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역사랑' 2025년 5월(통권 64호)
[기획연재]
한양의 옛사람과 풍류 ②:
옛 서울의 주거와 풍류의 흔적을 찾아서 2
김성희(중세2분과)
돌다리를 건너 남산으로
장충단공원 왼쪽 테두리에 살짝 모습을 드러낸 물길 남소문동천(南小門洞川) 위에는 고색창연한 돌다리 하나가 서 있다. 이는 조선 초기 청계천에 세워졌던 돌다리로, 일반에도 널리 알려진 수표교(水標橋)다. 세종 연간인 1420년에 다리가 세워질 당시,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다리 기둥에 금을 긋고, 그 옆에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데서 ‘수표교’라는 명칭이 유래했다. 원래 수표교는 현재 청계천 2가 부근에 있었지만, 청계천 복개 공사로 인해 해체되어 여러 차례 이전을 거친 뒤, 1965년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져 복원되었다. 이후 2003년 청계천 복원 공사 당시, 원래의 수표교를 본떠 새로 만든 수표교가 청계천에 세워졌고, 다리 서쪽에 있었던 수표석은 서울시 동대문구에 있는 세종대왕박물관 실외전시실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림 1. 청계천변 수표교의 전경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京城日韓書房, 1910 『韓國風俗風景寫眞帖』)
그림 2. 수교표 서쪽 수표석(좌), 세종대왕박물관 야외전시실에서 전시 중인 수표석의 현재 모습(우)
출처: 좌. 서울역사아카이브(朝鮮新聞社, 1913, 『鮮南發展史』), 우.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 다리는 ‘수표’라는 특별한 명칭과 용도 때문에 널리 알려졌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리 자체도 매우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돌난간의 전형적인 형식을 띤 우아한 난간이 설치되어 품격을 더하며, 연꽃과 연잎 등으로 장식된 섬세한 조각은 그 수려함을 돋보이게 한다. 조선 시기에는 정월 대보름 밝은 달이 뜨면 도성의 청춘 남녀들이 이 수표교에 올라 달을 감상하며 정담을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이 다리의 매력은 변함없는 듯하다.
궁궐에 그릇을 납품하는 공인(貢人)이었던 지규식(池圭植)의 1891년 1월 15일자 일기에는 수표교 인근에서 보름달을 구경한 뒤 돌아오며 마주한 장안의 청춘 남녀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서로 어우러지는 젊은 무리에 선뜻 끼지 못한 채, 하릴없이 절구 한 수를 읊조리는 작자의 심경이 사뭇 애처롭다.
그림 3. 오계주, 『상원야회도(上元夜會圖)』 (19세기) 부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19세기 초에 활동한 문인화가 오계주(吳啓周)의 그림 『상원야회도(上元夜會圖)』에는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다리밟기[踏橋]’ 놀이가 묘사되어 있다. 이 놀이는 보름날 저녁[上元夕], 청계천의 열두 다리를 차례로 밟으며 한 해 열두 달의 재앙이 사라지기를 기원하는 풍속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다리밟기를 행하면 일 년 내내 다릿병 없이 평안하게 지낼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이날만큼은 국왕의 특명으로 야간 통행금지[夜禁]가 해제[放夜]되었기에, 밝은 달빛과 등불이 어우러진 밤하늘 아래 도성의 청춘 남녀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이 펼쳐졌을 것이다.
이처럼 도성 사람들의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였던 수표교는 비록 원래의 자리를 떠나 남산 자락 한편에 자리 잡고 있지만, 이 다리를 건너 남산으로 오를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든든한 돌다리를 밟으며 다리에 힘을 모아 조선 시기 남산의 품 안으로 걸음을 이어간다.
푸른 학이 노닐던 동리에서

17세기의 문인 학자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의 문집을 펼치자, 수표교라는 낯익은 이름이 눈에 든다. 옛 지우의 집 앞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어, 추억에 잠긴 채 술잔을 기울이다 끝내 집으로 가는 길마저 잊고 만 작자의 처지가 안타깝기만 하다. 정두경은 과연 어떤 사연으로 홀로 술에 취해 애달픈 노래를 읊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가 그리워한 ‘동악 선생’은 누구였을까? 이 의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남산 자락에 깃들어 살던 선인들의 자취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그림 4. 정선 「목멱산(木覓山)」 (1754)
출처: 고려대학교 박물관
앞서 언급했듯이, 남산은 조선 초부터 그 빼어난 풍광을 찬미하는 시가 여러 수 지어져 회자될 만큼 이름난 명승지였다. 조선 시기 내내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남산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청학동(靑鶴洞) 계곡은 도성 안에서도 손꼽히는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한양 도성 가운데 좋은 경치가 적기는 하나
그 가운데 놀 만한 곳은
삼청동(三淸洞)이 가장 좋고,
인왕동(仁王洞)이 다음이며,
쌍계동(雙溪洞)‧백운동(白雲洞)‧청학동(靑鶴洞)이
또 그 다음이다.
