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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누구를 위한 지속가능한 산림개발인가? ③_김태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8.02 BoardLang.text_hits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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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7월(통권 65호)

[기획연재] 
 
 

누구를 위한 지속가능한 산림개발인가? ③:

제국 목재수급에 종속된 임정계획

 

 


김태현(근대사분과)

 
 
앞선 연재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러일전쟁 전후 일본이 조선 북부의 산림을 장악한 주된 목적은 ‘경제적 개발’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임업 경영 기반이 매우 취약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경제적 수익 창출보다는 군사적·안보적 목적이 더욱 두드러졌다. 다시 말해, 경제적 활용의 의도가 분명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반 시설과 경영 역량이 부족한 현실 속에서는 결과적으로 국방적 성격이 더 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병합 이후 상황은 점차 달라졌다. 1910년대 중반, 삼림특별회계법이 폐지되면서 조선총독부의 산림정책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총독부는 국유림을 본격적인 재정 확보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국방의 숲’은 ‘수익의 숲’으로 성격이 변해 갔다. 국유림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조선총독부 재정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1920년대 초반이 되자 산림의 급격한 축적 감소와 임상(林相) 악화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쉽게 말해, 벌채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조림은 이를 따라가지 못했고, 그 결과 국유림의 생산력과 회복력 자체가 눈에 띄게 저하되었다. 이 같은 위기 신호가 감지되자, 총독부 내부에서도 비로소 지속 가능한 산림 경영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전면적인 벌채 중심 정책에서 ‘보속적 임정’, 즉 장기적이고 계획적인 임정으로 전환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총독부는 1924년 조선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종합적인 임정계획을 구상하였다. 이 계획은 표면적으로는 보속적 임업 경영을 기초로 하여 조선의 산림 자원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동시에 재정 기반도 안정시키겠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일본 본국의 정치적 무관심, 만주 목재 자본과의 이해관계 충돌, 그리고 예산 확보의 실패는 이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1924년에 세워진 구상은 몇 년 동안 표류했고, 결국 두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1926년에 공식적인 ‘조선임정계획’으로 확정되어 시행에 들어갈 수 있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바로 이 1926년 임정계획이 어떠한 역사적 배경과 문제의식 속에서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본다. 더 나아가, 이 계획이 실제로 어떻게 추진되었고, 그 과정에서 어떤 성격을 띠었으며, 어떠한 성과와 한계를 보여주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특히 이 시기의 임업 정책을 특징짓는 두 가지 요소인 ‘계획보다 현저히 적은 벌채량’과 ‘안동재 무관세 특례’를 중심으로, 1920~1930년대 조선의 임정이 가진 구조적 모순과 식민지적 한계를 짚어보고자 한다.
 
 
1. 계획보다 적게 베다
 
1920년대 후반, 대공황기 일본은 목재 무역에서 심각한 적자 구조에 직면하고 있었다. 북미 수입 목재 의존이 높아져, 무역 수지가 악화되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목재 수급 블록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조선을 목재 자급지로 재편하고자 했고, 그 대표적인 조치가 바로 조선임정계획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조선산 목재의 본국 이출을 확대하지 않고, 오히려 조선 내 자급자족 체계를 구축하려 했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표 1>를 살펴보자. 이 표를 보면 같은 시기 일본의 지배 아래에 있던 북해도, 대만, 화태 등은 풍부한 입목축적을 바탕으로 ‘이출’과 ‘증산’의 논리가 적용된 지역이었다. 북해도는 미국산 대경재를 대체할 정도의 품질과 축적을 갖췄고, 대만은 아리산을 중심으로 해군용 자재와 고급 건축재를 생산하며 일본의 전략적 수요를 충당했다. 화태는 아직 산림조사가 미비했지만, 잠재력을 인정받아 미이용림 개발과 목재 증산 정책이 추진되었다.
 
반면 조선은 이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조선의 산림률은 70%를 넘었지만, 정보당 입목축적은 13.9㎥에 불과했으며, 입목지와 비입목지 간의 차이도 크지 않아 실질적 벌채 가능지가 희박했다. 게다가 산림 소유권 정리와 국유지 조사가 이제 막 마무리된 시점이었기에, 단기간에 이출 기반으로 활용하기는 어려운 조건이었다.
 
이에 일제는 조선에 ‘목재 자급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배경에는 1920년대 후반 심화된 일본의 목재 무역수지 적자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산림이 부족한 식민지 조선에서 오히려 본국 자원을 소비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제는 조선 내 수요는 조선 내부에서 자체 조달하고, 장기적으로는 일본 본토에 다시 공급 가능한 체계를 구상한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자급화 구상은 조선 북부 국경지대의 산림과 혜산선을 잇는 삼림철도망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바탕으로 추진되었다. 특히 철도국은 이 노선이 완공되면 해마다 100만㎥이 넘는 목재를 안정적으로 수송할 수 있을 것이라 계산했다. 이를 근거로 일제는 조선 산림을 ‘자급 가능한 숲’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표 1. 조선ㆍ북해도ㆍ화태ㆍ대만의 산림자원 비교(1940)
출처: 朝鮮總督府 農林局, 1940 『朝鮮の林業』 부록 제2표
비고
① 산림률은 전체 임야면적에서 입목지가 차지하는 비율
② 정보당 입목축적은 입목축적을 입목지와ㆍ無立木地, 개간지 등을 합친 전체 임야 면적으로 나눈 값
③ 입목지 정보당 입목축적은 입목축적을 입목지 면적으로 나눈 값
 
