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역사 이야기] ‘소군정’은 실재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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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군정’은 실재했는가

 

한반도 역사에서 한민족의 국가가 존재하지 않은 시기는 일제 36년과 해방 후 3년간을 들 수 있다. 일제 치하의 36년은 일본에 의한 통치 시기였으며, 해방 3년은 미소 양군의 진주에 의한 국가권력의 공백이 있었던 때였다. 이 시기의 남한을 미군정에 의한 통치 시기, 즉 미군정기라 부른다.

군정(軍政, Military administration, Военная администрация)이란 군대가 주축이 되어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 실시하는 통치, 또는 외국 군대가 군사작전이나 전쟁을 통해 타국 영토를 점령한 후 실시하는 통치 형태를 일컫는다. 이 정치적 개념을 해방 3년의 북한 체제에 도입한 우리 학계는 그것을 ‘소군정’이라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미군정과 대비시키는 의도도 있으나 그보다는 소련군을 북한 통치의 주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명칭이 과연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할 만큼 학술적으로 검증되었는지는 매우 의문스럽다. 미군정과 달리 직접적인 대민 통치를 하지 않은 소련군을 마땅한 검증 절차 없이, 혹은 이데올로기적 편의에 따라 그와 같은 명칭을 붙인 것은 아닌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사진출처 : “사진으로 보는 남북관계 55년사”

(http://www.koreascope.org/ks/kor/main/hanbandoFocus/07/index.jsp)>

동유럽과 북한

해방 후 북한의 통치 형태와 비교하기 좋은 대상은 소련군 진주라는 비슷한 경험을 한 동유럽 국가이다. 소련군은 시기적으로 다소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거의 모든 동유럽 지역을 나치 치하에서 ‘해방’시켰으며, 이 지역에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일정 기간씩 주둔하였다. 이들 나라에는 소련군 진주와 함께 지역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권력기관이 들어섰다. 이후 소련군의 철수 시기는 천차만별이었다.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곧바로 철수하였고, 1947년 불가리아에서, 1959년 루마니아에서, 헝가리와 폴란드에서는 1989년과 1990년에 각각 철수하였다. 이것만 보더라도 동유럽에서 소련의 정책은 나라별로 일정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련군 주둔 기간 동안 일부 지역에서 잠시나마 군정이 실시되기는 했지만 대부분 그 기간을 ‘군정’ 실시 시기로 부르지는 않는다. 다만  독일 동부 지역의 경우, 소련은 1945년 공식적으로 대독 전쟁의 영웅 G. K. 쥬코프 원수를 수반으로 한 주독일소련군정청(СВАГ)을 설치하였다. 소련은 이 나라에 대해서  ‘소군정’이나 ‘점령정책’ 등과 같은 용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였다.  침략국가인 독일을 피압박 국가와 달리 취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소련 군정청은 1949년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수립되기 전까지 최고 권력기관으로 남아 있었다.

북한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유럽 지역을 중시한 소련은 애초 동유럽에 비해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하였다. 10일 남짓한 짧은 기간이지만 다소 치열한 대일 전투를 치르면서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우선 각 도․시․군 단위에 경무사령부를 설치하였다. 경무사령부는 이들 지역의 질서 유지 및 통제 업무를 수행하였고, 각지에서 조직되기 시작한 인민위원회와의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경무사령부의 기능이 인민위원회와의 협력과 아울러 그에 대한 통제적 지도에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중앙 차원의 소련군 ‘지도기관’으로는 10월 3일 제25군사령부 산하에 소련민정(гражданская администрация)기관이 조직되었다. 소련군 진주 초 소련군 정치기관의 일부 보고에 ‘군정’이란 용어가 가끔씩 등장하지만 이후로는 ‘민정’으로 바뀌었다. 소련이 동독과는 달리 북한에서 ‘민정’이란 용어를 쓴 것은 정책의 차별성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약 50명의 장교들로 구성된 이 기관을 지휘하는 A. A. 로마넨코는 민정 담당 부사령관의 직책을 겸임하였다. 민정기관에는 행정․정치부, 산업부, 재정부, 상업․조달부, 농림부, 통신부, 교통부, 보건부, 사법․검찰부, 보안․검열부 등 모두 10개 부서가 설치되었으며, 11월에 북조선 중앙행정기관으로 설립된 북조선 행정10국에 대한 지도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민정기관의 역할은, 소련 측 표현을 빌리면, “일제에 의해 파괴된 경제를 복구하고 정상적인 생활 기반을 조성하며 조선 인민 자신의 국가권력 수립에 방조하는 문제 등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이후 한반도 정치 상황의 변화와 북한의 행정․경제 기구의 규모와 사업이 확대되면서 민정기관의 조직적 규모와 체계는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민정기관은 1947년 5월 제25군 군사위원 N. G. 레베데프가 이끄는 주북조선소련민정국(УСГАСК)으로 조직과 부서가 확대․개편되었다. 소련민정의 활동은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위치한 연해주 군관구 군사회의 위원인 T. F. 스티코프 상장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통용되어온 ‘소군정’은 ‘스티코프(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제25군사령부/소련민정→경무사령부’로 이어지는 체계를 일컫는 것이다.