- 성현 『용재총화(慵齋叢話)』 부분
조선을 찾은 중국의 사신들조차 감탄을 금치 못했던 아름다운 도성이었지만, ‘좋은 경치가 적다’고 단언하는 성현(成俔, 1439~1504)의 엄격한 안목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높은 식견에도 남산 청학동의 풍광만큼은 손꼽을 만한 절경이었던 모양이다. 청학동은 남산 북쪽 자락에서 도성 방향으로 흐르는 시내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골짜기로, 현재의 중구 필동과 예장동 일대의 옛 지명이다. 그 이름처럼, 이곳은 마치 청학이 노니는 신선의 경지인 듯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했다고 한다. 청학동의 수려한 계곡 가운데에서도 특히 물길이 ‘丫’자 모양으로 갈라진 아계(丫溪)는 그 풍취가 절륜하였으며, 그 시내 위에 세운 천우각(泉雨閣)은 여름철이면 피서를 즐기려는 이들로 붐비던 도성 안의 명소였다고 한다.
그림 5. 「금오계첩(金吾契帖)」 (1768) - 천우각(泉雨閣) 부분
출처: 경기도박물관
이처럼 한양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청학동 일대에는, 중종 연간의 문신 이행(李荇, 1478~1534)이 거처하며 ‘청학도인(靑鶴道人)’이라 자칭하고, 활발한 시회(詩會)를 열었다고 한다.
이행은 44세이던 1521년, 명나라 효종(孝宗)의 등극 조서를 가지고 조선에 온 사신을 맞이하며 원접사(遠接使)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이 일을 위해 5개월에 걸쳐 한양과 의주(義州) 사이를 왕래하였다. 그 짧은 기간에도 아름다운 청학동의 집이 그리웠던지 시를 지어 향수를 달래는 심정이 절절히 드러난다.
청학동 일대는 원래 능성 구씨의 세거지였으나, 이행 대부터 덕수 이씨의 소유가 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인조 연간에 주로 활동한 그의 증손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의 자취 역시 이 일대에 남아 있다.

이안눌은 지금의 동국대학교 경내, 학생회관 부근의 넓은 터에 단을 쌓고 권필(權韠, 1569∼1612), 홍서봉(洪瑞鳳, 1572~1645) 등 당대의 이름난 문인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교유하였는데, 그의 호가 바로 ‘동악(東岳)’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이안눌의 집은 낙선방(樂善坊) 묵사동(墨寺洞)에 있으며, 비파정(琵琶亭) 위에 시단(詩壇)이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봄날 도성의 달 밝은 밤이나 꽃 지는 아침이면” 매양 맑은 술을 준비해 정두경을 초대하곤 했던 동악 선생은 바로 이안눌을 일컫는 것이었다. 그의 초대를 받으면 정두경은 한달음에 수표교를 건너와 즐겁게 어울렸던 모양이다. 그 옛집 앞을 지나던 찰나, 추억이 복받쳐 올라 술잔을 기울이다 끝내 집으로 돌아가는 길마저 잊고 만 정두경의 쓸쓸함이 가슴을 저민다.
이제는 동악 선생도, 그를 그리워하던 정두경도 세상에 없고, 오직 그들의 문필만이 세상에 남아 그 시절의 정취를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도, 동악의 현손 이주진(李周鎭, 1692~1749)이 선조의 시회를 기념해 시단 부근 바위에 새긴 ‘동악선생시단(東岳先生詩壇)’이라는 각자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림 7. 동악선생시단 석조 부재
출처: 동국대학교 박물관
현재 시단과 바위 글씨는 파괴되어 일부 파편만 남아 있을 뿐이며, 비파정의 자취 또한 더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자리에는 근래에 새로 세운 비석 하나만이 외로이 서 있을 뿐이다. 이처럼 옛 기억이 사라져버린 현장을 마주할 때면 마치 오랜 벗을 잃은 듯한 깊은 아쉬움이 가슴에 스며든다.
그림 8. 동악선생시단 비석
출처: 서울역사편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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