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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고구려의 대민편제와 수취체계_나유정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6.02 BoardLang.text_hits 2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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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5월(통권 64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고구려의 대민편제와 수취체계(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4. 08.)
나유정(고대사분과)학부시절 나를 대학원으로 이끈 질문이 있었다. “고구려는 이렇게 넓은 영토를 어떻게 지배했을까. 특히 전쟁도 빈번하고 국경도 쉽게 바뀌던 시절, 국경 지역이나 깊은 산속에 사는 사람들, 종족이 다른 사람들 스스로 고구려인이라고 생각했을까”라는 질문이었다. 박사논문에서 영토가 아닌 민에 대한 지배방식을 규명하려 했던 것도, 어쩌면 이 질문들이 출발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런 질문은 이전 선학들 또한 품고 있던 것이었다. 기존 연구에서도 고구려 국가 운영의 실상을 알기 위해 다각도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동안 축적된 연구 성과를 통해 고구려가 서기 1세기 무렵 고대국가로 성장하고 3~4세기에는 중앙집권적 국가로 변모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나부체제의 해체’와 ‘계루부 왕권의 강화’라는 정치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고구려의 민에 대한 지배 구조와 통치방식도 이러한 전환에 주목해 살펴보고자 했다.
이로 인해 종래 고구려의 대민편제와 수취체계에 대한 논의는 주로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된 중기 이후를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호적 작성을 통한 편호와 대민편제, 국가가 민에게 직접 세역(稅役)을 징수하거나 징발하는 수취체계는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하고 지방통치조직을 갖추어야 본격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서기 1세기에 이미 국가체제를 갖추었다면, 어떠한 형태로든 대민편제를 시행하고 수취체계를 운영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초기 고구려가 민을 조직하고 수취체계를 운영했던 방식은 국왕을 중심으로 설명되지 못했다.
또한 4세기 이후 고구려의 영역확장과정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종족집단에 주목해 고구려의 대민지배가 종족별로 다양하게 이루어졌다고 이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종족적 구분이 행정 편제와 수취구조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대민편제와 수취체계 양자를 유기적 관계 속에서 고찰하려는 시도가 부족했던 것이다. 이를 유기적으로 살펴보기 어려웠던 것은 자료의 한계에 기인한 것이었다.
2. 고구려 대민편제 연구 자료의 한계와 방법론적 접근
고구려의 대민편제와 수취에 대한 논문이라고 하면 대체 어떤 자료로 이렇게 긴 논문을 썼을지에 대해 가장 먼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구려의 호적이나 장부류 문서는 전혀 전하지 않을뿐더러, 수취방식을 알 수 있는 기록 또한 고구려 후기에 해당하는 중국 측의 단편적인 서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에 박사논문에서는 고구려사를 초기, 중기, 후기로 시기 구분하고 각 시기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료를 활용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비롯하여 『주서』, 『수서』 등의 중국 정사, 「광개토왕릉비」와 「충주고구려비」, 평양성 각자성석 등의 금석문 자료가 해당한다.
초기는 『삼국지』 동이전에서 확인되는 하호의 용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동옥저·양맥 등 주변국 복속 기사와 진대법 시행 기사, 삼국의 진휼 기사를 분석하였다. 중앙집권적 형태의 정치 운영이 미흡했던 시기 고구려 나부민과 복속지민에 대한 파악과 수세 방식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중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내 고구려 사회상을 분석할 만한 내용이 부족하기 때문에 「광개토왕릉비」와 「충주고구려비」의 금석문 자료를 중심으로 분석했다. 능비에서 수묘인연호의 기재 방식을 통해 고구려 호적 관련 문서의 형식과 대민편제 방식의 일면을 추정하고자 했다. 또한 충주비에서 확인되는 신라토내에서의 모인(募人)활동을 분석하여, 고구려의 인력동원 양상을 살펴보고자 했다.
후기 고구려 부세체계를 확인할 수 있는 사료는 『수서』와 『주서』로, 이 두 사서를 주된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인력동원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서 축성역의 구체적인 사례로 평양성 성벽에 남아 있는 각자성석 자료 등 금석문 자료를 활용했다.
3. 고구려의 대민편제와 수취체계 변화의 흐름
『삼국지』 동이전의 민과 하호의 용례를 분석한 결과 3세기 이전 고구려 초기에는 자치력이 강한 나부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피지배층이 편제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동옥저와 같은 복속지의 피지배층에 대해서는 나부별로 관할 지역을 분할하여 생산물을 수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국왕을 중심으로 피지배층을 재편해 가는 과정에서 진대법이 시행되었다.
중기로 분류한 시점은 국왕 중심의 지배체제가 정비되는 시기이다. 능비 수묘인연호조를 분석한 결과 고구려의 지배가 안정적으로 미치던 지역에서는 농민(民) · 상인(賈) · 수공업인(人)과 같이 생업에 따른 주민 편제가 이루어진 흔적이 확인된다. 반면 변경 지역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확인되지 않으며, 피지배층을 군역의 대상으로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로 분류한 시점은 고구려가 수도를 장안성으로 옮긴 6세기 중후반 이후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기록은 『수서』와 『주서』에서 확인되며, 특히 고구려의 부세 체계를 전하고 있어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고구려의 부세체제는 『수서』의 서술 구조에 따르면 인세(人稅), 조(租), 유인세(遊人稅)로 나눌 수 있다. 인세는 포(布)와 곡(穀)을 거두는 것으로 농업에 종사하는 호의 구성원이 생산한 생산물을 기준으로 납부한 조(調)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조(租) 역시 농업에 종사하는 호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토지만이 아니라 가호가 보유한 노동력, 소, 말 수의 차이에 따라 3등호로 구분하여 차등 부과되었다.
특히 『수서』에서 농민(人) 외에 유인(遊人)에 대한 수취도 이루어졌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유인은 농경 외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는 호(상인, 공인 등)를 포괄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유인은 농민과 다른 생산 방식을 영위하였기 때문에, 적용된 세목과 편제방식, 부과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유인에게 부과된 세금은 별도의 잡세(雜稅)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기에서 후기의 양상을 보면 고구려는 민의 생업에 따라 주민을 분류·편제하고 이를 바탕으로 수취를 행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종족별로 피지배층을 구분하여 지배했다는 이해는 종족마다 생업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종족별로 구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고구려가 기준으로 삼은 것은 종족이 아니라 생업 수단이었다.
4. 다음 과제를 향하여
본 논문에서는 정치구조와 지배체제의 전환에 따라 계루부 왕권의 통치력이 민에게 관철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대민편제와 수취체계의 확립과정은 물적 기반 확보방식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를 통해 고구려사의 발전 과정을 다각도에서 조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학부 시절 나를 대학원으로 이끈 질문의 답을 박사논문에서 밝혔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쩌면 고대 사람들의 정체성을 형성했던 것은 이들에게 적용된 행정력이었으며, 고구려 중앙과 고구려 민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 것은 세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을 뿐이다.
심지어 사회경제사 논문을 쓰게 되었지만, 초기 연구를 이끈 선학들의 사회경제사적 시각과 논의, 사회과학적 이론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미흡하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한역연에서 여러 선생님과 함께 동아시아의 여러 고대 국가를 검토하며 나름의 해결책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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