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과 개경사람] 고려의 임금, 쟁기를 잡고 밭을 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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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임금, 쟁기를 잡고 밭을 갈다

고려의 제사와 농경의례의 의미

고려시대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신 등에 대한 길례 제사 가운데 국가적 기곡․농경의례로서 선농적전(先農籍田 ; 본래는 적전(籍田)이 아닌 자전(藉田)으로 쓰여야 하나 적전(籍田)이라는 명칭과 혼동되다가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이후 적전(籍田)으로 기록하고 있다)의 의식은 다른 어떤 의식보다도 의미가 있었다.

선농적전의 의식은 성종 2년(983)을 전후하여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성종은 먼저 임금이 직접 농사를 지음으로써 백성들 삶의 고단함을 헤아리고자 하였다. 또한 백성들에게는 임금의 농사짓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농사짓기를 권장하는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의식에 많은 신료와 농민층을 참여시키고 그 공로에 따라 의식이 끝난 뒤 술과 상을 내려 위로함으로써 임금과 신료, 백성과의 일체감을 고양시키고자 하였다. 논밭을 갈고 파종하고 김매고 농작물을 가꾸어 수확한 뒤 그 햇곡식을 종묘나 여러 제향의 제물로 쓸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의 하나였다. 이러한 이유로 선농적전의 의식이 있는 날은 개경의 백성들이 함께 어우러져 노동과 술을 즐기는 때로 여겨졌다.

고려시대 개경의 동교에 적전리가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곳은 지금 개성공단이 들어서는 봉동면의 북쪽 지역으로 개성시의 동남쪽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농사 및 곡식의 신이라 할 신농과 후직을 제향하는 선농단이 있고 그 주위로 넓게 펼쳐진 논밭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적전이었던 것이다.

동교에 선농단과 적전을 마련한 것은 동쪽이 봄이 시작되는 방위를 상징한다는 점과 그에 따라 농사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선농 적전의례에 사용되는 곡식상자나 의복, 폐백 등을 청색〔오행에서 청색은 東 – 春 – 木의 연장선 상에 있다〕로 한 것 역시 마찬가지 이유였다.

인종, 농사와 곡식의 신에게 기원하다

동교의 적전리 야트막한 구릉에는 너비 사방 3장, 높이 5척으로 네 면에 층계가 설치된 단이 있었다. 고려시대 농사와 곡식의 신에게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선농단이었다. 선농단의 제향을 위해 인종은 5일전부터 3일간 목욕 재계를 하고, 이틀은 정전과 행궁에서 재계를 하여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였다. 선농단에는 농사를 일으켰다고 하는 신농씨의 신위와 곡식의 신이라 하는 후직씨의 신위가 배위로 세워졌다. 인종은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축문에 ꡐ고려 국왕 신 왕해 감명고(高麗 國王 臣 王楷 敢明告)ꡑ라고 썼다. 그리고 폐백으로는 농사의 계절인 봄을 상징하는 청색의 비단을 준비하였으며, 희생으로는 소와 양, 돼지를 각각 한 마리씩 준비하였다.

인종은 재계한 후 선농단에서 농사의 신이라 할 신농(神農)과 후직(后稷)에 제향을 올리면서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였다. 내용은 농사를 짓는 법을 고안하고 곡식을 파종하는 법을 세상에 알렸다고 하는 신농과 후직의 공로를 높이고 이들에게 풍년을 비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적전(籍田)이라 불리는 넓고 비옥한 땅에서 태자․신료․농부 등과 함께 의식을 치를 준비를 하였다.

인종 22년(1144) 정월, 드디어 궁궐을 나서 적전으로 향하다.

음력 정월 을해일에 임금이 탄 난가(鑾駕)의 행렬은 대관전을 나서서 흥례문을 통과하여 의봉문으로 궁성문을 나섰다.

음력 정월은 아직 겨울인지라 양쪽 거리 및 가까이 보이는 산들에는 듬성듬성 흰 눈이 덮여 있었고, 거리에 줄지어 서 있는 상가와 민가의 처마에는 따뜻한 햇살로 눈이 녹으면서 물방울로 떨어지고 있었다. 임금의 눈에는 이러한 거리의 풍경과 백성들의 환호하는 모습, 그리고 행렬의 전후 좌우를 정리하는 시위군들의 땀방울과 소리가 느껴지고 있었다. 엄숙한 행렬이긴 하지만 오늘은 임금도 1년에 한 번 농사를 태자와 대소신료 등과 함께 직접 지어 보는 날이다. 다행히 날씨가 따뜻하여 신민들이 추위에 떨지는 않겠다는 다소 위안의 마음을 가지면서 난가가 움직이는 대로 몸을 약간씩 흔들거려 보았다.

