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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냉전시대 경계인의 고군분투기, 조명훈 평전 ④_예대열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5.31 BoardLang.text_hits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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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5월(통권 64호)

[기획연재] 
 
 

냉전시대 경계인의 고군분투기, 조명훈 평전 ④

 


예대열(현대사분과)

 
 
조명훈은 1972년 평양과 서울을 방문한 이후 남북한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좌절하기보다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북한과 통일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북한을 좀 더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아시아문제연구소(Institut für Asienkunde)’에서 『North Korea Quarterly(계간 북한)』(이하 NKQ)를 영문으로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 잡지는 1974년 창간호가 발간된 이래 1996년까지 총 78호까지 발간되었다. 잡지의 내용은 간기 사이에 벌어진 북한의 정치·경제 주요 사안과 남북 관계를 비롯하여 영어로 번역한 1차 자료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NKQ의 편집자로서 매호 발간을 책임졌고, 정년 퇴임과 함께 잡지의 발행은 중단되었다.
 
 
그림 1. 『North Korea Quarterly』 창간호, 1974
출처: 함부르크대학교
 
 
조명훈은 북한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NKQ를 발간했지만, 이 잡지는 남북한 모두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NKQ는 1989년 11월 대검찰청 공안부가 발표한 「좌익출판물·유인물 단속 지침」에 따라 ‘불온서적’으로 취급되었다. NKQ는 북한에 대한 비판적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1차 자료가 가감 없이 수록되어 있었다는 이유였다. 북한 또한 NKQ에 대해 “비난을 중지하지 않으면 신상에 좋지 않을 것”이라며 유럽 주재원을 통해 간접적으로 ‘협박’을 해왔다.
 
조명훈은 남한의 ‘불온시’와 북한의 ‘협박’ 사이에서 NKQ를 발간하며 느꼈던 ‘경계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조(自嘲)했다. 그는 이 잡지에 대해 “북한을 찬양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유일한 북한 관계 자료”라고 자평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자신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서운해하면서도, 내심 같은 민족을 비판하는 것이 자기 가족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만 같아 불편해하기도 했다.
 
 
이북에 관한 전문지 North Korea Quarterly를
영어로 펴내온 지 벌써 15년이 되었다.
… 월급을 받아먹는 사람으로서
나의 직무를 어길 수가 없지만 …
이 일을 오래 하면 오래 할수록
내가 마치 우리 집안일을
남에게 까바쳐 팔아먹는 것만 같아 괴롭고 분하다.
소위 북한 전문가들은 NKQ를 “객관적”이요
“비판적”이라고 평가하면서 아껴 주고 있다.
물론 이북에선 왜 비판하느냐고 나무랐으며,
이남에선 왜 이북을 칭찬하기도 하느냐라며 나무라곤 했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내가 아는 한,
내 겨레의 양심에 비추어서 편집해 왔다.
 
 
한편 조명훈이 남북한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고뇌하며 NKQ 발간에 매진하고 있던 와중에 두 번째 방북의 기회가 찾아왔다. 북한은 1988년을 즈음하여 서울올림픽 개최를 견제하고 남한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고 있다는 모습을 과시하기 위해 다양한 외교전을 펼쳤다. 1988년 5월 11일부터 14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관계 전문 학자들의 국제관계 토론회」도 그 일환 중 하나였다. 이 대회에는 아시아・유럽・남미에서 13개국, 110여 명의 학자들이 참석하였다.
 
북한은 NKQ에 실린 글의 논조를 빌미 삼아 조명훈을 초청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서독 대표단이 그와 함께하지 않으면 방북 자체를 보이콧하겠다고 버텨 그도 평양에 갈 수 있었다. 그는 서독 대표단의 일원으로 학술대회에 참석한 후 묘향산, 개성, 금강산, 판문점 등을 관람했다. 그는 방북을 마친 후에는 중국 베이징대학 ‘조선문화연구소’를 방문하고, 일본으로 넘어가 총련계 기관들과 조선대학교를 방문했다. 조명훈은 이 여정을 자세히 일기로 기록하여 당시 찍은 사진들과 함께 1988년 『북녘일기』를 서울에서 출간했다.
 
