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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고대의 바다를 고대의 시선으로 ⑧_임동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5.31 BoardLang.text_hits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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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5월(통권 64호)

[기획연재] 
 
 

고대의 바다를 고대의 시선으로 ⑧:

바다를 건넌 신라와 일본의 지식인 이야기, 최치원과 엔닌

 

 


임동민(고대사분과)

 
 
1. 들어가며
 
삼국을 둘러싼 바다는 동아시아 연결의 매개체였던 동시에, 갈등과 전쟁의 지름길이었다. 실제로 당의 군대는 황해를 건너 백제를 직접 공격하였고, 신라 문무왕은 황해에 관한 해양 경험을 토대로 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시대가 일단락된 이후, 7세기 후반부터 동아시아의 바다는 당, 신라, 발해, 일본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질서 속에 놓였다. 동아시아 바다의 새로운 구조는 대체로 10세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계속되었다. 7~10세기 동아시아 바다의 새로운 구조 속에서, 당, 신라, 발해, 일본의 다양한 사람과 문화, 물자, 제도 등이 바다를 건너 교류하였다.
 
9세기 중반 일본의 엔닌(圓仁), 9세기 후반 신라의 최치원은 동아시아의 바다를 건너 당에 들어갔다가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두 인물의 이야기는 이들이 남긴 『입당구법순례행기』, 『계원필경집』을 통해, 1,2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비교적 자세히 전해진다. 이번 연재에서는 당사자가 남긴 기록을 토대로, 9세기 동아시아의 두 지식인이 바다에 도전하였던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1)
 
두 사람의 생생한 이야기를 살펴보기 앞서서, 이 무렵 바다에 도전하였던 다른 동아시아 사람들의 경험담이 궁금해진다. 기존 연구에서는 당에서 신라로 바다를 건너간 사신의 경험담에 집중하였다. 당 사신들은 황해를 건너면서 목숨을 건 항해를 하였는데,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거나, 난파하거나, 표류하다가 엉뚱한 곳에 도달하는 경험을 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는 신비로운 설화로 이어졌는데, 아주 특이한 문화를 가진 종족을 만났다거나, 심지어 용궁을 다녀왔거나 신선을 만났다는 경험담도 남았다. 결국 이 시기 바다에 도전한 사람들은 해룡, 해신, 산신에게 제의를 올리거나, 불교의 힘으로 극복하려는 종교 의식을 하기도 하였다.2)
 
이토록 신비한 설화가 모두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이 시기 동아시아 사람들은 마치 외계와도 같은 바다에 목숨을 걸고 도전하였고, 이들의 경험담에는 온갖 과장과 너스레가 덧붙여지면서 기이한 설화로 재탄생하였다. 이들의 고생은 ‘폭싹 속았수다’라는 말로 넘어갈 수도 없는, 죽을 고생이었다. 이들이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종교에 의지한 것도 해양사의 관점에서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들만큼이나 ‘폭싹 속았던’, 그리고 이들보다 조금 더 자세한 기록을 남겼던 엔닌과 최치원의 바다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2. 엔닌의 생애와 귀국, 『입당구법순례행기』
 
일본 천태종의 자각대사(慈覺大師) 엔닌(圓仁)은 794년 일본에서 태어나, 838년에 견당사 일행과 함께 당에 들어가 중국의 여러 명산과 사찰에서 수행하였다. 그런데 당 무종 시기의 불교 탄압에 휘말리면서, 엔닌은 847년에 상선을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엔닌은 귀국 직후부터 당에서 ‘구법순례’하였던 여정을 『입당구법순례행기』(이하 『입당행기』)로 정리하였다. 귀국 이후 엔닌은 일본 천태종의 3대 좌주가 되었고, 엔랴쿠지(延曆寺)의 주지를 맡았다가, 864년에 입적하였다.
 
엔닌은 일본 견당사 선박에 편승하여 출항하였는데, 2차례의 실패 끝에 838년 6월 지금의 후쿠오카 일대를 출발하였다. 하지만 엔닌을 태운 견당사 선박은 강한 폭풍을 만나 표류에 가까운 항해를 이어갔으며, 도착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갯벌에 표착하여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엔닌 일행은 838년 7월에 당 양주로 들어갔다. 이때 엔닌은 천태산으로 순례를 하기 위하여, 허락을 요청하였으나, 당 조정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장안까지 다녀온 견당사 일행은 통역 업무를 담당하던 신라역어(新羅譯語)의 도움으로 신라선, 신라선원을 구하여 839년에 귀국길에 나섰고, 엔닌도 이들과 함께 귀국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엔닌은 이들과 함께 양주를 떠나, 초주를 거쳐 바다로 나왔다가, 계속 당에 체류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때 엔닌의 여정을 살펴보면, 당에 거주하던 신라인, 즉 재당신라인 사회의 다양한 도움이 확인된다. 엔닌과 함께한 견당사 일행은 신라선, 신라선원의 도움으로, 조수, 바람 등의 문제를 극복하면서 일정을 지속하였다. 특히 신라 선원들은 산둥반도 남쪽의 밀주 대주산까지 가서 선박을 수리하고 바다를 건너자는 제안을 하였다. 하지만 일본 관인들은 ‘적국’ 신라 경유를 우려하여 바로 해주에서 출항하였다. 물론, 이후 기록을 보면, 결국 일본 견당사선은 표류하여 산둥반도로 돌아왔고, 결국 이곳에서 황해를 건너 귀국하였다.
 
