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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麻立干期 신라의 지방통치 강화 과정_남혜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6.02 BoardLang.text_hits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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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5월(통권 64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麻立干期 신라의 지방통치 강화 과정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4. 08.)

 

남혜민(고대사분과)

 
 
1. 들어가며 : 마립간기 신라 사회의 해상도 높이기
 
한국사 연구에서 지방통치・지방지배는 대표적 고전 주제이다.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는 동안 마립간시기 지방 지배 방식을 새롭게 검토할 부분이 있는지, 혹은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었는지, 시대를 막론하고 여러 연구자에게 들었던 질문이었다.
 
마립간기라 불리는 4세기 중반~6세기 신라(사로국)은 낙동강 이동 지역을 아우르는 국가로 성장하여 집권체제의 기반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마립간기 지방 지배 방식에 대한 설명은 간접지배’・‘간접통치’로 집약되었고, 그 이후 연구들은 ‘간접 지배’의 틀에서 이루어졌으며 중앙의 지배 역량을 소극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본 연구는 ‘간접지배’라는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탈피하여 마립간기는 6세기 전후 지방제도를 시행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는 시기라는 점을 주목하였다. 박사학위논문은 지방제도가 시행되기까지, 본격적으로 지방관이 파견되기까지 ‘어떻게’ 신라가 지방 통치를 강화하였는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지방통치체제의 핵심인 지방 행정구역 혹은 지방제도가 부재한 시기의 지방 통치가 강화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방 통치’는 국가 통치 체제를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이며, 지방 통치의 목적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의 파악・동원이라는 점에 착안하였다. 지방관의 파견・지방행정 조직의 편제를 기준으로 삼는 대신 수취・군사적 통제, 예제・사회 규제 등의 다양한 측면에서 신라 중앙이 지방 유력자를 통제하고 활용하는 방식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대표적으로 ‘축성(築城)’과 ‘의례’는 별도의 연구 분야로 각각 다수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다. 그러나 지방 통치의 차원에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축성 작업과 사회 구성원의 위계질서를 확인하는 의례는 유기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아울러 사료의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일본 왕조의 사서, 후대의 기록과 고고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축성과 의례의 결과는 물질 자료가 남았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2. 현지인의 동원과 활용, 축성
 
마립간기에도 신라 중앙은 감찰관・감찰인을 파견하거나 전략적 요충지에 군지휘관을 주둔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신라에는 지방 유력자를 왕경에 머물도록 하는 제도가 운용되었는데, 그 관행의 연원은 마립간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마립간기 신라 중앙은 토착 세력을 매개로 현지 지배에 필요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보고받고 명령을 현지로 하달하는 등 현지 세력을 지방 지배에 동원하였다.
 
마립간기 산성을 쌓는 작업은 군사 방어 시설을 구축하는 것을 넘어 현지에서 국가 권력을 확인하고 중앙 행정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지배 방식으로 파악되었다. 박사학위논문에서는 산성이 ‘어떻게’ 지방 통치의 거점 역할을 했을까? 군지휘관이 주둔하면 자연스럽게 중앙 통제력은 강화되는가?라는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을 정리하였다.
 
기본적으로 축성은 국가 차원의 방어 체계를 강화하려는 중앙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축성 사업은 변경 지역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지에서 동원할 수 있는 물자・인력을 파악하는 등 사전 계획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축성의 계획・공사의 진행 절차를 파악하는 것은 중앙 정부가 주변 지역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파악하였음을 실증하는 작업이었다.
 
그렇다면, 산성을 쌓는 행위 자체로 방어 체계가 강화되었을까. 외부의 침입을 감시하고 주변 취락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정한 군대가 산성에 주둔하였을 것이다. 특히 유사시를 대비하여 평상시 산성에 물자를 비축할 필요가 있었으며, 취락민의 대피 계획도 준비하였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현지에서 물자 조달이나 취락민의 관리는 군사적 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방어 시설인 산성이 지방 통치의 거점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때, 마립간기에는 변경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산성이 만들어졌지만, 이것이 돌발적 혹은 급작스러운 인적 동원은 아니라는 점이다. 마립간기의 축성 사업은 사로국 내부 혹은 사로국 주변 거점 지역의 물적・인적 동원을 바탕으로 점차 중앙의 동원력이 변경 지역까지 확대된 결과였다.
 
