하는 점이다.

  중국의 경우 워낙 땅이 넓다보니 세 등급으로 유배 보내는데 별 문제가 없었지만, 조선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그래서 죄수가 정해진 유배지로 이동할 때 빙빙 돌고 돌아 해당 리 수를 채우게 하기도 하였으며, 아예 세종 12년(1430)에는 등급별로 유배지를 정해버렸다.

  예를 들어 죄인이 전라도에 사는 경우의 유배지로는 경상도, 강원도, 내지 함경도 고을이나 해변으로 한정하였는데, 다른 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각각 대상 유배지가 정해졌다. 이 세종 때 규정에 따르면 ‘유 2천리’는 거주지로부터 6백리 밖 고을, ‘유 2천 5백리’는 7백 5십리 밖 고을, ‘유 3천리’는 9백리 밖 해변 고을이 유배지가 된다. 말이 3천리이지 실제 유배지는 9백리 밖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수교정례(受敎定例)』 현종 13년(1672) 수교에서 보듯이 현종 때에는 최소한 1천리 밖으로 유배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등 법에 정한 유배지 조항은 후에도 여러 차례 원칙이 바뀌었다. 또한 실제 운영 면에서도 원칙과 많은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는데, 유배지를 배정하는데 정실이 개입되어 거주지 인근 고을에 형식적으로 유배 보내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아예 서울 근교인 강화도 교동(喬桐)은 왕족들의 유배지로서 유명하였다.

  사실 조선시대 거의 전 국토가 유배지였다. 19세기 후반에 편찬된 유배지의 거리, 유배지로의 이동 경로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의금부노정기(義禁府路程記)』를 보면 336개 고을이 유배지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3> 조선시대 유배지로 이름난 전라도 여러 섬들 :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은 유배인들을 종신토록 격리시키기엔 안성마춤이었다.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2(청년사, 정연식) 179쪽 수록.

유배지 가운데 가장 혹독한 곳으로는 아무래도 삼수, 갑산과 같은 함경도 변경 고을이나 흑산도, 추자도, 제주도 등 전라도의 외딴 섬을 들 수 있다. 이들 지역은 거리도 거리지만 워낙 변두리이다 보니 해당 지역 사람들이 살기에도 기후나 물자 등 생활 여건이 열악하였다.

  특히 섬 지역은 육지와 차단되어 있어서 유배인들의 배소 이탈 염려가 없는 최적의 유배지였다. 반면, 유배인들에게는 운 좋게 중간에 사면되어 유배에서 풀려나거나 죽지 않는 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악몽 같은 땅이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아무리 먼 유배지라고 하더라도 변경 지역이나 해안 마을에 죄인을 유폐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정쟁이 격화되면서 이들 지역 대신에 섬 지역으로의 도배(島配)가 크게 늘었다. 특히 제주도를 비롯한 남해안 다도해의 여러 섬들이 유배지로서 애용되었다.

  특히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인 제주도는 본토와 격리된 절해고도(絶海孤島)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조선시대 많은 관리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관리 뿐 아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인조 반정으로 쫓겨난 국왕 광해군의 최종 유배지도 제주도였다. 처음 강화도에 유배된 광해군은 몇 차례 옮겨 다니면서 15년을 떠돌다가 1637년 제주도에 들어와 67세의 나이로 병사하기 까지 3년 여를 이곳에서 지냈다.


<그림 4> 제주도의 오현단 : 조선시대에 제주도에 유배되거나 관리로 부임하여 이곳 학문과 교육 진흥에 공헌한 다섯 분을 기리고 있는 제단. 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에 따라 헐린 귤림서원(橘林書院)이 있던 곳이다.

지금의 제주시 이도동에는 제주도 사람들이 추앙하는 조선시대 다섯 분 관리들의 위패가 모셔진 ‘오현단(五賢壇)’이 있다. 여기에 모셔진 제주 오현은 김정(金淨), 김상헌(金尙憲), 정온(鄭蘊), 송인수(宋麟壽), 송시열(宋時烈) 등인데, 이 가운데 김정, 정온, 송시열 세 분이 유배인이다. 제주도에서 유배인들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당시 제주도의 3개 읍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가운데 특히 대정현으로 유배객이 주로 몰렸다. 이 곳은 제주도에서도 가장 바람이 드세고 척박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중죄인을 종신 유폐시키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많은 유배객들에게 하도 시달려서 대정현의 포구 모슬포를 사람이 살지 못할 곳이라 빗대어 ‘못살포’라고 했을까?