 

<사진출처 : “사진으로 보는 남북관계 55년사”

(http://www.koreascope.org/ks/kor/main/hanbandoFocus/07/index.jsp)>

 

 

정부 기능의 소재

소련군의 대북한 정책체계를 ‘군정’으로 표현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만일 1946년 2월 ‘최고행정주권기관’으로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임위)’가 결성되지 않았다면 소련민정은 ‘민정의 외피를 쓴 군정청’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임위가 소련의 정책결정에 대한 단순한 집행자에 머물렀다 하더라도 이와 동일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렇지만 북임위는 사실상 정부 기능을 수행하였다.

소련으로서는 전반적으로 좌파세력이 우세한 한반도 정치지형에서 자국 군대를 전면에 내세운 통치 방식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약소민족의 해방” 구호는 소련의 오랜 주장이기도 했지만 조선 인민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것은 소련이 미국보다도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애쓴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일이기도 했다. 덧붙이자면,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미국의 신탁통치안 대신에 소련이 제기한 ‘후견(Опека)’은 “조선인민의 정치․경제․사회적 진보와 조선의 민주주의적 자치의 발전 및 국가독립에 원조와 협력”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간접적 통치’ 발상은 이미 북한에 적용되고 있었다.

북임위가 구성되면서 북조선 행정10국은 소련군사령부/민정 소속에서 북임위의 기관으로 이전하였다. 토지개혁 법령을 비롯한 각종 법령과 시책은 대부분 북임위의 명의로 발표되었다. 그것은 북임위의 대민 통치 기능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북임위의 각 국(局)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소련군사령부에서 발포한 모든 법령과 결정을 실시할 것”을 의무로 하였다. 이것은 그때까지도 소련군사령부의 국가적 기능이 혼재하고 있음을 법률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인민위원회는 ‘정권’으로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1년 후 북임위가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통해 ‘북조선인민위원회(이하 북인위)’로 재조직되면서 북조선 지도부의 주권적 기능은 더욱 강화되었다. 북인위는 “조선에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북조선 인민정권의 최고집행기관”으로 규정되었고, 북인위 산하 기관들이 소련군사령부에 복종한다는 법률상 조항도 삭제되었다. 한편으로 북인위(북임위)는 자신의 활동 가운데 소련 정부기관과의 공식적인 협정 체결도 포함시켰다. 이를 통해 소련 정부와 북한 간에 여러 분야에 걸친 무역 거래가 성립되었다. 이것은 북인위(북임위)가 ‘정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반대로 소련 측은 이를 인정한 주요한 증거로 볼 수 있다.

혹자는 위와 같은 북임위(북인위)의 기능이 형식에 불과하고 실질적인 통제는 소련군사령부/소련민정이 수행하였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해방 3년간 북한에 대한 통제의 정점에 모스크바 지도부가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주요 정책의 결정은 어째든 최종적으로 크레믈린의 승인 하에서 이루어졌고, 또 당시 한반도의 운명이 미소의 교섭 하에 달렸음을 본다면 소련의 위상과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종속된 권력’도 권력이란 점이다. 게다가 소련과 북한 공산당 지도부를 일방적인 종속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올바른 판단으로 볼 수 없다. 스티코프는 주요 사안에 대해 김일성 지도부와 협의하는 과정을 거쳤고, 김일성 지도부 역시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소련군 지도부의 일방적인 지시만을 받지 않았다. 국가 수립 이전 헌법 등 국가제도가 부재한 속에서 소련의 통제 하에 활동했다 하더라도 북인위(북임위)는 자체의 법령을 발포하고 정책을 입안․집행한 사실상의 ‘정부’ 기구였던 것이다.

 

어떻게 부를 것인가

해방 3년의 북한 권력체계에 미친 소련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분명 거기에 ‘군정’의 요소가 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 요소는 ‘간접통치’ 형태를 뛰어넘어 군정의 본질을 증명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강조컨대 이 시기에 북인위(북임위)의 ‘정부’ 기능은 실재하였다. 따라서 ‘소군정’이란 개념은 역사적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부적절한 용어라 본다.  ‘소군정’이라는 조직적 실체가 애매모호하기도 하지만, 제25군사령부를 그렇게 부르더라도 그 역할과 기능이 군정과는 동 떨어진다.  ‘소련민정’은 군(軍)이 주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용어 자체가 뜻하는 대민 통치기구로서의 기능을 수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큰 의미를 가지지는 못한다.

민족적 논리에 따라  해방 3년의 북한을  ‘인민위원회’ 시기로 명명할 경우에도, 그것은 소련군의 존재와 역할을 부인한다는 점에서 타당성이 없다.  결국 해방 후 북한 내 소련군의 정책 지휘체계는 ‘소련군사령부’나 ‘소련군 지도부’ 이상의 대체 명칭과 이 시기를 통치 주체의 입장에서 규정지을 수 있는 개념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 문제는 북한사 연구의 향후 과제로 남기는 것이 어떤가 한다.

※ 본고는 『역사비평』 통권 73호에 실린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