 
3. 위계질서의 확인, 의례
 
전근대 사회에서 의례에 참여한 사회 구성원은 의례 주재자의 정통성, 상호 간의 관계・위계질서를 확인하였다. 요컨대 지증왕대 상복법의 제정은 예제의 도입・정비에서 나아가 마립간 중심의 일원적 지배 질서를 반영하여 차등적 규제를 규정한 것이었다.
 
일찍이 마립간기는 문헌 사료뿐만 아니라 고고학 자료가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연구 시기이다. 이미 물자 수취・인력 동원이 이루어지고 있던 상황에서 신라 복식의 사여는 주변 지역의 현지인을 ‘정복지’・‘피복속지’의 거주민이 아니라 신라의 ‘지방인’으로 인식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장신구류는 무덤 주인공을 추모하고 매장하기까지 행해졌던 의례 행위의 결과였다. 마립간의 상장례는 단순한 장례식이 아닌, 후계자의 정통성을 확인하고 통치권을 승계하는 의례였다. 마립간의 상장례는 왕경 지배층뿐만 아니라 지방 유력자도 참석해야 하는 중요한 국가 의례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 마립간의 상장례와 같이 중요한 국가 의례는 지방인이 왕경에 머물렀음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인 셈이다.
 
최근 유물의 형식 분류・분포 양상, 계량적 분석에서 나아가 고고학계는 유물이 어떠한 맥락에서, 어떤 과정에서 부장되었는지에 관해 관심을 가진다. 고고학계의 연구 성과를 활용하여, 관행화된 마립간의 상장례 절차를 파악하고, 의례에 참여한 인물들의 추모 행위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마립간에게 복식을 사여받은 지방 유력자는 마립간에게 자신의 복식품을 공헌하기도 하였으며, 또 새로운 왕으로부터 복식을 다시 사여받는 행위를 통해 신속(臣屬) 관계를 확인하였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물질 자료가 남지 않은 국가 의례에서도 지방 유력자가 참여하여 마립간 혹은 신라 중앙과의 신속 관계를 확인하였을 것임은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4. 나가며: 고대 사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사금기 이래 마립간기 지방 통치가 강화되는 과정을 유기적으로 살펴보면, 6세기는 마립간기 체제 정비가 마무리되는 시기였다. 마립간기 여러 성・촌이 연계되거나 여러 지역의 인력을 동원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성(城)의 관할 범위・역할에 따라 성의 중요도에 따라 통솔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지방관이 파견되었으며, 광역의 구획・행정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이다.
 
본 논문은 현지에 지방관이 상주하기 이전의 지방 통치 양상에 중점을 두었으며, 지방관의 파견 이전부터 지방 통치가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진전되었음을 밝혔다. 그렇다면 지방관의 파견 전후 무엇이 달라졌을까. 지방관이 파견된 이후의 지방통치는 어떠하였을까. 6세기 이후 지방 지배에 관한 연구는 주로 지방 행정단위의 편제, 지방관의 지휘 체계・명령 계통 등에 주목하였다면, 본 연구는 현지에 부임한 지방관의 처우를 살펴보았다. 6세기 중반경, 지방관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할 수 있도록 허용한 조치는 지방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왕경인이 외지에 거주할 수 있을 만큼 지방 통치가 안정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박사학위논문은 파편적으로 남은 사료의 공백, 정확히 말하면 단편적 기록에 반영된 통치 행위・메커니즘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은 사료가 단편적이라는 이유로, 마립간기 혹은 그 이전 시기를 미숙한 사회로 치부하였던 나의 인식을 검토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물론 처음부터 제도가 완비되거나 체계적으로 운영되었으리라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기록일지라도 면밀히 살펴보면, 이른 시기부터 신라는 초보적 수준이나마 통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었다. 마립간기부터 섬세한 통치 시스템이 형성・작동하였음을 논증하였으나 지금의 학위논문은 보완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 마립간기 지방 지배를 시작으로, 그 이후의 고대 사회상을 재검토해 나가는 것이 앞으로의 연구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