  제주도 외에도 유배지로서 악명을 떨친 곳으로는 전라도 연안의 망망대해 외로운 흑산도, 추자도, 거제도, 신지도 등 조그만 섬들이었다. 이 중 제주도, 거제도와 함께 조선의 3대 유배지로 일컬어지는 흑산도는 오늘날 가수 이미자가 노래한 ‘흑산도 아가씨’로 유명한데,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도라 하였다.

  좁은 땅에 극도로 열악한 생활환경, 육지 소식조차 제대로 확인할 길 없는 외롭고도 쓸쓸한 처지. 아마도 ‘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며 속이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가사처럼 유배객들의 가슴도 이곳에서 시커멓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추자도는 정조 때 귀양간 대전별감 출신 안조환(安肇煥)이 쓴 유배가사에 ‘하늘이 만든 지옥(天作地獄)’으로 묘사될 정도로 최악의 유배지 중 하나였다. 이밖에 거제도, 신지도 등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조그만 섬들도 흑산도, 추자도와 별반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중죄를 진 유배인들이라도 열악한 섬에 평생 버려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가혹했다. 그래서 중간에 절도(絶島)에 유배보내지 못하게 하는 조치가 취해지기도 하였다. 영조는 1726년(영조 2)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흑산도에 유배보내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이보다 2년 뒤에는 관아도 없고 사람도 많이 살지 않는 조그만 섬에는 유배보내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고종 초기에 만들어진 『대전회통』에서는 추자도, 제주목 유배를 원칙적으로 금지시켰다.


<그림 5> 『대전회통』에 나오는 유배지 제한 조치 : 빨간 형광펜으로 표시한 부분이 흑산도, 추자도 등 섬 지역에는 유배객을 보내지 말도록 하는 규정이다. 『대전회통』 형전 「추단(推斷)」 항목에 실려 있다.

그렇지만 규제 조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이후에도 이들 섬들에 유배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예컨대, 다산 정약용의 형 정약전(丁若銓)이 순조 1년(1801) 천주교에 연루되어 흑산도에 유배된 일은 유명한 일이거니와, 고종 때 최익현, 김평묵, 김윤식 등 상당수 지식인들의 경우 『대전회통』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로 귀양가곤 했다.

3. 머나 먼 유배 길

앞서 언급했듯이 유배형은 사형 다음의 중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관료들에게 한 두 번의 귀양살이는 흔한 일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조선시대 당파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정쟁의 소용돌이에 연루된 지식인들 상당수가 경험한 유배! 그럼 이들 유배죄인들의 유배지까지의 노정은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먼저 유배인이 관원 신분일 경우 호송 책임은 의금부에서, 관직이 없는 평천민은 형조에서 담당했다. 그런데 같은 관원이라도 등급에 따라 호송관이 달랐는데, 정2품 이상, 즉 지금으로 치면 장관급 이상 고위 관원은 의금부 도사(都事)가 맡았다. 그리고 이외의 관원들의 경우도 당상관은 서리(書吏), 당하관은 나장(羅將)이 나누어 맡았으며, 관직과 무관한 평천민은 지나는 고을의 역졸(驛卒)이 번갈아가며 호송을 책임졌다.

  지금처럼 편리한 교통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이상, 죄인들이 유배지까지 하루 이틀 만에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며 수 십일이 소요되는 게 예사였다. 규정상 하루 평균 8, 90리는 가야했기 때문에 이동 수단으로는 말이 자주 이용되었다. 그럼 유배지까지 가는 비용은 누가 충당했을까?

  유배지에 도착하기까지 드는 비용은 대개 유배인 자비로 해결해야 했으며, 더 나아가 압송관의 여행 경비까지도 어느 정도 부담하는 것이 관례였다. 압송관 입장에서도 죄인의 압송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으므로 으레 수고비를 챙겼다.

