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훈은 1972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1988년 방북 이후 서울에 왔다. 당시 남한 상황은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민간 통일운동의 고양에 따라 북한에 대한 관심이 많을 때여서 그에 대한 주목이 컸다. 그는 각종 방송과 언론 등 시사・교양 잡지에서부터 여성지와 어린이 신문까지 매체를 가리지 않고 인터뷰에 응했다. 하지만 그 기사는 사회적 반향에도 불구하고 의도와 달리 북한에 대한 선입견으로 인해 잘못 옮겨지거나 곡해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반면 대학생들과의 만남에서는 당시 학생운동권 내부의 ‘친북적’ 경향 속에서 그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하였다. 그러자 조명훈은 일기 전부를 있는 그대로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북녘일기』에 담긴 조명훈의 생각은 1972년 처음 평양과 서울을 처음 오갔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남북 모두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남한의 변화에 더욱 고무되었다. 남한의 사회상은 1954년 유학길에 처음 올랐을 때나 1972년 ‘지옥’으로 묘사했던 당시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한때 북한의 주체사상을 약소민족이 취할 수 있는 국가전략으로 높이 샀던 것처럼, 남한의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민족적 자랑”으로 여기게끔 되었다.
이남에선 그동안 꾸준한 민주화 투쟁이
다 소용없었구나 생각하고 있던 차,
그동안의 모든 희생이 거름이 되어 있었고,
이제 이 거름 속에 민주화의 뿌리가 박히기 시작했다는
기가 막힌 사실이 나타나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사람의 숨을 가쁘게 만든 경제적 성장에다가
넓게 퍼져 있는 높은 교육 수준이 가담하여
결국 정치적·사회적 발전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 얼마나 민족적 자랑인가?
조명훈은 1980년대 말 민주화운동을 보면서 비로소 남한 사회와 마음 속에서 ‘화해’를 한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조국 대한민국은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동백림사건’과 중정 요원이 권총을 겨누던 끔찍한 기억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1988년 서울에 와서 보니 서점에 떡하니 중학생 시절 읽었던 『朝鮮解放年報』가 진열되어 있었고, 그 책을 열어보니 그때 부르던 「민전 행진곡」과 「해방의 노래」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었다. 조명훈은 당시 감정을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현실을 목격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상태”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조명훈이 남한과 마음속 ‘화해’를 하는 동안 그와 대비되는 북한의 상황에 대해서는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는 북한의 경직된 모습, 우상숭배 등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나름의 온정적 시선과 그 체제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인정하고자 했다.
우선 조명훈은 북한이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주체’만을 강조하다가 결국에는 한계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그는 북한이 고립된 상황에서 구체적인 대책을 내세우는 대신 국수주의 경향과 김일성 권력의 강화를 절대적 처방으로 내놓은 점을 문제 삼았다. 그러면서 “백성이 주인”이라는 주체사상의 애초 취지는 김정일로 이어지는 전대미문의 부자 세습 속에서 결국에는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조명훈은 북한이 내세웠던 ‘주체’의 문제의식 자체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그는 주체사상의 기본 테제인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는 북한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사대주의로 점철된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큰 교훈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북한이 “고독하게 그러나 과감하게” 주체 노선을 견지하며 애썼던 것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서 공정한 위치와 평가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주체’의 실험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갔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거름 삼아 우리 겨레의 종합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재구성하자는 것이 조명훈의 생각이었다.
그런 점에서 조명훈은 “지금 심각한 곤경에 빠져 있는 이북의 현실을 두고 거기에 사는 우리 겨레를 조롱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북의 현실을 내가 전해줄 때, 내 가슴은 얼마나 아픈 줄 모르고 통쾌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사람들을 이따금 보게 되는데, 그들은 같은 겨레의 체온을 못 가진 사람들로밖에 나에겐 안 보인다”며 남한 사회의 주류적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파리 망명 시절 조국을 생각하며 읊조리던 “독일이여 너 생각하면, 난 밤마다 잠 못 이루어”라고 했던 것처럼, 독일에서 한반도 혹은 조선반도를 생각하며 잠 못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