난가는 다시 승평문을 지나 선농단과 적전의 앞에 멈추어 섰다. 성동의 적전리이다.  적전의 옆에는 솥뚜껑을 뒤집어 놓은 듯한 연못인 증지(甑池)의 물이 살랑거리고 있었다. 고려 말의 기록으로 본다면 개경의 성동(城東) 숭인문과 보정문 밖 적전리 증지 동쪽에 해당한다. 태자와 대소신료 및 경기의 지방관, 그리고 푸른 옷을 입은 농부 및 밭갈이 소 등은 차례로 정렬하여 대기하였다.

19세기 초 청나라 친경적전의 의식 (『唐土名勝圖繪』(일본)에서 인용)

친히 쟁기를 잡고 밭을 갈다

임금은 좌우 시종의 부축을 받으면서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를 잡고는 한 차례, 두 차례, … 다섯 차례를 밀어 밭을 갈았다. 이어 태자는 7차례를 갈았으며 삼공 등의 재상은 9차례를 밀었다. 이것이 끝나자 푸른 보자기에 싸인 상자가 들려져 나왔다. 여기에는 파종할 구곡(九穀)의 종자가 담겨 있었는데 왕후가 궁중에서 선별하여 낸 것이었다. 곡식의 파종은 밭을 간 곳을 뒤따라가면서 한 움큼씩 뿌리고 양쪽의 흙으로 덮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임금과 신료의 밭 갈기와 파종 의식이 끝난 뒤 대기하고 있던 농군(農軍) 등은 조를 이루어 햇살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적전의 땅을 갈아엎고 파종하였다.

친경의 행사가 끝난 뒤 난가에 올라 궁궐로 돌아오면서 의봉문 앞에 멈추어 임금은 오늘의 행사가 끝났음을 알리도록 했다. 그리고 오늘의 친경 행사에 수고한 태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공로를 치하하였다. 가벼운 죄로 감옥에 있는 죄수들에 대해서도 사면령을 내려 임금의 덕을 폈다.

매년 행사를 치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선농적전의 의식이 성대하게 열린 것은 임금이 친히 나와 밭을 갈 때였다. 하지만 임금이 매년 나와 친히 밭을 가는 친경의식이 매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 역사를 통틀어도 성종대, 현종대, 인종대 등 서너 차례에 불과하지만 임금이 백성들과 함께 쟁기를 잡고 밭을 간다는 것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잔치를 행하는 것은 백성들을 자연스레 교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평소 임금이 직접 선농적전을 하지 못할 때는 대신을 보내 대리로 선농단의 신농씨와 후직에 대한 제향을 올렸다. 또한 적전의 농사와 관리는 주무 관청이라 할 전농시(典農寺)에서 담당하였는데, 인근의 농민과 공노비들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배가 불러야 교화도 가능하다?

쌀, 보리, 조, 콩, 수수, 기장 등등의 곡물과 채소 등의 농작물을 키우기 위해 사람들은 연초부터 올해의 농사가 풍년일지 흉년일지부터 점을 친다. 흙으로 소를 빚어 놓고 계절의 빠르고 늦음을 예측하고 사직단이나 선농단 등에서 풍년들기를 바라는 기곡제를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는 봄부터 밭을 갈고 파종을 하고 김을 매고 바람이나 물에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또 물이 부족하면 인근의 도랑이나 연못, 샘 등에서 물을 길러 뿌려 주고 병충해가 생기면 이를 하나하나 일일이 손으로 떼어내고 골라낸다. 그만큼의 정성이 깃들어져야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확 후에 사람들은 햇곡식을 가지고 조상님께 제사를 올린다.

예나 지금이나 이처럼 농사를 지어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나라에서도 농사를 잘 짓도록 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권농 정책과 감세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농사는 국가의 근본 즉 ꡐ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ꡑ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위로는 임금부터 농사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선정의 여부는 농사의 풍흉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임금은 여러 가지 방책을 갖고 농사를 독려한 것이다.

선농적전의 의식은 왕실의 제물 마련과 백성들에 대한 농사의 권장, 농사의 어려움에 대한 체험, 군주의 교화의지와 위엄의 과시라는 의미가 있었다. 직접 매번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왕실과 정치권이 늘 농사와 백성의 삶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은 그만큼 생계의 보장을 바라는 민의를 소중히 한 때문이라 할 것이다.

한정수(건국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