이 과정에서 엔닌은 당에 남아 수행을 계속하고자, 일종의 불법 체류를 감행하였는데, 신라인의 도움으로 신라인 마을인 숙성촌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들의 ‘불법’은 발각되었고, 엔닌은 동해현으로 이동하였다.
 
 
그림 1. 839년 4월 ~ 7월 엔닌의 여정3)
 
 
위의 표는 엔닌의 불법체류 사실이 발각된 이후, 다시 귀국길에 오른 여정을 정리한 것이다. 엔닌은 동해현에서 견당사선의 다른 선박을 타고 귀국하였는데, 산둥반도 남쪽을 경유하여 이동하는 항해는 순탄하지 않았다. 계속 순풍을 얻지 못하여 정박하거나, 기상 악화 등으로 인하여 표류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 과정에서 산둥반도 남부 연안의 여러 포구에 정박하였는데, 결국 엔닌은 산둥반도 동쪽 끝의 적산포 적산법화원에 체류하게 되었다. 적산포는 산둥반도 동단에 위치하여 동쪽으로의 항해에 중요한 요충지였다. 엔닌을 두고 먼저 출항하였던 9척의 귀국선도 적산포에 도착하였다가, 이곳을 떠나 황해중부횡단항로로 귀국하였다.
 
엔닌은 신라인의 사찰인 적산법화원에서 839년 겨울까지 체류하면서, 신라인의 도움으로 당에서 수행할 수 있는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엔닌은 840년 적산법화원을 출발하여, 오대산과 장안에서 불교 수행을 거듭하였다. 하지만 몇 년 뒤, 당 무종이 불교를 억압하는 이른바 ‘회창폐불’이 일어나면서, 엔닌은 강제로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엔닌은 적산법화원으로 돌아와 귀국편을 알아보다가, 남쪽으로 이동하였는데, 847년 6월에 일본으로 가는 신라인 김진 등의 배가 산둥반도에 있다는 편지를 받고, 다시 산둥반도를 향해 돌아왔다. 아래의 표는 이때부터 귀국 준비의 시기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림 2. 847년 6~8월 엔닌의 여정4)
 
 
엔닌은 일본으로 향하는 신라인 김진 등의 선박을 타기 위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던 길을 돌려서 다시 산둥반도로 향하였고, 마침내 847년 7월 이들의 배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산둥반도에서 체류하면서 바다를 건널 준비를 하였다. 이때 이 상선에는 신라인, 당인 등이 타고 있었는데, 앞서 일본 견당사선의 관인들이 ‘적국’ 신라 경유를 우려하였던 것과 다르게, 이들은 일본 승려의 편승에 오히려 적극적이었다. 이 기록은 국가 사이의 공적인 교섭 항로와 민간의 영역에서도 활용하는 교류 항로의 차이를 보여준다.5)
 
847년의 항해는 순풍을 얻지 못하여 장기간 체류하거나, 바다를 건너기 위하여 포구에서 준비하는 등 생각보다 긴 여정으로 이루어졌다. 앞서 살펴본 839년 첫 번째 귀국 기록과 847년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대체로 회수 유역의 초주에서 산둥반도 남부 연안의 여러 포구를 거쳐 항해한 기간은 총 1~2개월이었는데, 순풍을 기다리며 체류하는 시간 등을 모두 합친 결과이다.
 
 
   
그림 3. 『입당행기』의 귀국항로 지도6)
839년 일본 견당사전의 귀국항로(좌), 847년 엔닌의 귀국항로(우)
 