 
그림 2. 『북녘일기』(1988) 표지 및 수록 사진
조명훈이 학술대회에 참석한 북한의 역사학자 박시형(상)과 김석형(하)을 직접 촬영한 것이다(우).
 
 
조명훈은 1972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1988년 방북 이후 서울에 왔다. 당시 남한 상황은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민간 통일운동의 고양에 따라 북한에 대한 관심이 많을 때여서 그에 대한 주목이 컸다. 그는 각종 방송과 언론 등 시사・교양 잡지에서부터 여성지와 어린이 신문까지 매체를 가리지 않고 인터뷰에 응했다. 하지만 그 기사는 사회적 반향에도 불구하고 의도와 달리 북한에 대한 선입견으로 인해 잘못 옮겨지거나 곡해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반면 대학생들과의 만남에서는 당시 학생운동권 내부의 ‘친북적’ 경향 속에서 그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하였다. 그러자 조명훈은 일기 전부를 있는 그대로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북녘일기』에 담긴 조명훈의 생각은 1972년 처음 평양과 서울을 처음 오갔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남북 모두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남한의 변화에 더욱 고무되었다. 남한의 사회상은 1954년 유학길에 처음 올랐을 때나 1972년 ‘지옥’으로 묘사했던 당시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한때 북한의 주체사상을 약소민족이 취할 수 있는 국가전략으로 높이 샀던 것처럼, 남한의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민족적 자랑”으로 여기게끔 되었다.
 
 
이남에선 그동안 꾸준한 민주화 투쟁이
다 소용없었구나 생각하고 있던 차,
그동안의 모든 희생이 거름이 되어 있었고,
이제 이 거름 속에 민주화의 뿌리가 박히기 시작했다는
기가 막힌 사실이 나타나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사람의 숨을 가쁘게 만든 경제적 성장에다가
넓게 퍼져 있는 높은 교육 수준이 가담하여
결국 정치적·사회적 발전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 얼마나 민족적 자랑인가?
 
 
조명훈은 1980년대 말 민주화운동을 보면서 비로소 남한 사회와 마음 속에서 ‘화해’를 한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조국 대한민국은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동백림사건’과 중정 요원이 권총을 겨누던 끔찍한 기억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1988년 서울에 와서 보니 서점에 떡하니 중학생 시절 읽었던 『朝鮮解放年報』가 진열되어 있었고, 그 책을 열어보니 그때 부르던 「민전 행진곡」과 「해방의 노래」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었다. 조명훈은 당시 감정을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현실을 목격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상태”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조명훈이 남한과 마음속 ‘화해’를 하는 동안 그와 대비되는 북한의 상황에 대해서는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는 북한의 경직된 모습, 우상숭배 등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나름의 온정적 시선과 그 체제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인정하고자 했다.
 
우선 조명훈은 북한이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주체’만을 강조하다가 결국에는 한계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그는 북한이 고립된 상황에서 구체적인 대책을 내세우는 대신 국수주의 경향과 김일성 권력의 강화를 절대적 처방으로 내놓은 점을 문제 삼았다. 그러면서 “백성이 주인”이라는 주체사상의 애초 취지는 김정일로 이어지는 전대미문의 부자 세습 속에서 결국에는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조명훈은 북한이 내세웠던 ‘주체’의 문제의식 자체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그는 주체사상의 기본 테제인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는 북한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사대주의로 점철된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큰 교훈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북한이 “고독하게 그러나 과감하게” 주체 노선을 견지하며 애썼던 것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서 공정한 위치와 평가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주체’의 실험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갔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거름 삼아 우리 겨레의 종합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재구성하자는 것이 조명훈의 생각이었다.
 
그런 점에서 조명훈은 “지금 심각한 곤경에 빠져 있는 이북의 현실을 두고 거기에 사는 우리 겨레를 조롱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북의 현실을 내가 전해줄 때, 내 가슴은 얼마나 아픈 줄 모르고 통쾌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사람들을 이따금 보게 되는데, 그들은 같은 겨레의 체온을 못 가진 사람들로밖에 나에겐 안 보인다”며 남한 사회의 주류적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파리 망명 시절 조국을 생각하며 읊조리던 “독일이여 너 생각하면, 난 밤마다 잠 못 이루어”라고 했던 것처럼, 독일에서 한반도 혹은 조선반도를 생각하며 잠 못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