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의 극동정책에서 조선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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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의 극동정책에서 조선문제』
(2006, 모스크바국립대학 박사학위논문) –

                                                                     김영수(근대1분과)

한 나이 60쯤 되어서 과거를 회상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을 소개하라는 ‘밀지’를 받은 상황이니 어쩔 수 없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이 글을 쓴다.

  논문에 대한 소개를 하자니 공부를 시작했던 ‘초심’이 생각난다. 대학시절 역사학도였지만 수업에 충실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대학을 다녔던 90년대 초반은 강경대와 김귀정 열사 등 사회적으로 혼란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나도 학교보다는 ‘가투’로 대학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 학교 밖에서의 방황 속에서 나는 ‘나란 존재의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조금 철들어서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정체성을 찾는 방편으로 문학과 예술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점차 근대소설, 근대인물에 접근하다 보니 나는 근대 지식인의 모태인 ‘독립협회’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독립협회’에 대한 논문을 쓰려고 ‘독립신문’을 이 잡듯이 뒤져보았다. 그런 가운데 독립협회를 형성하게 만들었던 정치적 상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독립협회가 출범할 수 있는 중요한 정치적인 사건인 ‘아관파천’을 석사논문으로 결정하였다. 왜냐하면 문학사와 예술사를 서술하기 위해서는 정치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관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는 주변선배들의 한없는 정신적인 원조가 밑거름이었다.

  조선의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에 이어한 ‘아관파천’은 조선정치사에서 참으로 불행한 사건이었다. 그것도 한 나라의 국왕이 여장을 한 채 피신했다니… 그런데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아관파천’을 부정적으로만 파악하지 않았다. 일부 지식인들은 조선이 독립할 수 있는 기회라고도 생각하였다. 비극적인 사실이 이해 당사자에 따라 희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사물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을 일깨워주었다.

 ‘아관파천’으로 논문을 쓰면서 조선 중앙정치세력의 정책구상, 조선에 대한 열강의 외교정책 등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하였다. 특히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의 조선정책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점이 꼬리를 물었다. 왜냐하면 기존의 연구가 너무 단편적인 사실만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사를 한국사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그래서 석사논문을 마치고 6개월 후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탔다. 2000-2006년 동안에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의 극동정책에서 조선정책’이라는 주제로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의 생활은 힘들었지만 학문적으로 행복했다. 왜냐하면 모스크바는 근현대 한국사 자료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아쉬운 것은 그 많은 자료를 모두 수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개인이 모든 한국사 관련 자료를 수집한다는 것은 헛된 꿈일지도 모른다.

처음 1년 동안 어학과정을 밞았고, 그 후 박사과정에 진학하였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 80대의 할머니 지도교수님이다. 말도 어눌하게 하는 외국학생을 지도했던 그녀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노환으로 2003년 고인이 되었다. 그녀는 러시아학계에서 19세기 후반 외교사의 별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학자가 어떻게 늙어야하는 가를 가르쳐준 고마운 스승이다.

나의 최종학위 지도교수는 그녀의 제자인 40대 중반의 젊은 학자였다. 그는 논문 한편 한편이 학자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라면서 나와의 첫 만남부터 논문을 쓸 것을 강요하였다. 박사논문을 쓰는 동안 그는 나에게 사료를 읽고 자신의 견해를 세울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지도학생을 내외국인 차별 없이 학문적으로 지독하게 괴롭혔다. 가끔씩 나는 논문 토론장에서 보여준 그의 광기어린 천재성을 떠올리며 그를 기억한다.

  모스크바에는 근대시기 한국관련 자료가 국립문서보관소, 외교정책문서보관소, 군사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있다. 그리고 뻬쩨르부르크에는 역사문서보관소, 해군함대문서보관소가 있다. 이러한 문서보관소를 찾아다니며 한국관련 자료를 뒤지자니 발바닥에 불이 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문서보관소는 한국관련 자료가 별도로 보관되지 않았다. 때문에 모든 문서보관소에 소장된 한국자료를 일일이 찾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국내에 일부 자료목록집이 있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이러한 한국관련 자료의 상세한 지도를 그리는 것이 나의 목표 중에 하나였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러시아소재 한국관련 자료를 상세히 소개할 계획이다.

  이러한 여정 속에 나는 박사논문을 통해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동북아의 국제질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러시아의 조선과 극동문제에 대한 대외정책 등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러시아의 외교정책에 대해서는 국내학자들은 다음의 저서를 국내에 소개하였고, 대부분 여기에 기초하여 러시아의 외교정책을 설명하였다. 러시아학자인 라마노프(Б.А. Романов)의 저서를 번역한 영어판본, 미국학자인 말로제모프(A. Malozemoff)와 렌슨(G.L. Lensen)의 저서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몇 명의 서구학자 등의 저서를 통해서 당시의 상황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지금까지 진행된 러시아학계의 조선과 극동문제에 대한 연구 성과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나는 박사논문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해결방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첫째, 기존 연구자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의 극동정책에 대해서 공격적이라거나 또는 평화적이라고 나누기를 즐겼다. 이러한 이분법적 시각은 그동안 러시아의 극동정책을 규명하는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제공하였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는 먼저 조선과 극동문제에 대한 러시아정부의 정책 결정과정을 재검토하였다. 둘째, 기존의 연구 성과는 러시아가 극동정책에 대한 일관성을 상실했고, 황실 내부의 다양한 의견차이가 러시아의 군사행동의 연속성을 방해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극동정책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러시아의 대외정책을 주도했던 중앙 정치세력의 동향을 살펴보아야 한다. 즉 시기별 대외정책을 주도했던 정치세력과 그의 정책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주목해야한다. 그래서 나는 극동정책을 주도한 대공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국무고문 베자브라조프, 재무대신 비떼, 군부대신 꾸라빠뜨낀에 대한 조선과 만주정책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

  막상 철판을 깔고 글을 썼지만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참! 지금도 그때가 생각난다. 모스크바 유학생활을 접고 출발하는 공항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만세’를 크게 불렀다. 그것은 한국에 돌아와서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또렷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