 
그런데 조선임정계획의 성과를 수치로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난다. 바로 계획량 대비 벌채량의 현저한 저조다. 예컨대 <표 2>를 보면, 1926년 벌채 계획은 1,259천㎥에 달했으나, 실제 실행량은 459천㎥에 불과했다. 이러한 격차는 이후 1930년대 초까지 지속되며, 총 벌채량은 당초 목표의 절반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표 2. 국유임야 벌채 예정량과 실제 벌채량(1925~1936)
출처: 1926 「國有林管理經營計畫書」 『齋藤實關係文書(書類の部)1』, 354~356쪽 ; 鮮總督府, 『朝鮮總督府 統計年報』 ; 『林野統計』, 각 년판 ; 朝鮮總督府 農林局, 1936 『朝鮮の林業』, 45~46쪽
 
 
일견 이는 ‘보속적 임정’의 성공처럼 보일 수 있다. 즉, 필요 이상의 벌채를 하지 않고, 자원을 지속적으로 유지한 결과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 내막은 정반대다. 벌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2. 무관세의 벽, 시장을 잃은 자급화
 
과소한 벌채의 원인은 당시 무관세로 들어오던 안동산 목재 때문이었다. 이에 총독부는 목재 자급을 달성하려면 조선산 목재의 수요 기반부터 안정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 반복적으로 안동재 무관세 특례 폐지를 일본 제국의회에 요청하였다. 조선산 목재가 만주산 저가 수입재와 경쟁하기 어려운 구조에서, 벌채 계획을 실행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은 일본 본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가로막혀 번번이 좌절되었다. 만주 지역의 일본 자본과 산업계는 안동재 수입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었고, 그 유입 경로를 유지하려는 이익 집단의 반대는 단호했다.
총독부의 지속적인 건의 끝에 안동산 목재에 대해 일정한 관세가 부과되긴 했으나, 그 세율은 지나치게 낮았고, 심지어 일본 대장성은 안동 지역의 일본인 제재업자들에게 관세 상당액을 보조금 형태로 환급해주었다. 이로써 형식적 관세는 유지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무관세와 다름없는 상태가 지속된 셈이다.
 
그 결과 조선 시장에서는 자국산 목재보다 안동산 수입재가 더 저렴하고 유통도 훨씬 원활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조건은 조선산 목재가 시장에서 실질적인 수요 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채 주변화되는 구조를 고착시켰다. 다시 말해, 조선에서 ‘적게 벤 것’은 자원의 보속성을 고려한 신중한 절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저렴하고 정치적으로 보호받은 안동산 수입재의 범람으로 인해, 조선산 목재가 소비되지 못했던 현실적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다만 이러한 상황은 1932년 만주국 수립 이후 변화하게 된다. 만주국의 건축·철도 부흥 사업으로 목재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고, 만주 재정 확보를 위해 안동재에 관세가 부과되면서 조선 목재가 만주로 되레 수출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1933년 이후에는 이전과 달리 계획량을 초과하는 과벌(過伐)이 이루어지는 국면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의 목재 생산과 임업 정책이 어디까지나 조선 내부의 자원 현황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의 목재 수급 체계에 철저히 종속된 구조였음을 잘 보여준다.
 
3. 적게 베었는데 임목 축적이 감소하다
 
1926년부터 1932년까지의 조선 임정은 겉으로는 보속적 임정의 원칙을 따르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조선의 산림자원 현실보다는 제국의 목재 수급 질서에 종속된 정책 운용의 결과였다. 계획을 밑도는 벌채량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산림자원은 점차 감소하였다. 대표적으로, 갑종 요존 국유림의 정보당 입목축적은 1927년 36.1㎥에서 1931년 32.1㎥로 하락하며, 산림의 생산력과 회복력 자체가 저하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총독부는 국유림 수익을 조림에 재투자하겠다고 공표했지만, 사방사업 공채 발행이 미진하면서 국유림 수익은 사방사업으로 우선 배분되었고, 민유림에 대한 조림 보조금은 형식적 수준에 그쳤다. 조림 면적은 확대되었지만, 생존률, 수종 적합성, 임상 개선 등의 질적 성과는 따르지 않았다. 다시 말해 ‘식재’는 있었지만, 실질적인 ‘축적’의 증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에 안동재 무관세 특례로 인해 조선산 목재는 시장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고, 벌채 계획은 실행되기 어려운 조건에 놓였다. 벌채량이 계획보다 적었다는 점은 자원의 절제가 아니라, 수요 기반의 부재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비자발적 축소였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임정은 보속성을 목표로 하는 체계라기보다, 제국 중심 수급 구조에서 조선이 어떤 방식으로든 기능할 수 있도록 맞춰진 수단에 가까웠다. 조선의 산림정책은 자원 현실에 입각해 수립된 것이 아니라, 제국의 수급 안정이라는 대전제 하에 기획되었으며, 필요에 따라 자급을 요구받기도 하고, 또 다른 시기엔 동원 체계로 전환되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에서의 ‘보속’은 실질적으로 보호된 적이 없었고, 진정으로 지속 가능성을 보장받은 것은 제국의 수급 안정과 자본의 질서였다. 이후 1930년대 중후반, 전시체제로의 이행과 함께 이러한 임정 체계는 보다 노골적인 동원 중심의 전시 임업 통제 체계로 전환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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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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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창, 1997 「일제의 조선 산림정책에 관한 연구: 국유림 정책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산림자원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