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한많은 대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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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많은 대한문

홍순민(중세사 2분과)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혈연 집단의 동질성을 쉽게 확인하기 위해서 사람 이름을 지을 때도 같은 세대에서는 같은 글자, 항렬자(行列字)를 썼다. 항렬자를 쓰지 않은 사람은 서출이거나, 혹은 천출, 의붓 자식으로 취급되어 그 가문의 일원으로 행세하는 데 지장이 많았다. 사람들이 항렬자를 쓰듯 건물 이름을 짓는 데도 일정한 내재적 질서가 있었다. 이를테면 궁궐의 정문 이름은 마치 항렬자를 쓴 것인양 모두 ‘화(化)’자 돌림이다. 경복궁의 광화문(光化門), 창덕궁의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의 홍화문(弘化門), 경희궁의 흥화문(興化門)이 그렇다. 여기서 ‘화’자는 교화(敎化) 또는 덕화(德化)를 뜻하는 것일 터이니, 궁궐 문들에 담긴 뜻은 각각 그것을 ‘밝게 한다, 두텁게 한다 혹은 바로 세운다, 크게 한다 혹은 널리 편다, 일으킨다’는 것임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유독 지금의 덕수궁―경운궁의 정문 이름은 대한문(大漢門)이다. ‘화’ 자 돌림의 다른 궁궐 정문들과는 완연히 다르다. 왜 그럴까? 경운궁이 애초에 임진왜란 당시 선조임금이 의주로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서 임시로 기거하기 시작한 궁궐―행궁(行宮)이었기 때문에 그럴까? 애초부터 정식 궁궐―법궁(法宮) 이나 이궁(離宮)이 아니었기에 정문 이름도 다른 궁궐과 통일을 기하지 않았을까? 그런 점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1897년(광무 1) 고종임금이 일본의 압박을 피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임시 옮겨 갔다가 환궁하기 위해 경운궁을 새로 지을 때는 그 정문을 번듯하게 지었고, 그 이름도 다른 궁궐의 정문과 호흡을 맞추어 지었다. 그 이름이 인화문(仁化門)이다.

인화문은 지금의 서울시 별관으로 쓰고 있는 건물의 정문 부근,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과 침전인 함령전의 사이로 내다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인화문 앞은 지형상 장소가 좁고, 큰 도로와 연결이 되지 않는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1900년대 들어오면서 지금의 대한문 쪽으로 도로가 나면서 점차 대한문이 정문 노릇을 하게 되고 인화문은 자주 쓰지 않는 문으로 퇴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 자체는 유지되다가 일제시기 들어서서 없어져 버렸고, 그 담장은 이른바 “덕수궁 돌담길”로 남게 되었다.

인화문을 대신하여 경운궁의 정문 노릇을 하게 된 대한문의 원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다. 1890년대 말, 1900년대 초엽의 사진들을 보면 편액이 또렷이 “대안문”으로 되어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 대안문이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뀐 계기는 1904년의 경운궁 대화재였다. 1904년(광무 8) 4월 14일 고종이 기거하는 건물인 함령전의 온돌을 고치고 점화할 때 실화하여 함령전만 아니라 수많은 전각이 불에 탔다. 경운궁에 불이 난 바로 그날 고종은 여러 대신들을 불러 곧바로 중건을 명하였다. 중건 공사는 1906년 봄에 끝났는데 그 김에 대안문도 새로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바꾸기로 결정되었다. 경운궁 중건을 담당하였던 중건도감의 보고를 받은 고종의 결정이었다.

일제시기 초엽 1912년 무렵에 벌써 그 대한문 앞을 치면서 도로가 났다. 지금 남대문에서 광화문 네거리로 이어지는 태평로(太平路)다. 그 길이 나면서, 또 해방 이후 두어 차례 길이 확장되면서 대한문은 뒤로 물러 앉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지금 대한문은 도로에서 10m도 떨어지지 않게 바투 앉아 있다. 보통 사진기로 그 전경을 찍다 보면 도로로 나가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다. 당연히 그 안팎의 시설이나 구조도 망가져 있다. 계단을 오르게 되어 있고, 그 계단 좌우에 그곳을 엄호하는 서수(瑞獸)가 엎드려 있던 것인데 그 계단은 벽돌로 덮여 버렸고, 서수는 벽돌 바닥 위로 간신히 몸을 내밀고 철책에 갇혀 있다. 알고 보면 대한문도 한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