  이는 유배인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되기도 하였는데, 실제로 선조 때 광해군 책봉을 건의한 정철(鄭澈)이 실각하자 그 일파로 몰려 1591년 함경도 부령(富寧)에 유배된 홍성민(洪聖民)의 경우 유배지로 떠나기 위해 타고 갈 말 여섯 필, 옷가지와 음식물 등을 장만하기 위해 가산(家産)을 턴 상황을 문집에 남기고 있다.

  한편, 어떤 직책, 어떤 신분인가에 따라 압송관도 달랐듯이 유배지로의 긴 여행길도 죄인 처지에 따라 대우가 크게 달랐다. 평천민 대부분의 유배 길은 유배지에서의 비참한 생활 못지 않게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이동하는 것은 예사였으며, 밤새 잠도 자지 않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반해 조만간 정계 복귀 가능성이 높은 관리, 제법 힘깨나 쓰던 돈 많은 양반들의 경우 유배 길의 불편함은 그리 크지 않았다. 고을 수령과 지인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며, 지나는 길에 선산(先山)에 들러 성묘를 하거나 중간에 며칠씩 쉬어가는 여유를 부릴 수도 있었다.

  조선대 김경숙 교수의 유배 일기 분석에 따르면 관직자들의 유배 길은 죄를 짓고 벌을 받으러 간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로 가득했으며, 심지어 호화판 유람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예컨대, 경종 2년(1722) 위리안치의 명을 받고 갑산(甲山) 유배 길에 오른 윤양래(尹陽來)의 경우 전체 18일 여행 동안 가는 곳마다 고을 수령으로부터 후한 접대는 물론 많은 노자를 받았다.

  그가 중간에 얼마나 많은 물자를 제공받았던지 수령이 챙겨준 물건을 싣고 가던 말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넘어지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심지어 윤양래의 호송관인 의금부 도사는 같이 동행하지 않고 별도로 출발했으며, 중간에 험준한 고갯길에서는 자신이 타고 가던 가마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림 6> 조헌 신도비 : 충북 옥천에 있는 조헌 묘소 앞의 신도비. 충북 유형문화재 183호

선조 22년(1589) 함경도 길주(吉州)로 유배된 조헌(趙憲)은 경유지인 안변(安邊)에서 부사(府使)와 활쏘기와 만찬을 즐기다가 다음날 술이 깨질 않아 출발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광해군 10년(1618)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하다가 북청(北靑) 유배 길에 오른 이항복(李恒福)은 가는 길에 함흥(咸興)과 홍원(洪原)에서 기생 덕선(德仙), 조생(趙生) 집에서 묵기도 하였다. 특히 기생 조생(趙生)은 이전에 유배객 윤선도(尹善道)와의 술 자리로 인해 그 총명함이 서울까지 알려져 있었는데, 이항복은 유배 가는 길에 일부러 그녀를 만나는 호사를 부렸다.

<그림 7> 백사 이항복 초상화 : 필자 미상의 이항복 초상화. 광해군에게 인목대비의 폐위 반대 상소를 올렸던 이항복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났으며, 5개월 만에 병사하는 불운을 맞는다.

한편, 섬으로 떠나는 유배 길은 육지와는 사정이 또 달랐다. 간혹 파도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제주도로 가는 유배객을 실은 배가 풍랑 때문에 표류하여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전라도 관찰사나 제주 목사의 보고가 적지 않게 등장한다.

  육지에서 제주도로 들어갈 때에는 전라도 해남, 강진, 영암 등지에서 출발하여 보길도, 소안도, 진도 등을 경유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거센 바람 때문에 몇 일 씩 배를 띄우지 못해 지체하기도 했으며, 풍랑에 떠밀려 제주도의 어느 포구에 도착할 지도 일정하지 않았다.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된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아우 김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라도 강진을 출발해 무사히 제주도에 도착한 사실에 안도한 것을 보면 제주 유배 길은 그곳 생활만큼이나 힘든 여정이었던 것 같다.

  이처럼 유배 길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조정에서 힘깨나 쓰던 관리인 경우 유배 길의 불편함이 다소 해소될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절대 마음까지 홀가분할 수는 없었다 사실이다. 죄를 짓고 벌을 받으러 떠나는 길인만큼 배소(配所)에서 벌어질 앞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