 
그 이후 엔닌은 847년 9월 2일 적산포에서 출발하여, 신라의 서쪽 웅주, 무주 일대 외곽 섬을 경유하면서 항해를 이어갔다. 엔닌 일행은 9월 4일 고이도, 9월 6일 황모도, 9월 8일 안도 등을 짧게 정박하면서 항해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신라 서쪽, 남쪽 연안의 섬이었다. 엔닌 일행은 신라 연안을 거쳐, 10일에 멀리 쓰시마를 확인한 이후, 마침내 18일에 일본 큐슈에 도착하였다. 신라 연안을 경유하는 엔닌의 항해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이루어진 듯 하지만, 몇몇 섬에 정박하면서 좋은 바람과 조류를 기다렸다가 항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엔닌의 귀국 항해에서 확인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 견당사의 왕래, 엔닌의 체류와 수행에는 당에 거주하던 신라인 혹은 신라 상인, 통역, 선원 등의 도움이 있었다. 둘째, 중국 당, 신라의 연안에서 이루어진 항해는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바람과 조수의 영향으로 인하여 상당 기간 포구에 정박하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셋째, 엔닌은 선박에 탑승한 상태에서, 악풍을 만나거나 출항을 앞두거나 하는 상황에서 불교 의례를 거행하여, 선원들의 두려움을 잠재우는 역할도 하였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엔닌보다 불과 수십 년 뒤에 거의 비슷한 경로로 당에서 귀국한 최치원의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3. 최치원의 생애와 귀국, 『계원필경』
 
엔닌의 귀국으로부터 30여 년의 시간이 지난 이후, 884년 신라의 최치원은 양주에서 귀국을 준비하여, 885년 3월 신라에 도착하였다. 그의 귀국 여정은 최치원이 당에서 지은 시문을 모아 만든 『계원필경집』 권20의 시문을 통해 추정된다. 다만, 그의 시문은 『입당행기』와 달리 문학적 성격이 강하므로, 귀국길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비슷한 방식으로 동아시아의 바다에 도전한 엔닌의 귀국길을 참고하면서, 권20의 시문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최치원의 귀국 과정을 추정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문은 정확한 작성시점을 파악하기 어렵고, 따라서 최치원의 여정을 여행기, 일기처럼 상세히 추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시문의 배치, 지명의 비정, 전후 맥락의 분석을 결합하면, 권20의 시문은 아래의 표와 같이 정리된다.
 
 
그림 4. 『계원필경집』 권20, 최치원의 귀국 관련 사료
 
 
그림 5. 884~885년 최치원 귀국항로 지도
 
 
위의 표에 정리한 문서와 시를 종합하여 최치원의 귀국 과정을 추론해보면, 그는 884년 10월경에 양주를 떠나, 초주를 거쳐, 산둥반도 대주산에 정박하였다. 그리고 동쪽으로 유산에서 바람을 기다리다가 겨울이 되어, 뱃사람의 간청으로 체류하였다. 그리고 885년 1월경 즉묵의 참산에 제사를 지내어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였고, 봄으로 계절이 바뀌면서 산둥반도에서 출발하여, 885년 3월에 신라로 완전히 귀국하였다. 최치원의 귀국 여정은 884년 10월경부터 885년 3월까지 약 6개월이며, 양주에서 산둥반도 일대까지 약 1개월 걸렸고, 순풍을 기다리며 약 3개월 정도 체류한 뒤, 산둥반도 일대에서 신라까지 최대 2개월 걸려 돌아갔다.
 
또한 최치원의 『계원필경집』 권20에는 귀국길의 정취, 풍경을 묘사하는 한편, 항해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표현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의 시문에서 안개와 파도가 함께 묘사되곤 하는데, 안개가 자욱한 상황에 파도가 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황해에서는 종종 안개가 발생하는데, 대체로 봄~여름에 많이 확인된다.7) 최치원 가문의 최서원이 입당할 때, 안개 낀 파도(烟波)를 건너면서 겨우 목숨만 건졌다는 기록은 황해를 오가는 항해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시문에는 파도를 조수와 함께 기록하기도 하였는데, 실제로 황해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고, 조류가 빠르므로, 바람, 해류보다 조류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최치원의 문학적 표현은 황해의 해양 환경과 항해의 어려움을 유추하게 해준다.
 
그의 시문 중에는 순풍을 타고 항해하며 물살을 가르는 모습을 묘사한 표현도 있지만, 파도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는 상황이 기록되기도 하였다. 또한 최치원에게 바다에서 거친 바람과 파도를 만나도 선박에 동승한 사람들을 잘 인도하라는 책임이 부여된 흔적도 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황해를 건너려면, 항해에 해박한 사람들의 조언이 중요하였다. 선원들은 순풍을 기다리다가 겨울이 되면, 차라리 항해에 유리한 봄까지 머물렀다가 출항하기를 강력히 요구하기도 하였다. 바다에 도전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은 초인적인 현상이나 신, 종교에 의지하는 것이다. 최치원은 바다의 파도를 무섭지 않게 해주는 각종 ‘미신(?)’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하였고, 황해를 건너가기 직전인 885년 1월에 참산 신령에게 항해 중의 평안함을 기원하는 제문을 짓기도 하였다.
 
『계원필경집』 권20의 시문을 살펴보면, 황해를 건너는 귀국길은 인간의 도전과 초인적인 기대가 맞물릴 때, 비로소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 나가며 - 바다에 도전한 두 지식인의 이야기
 
최치원과 엔닌은 9세기 동아시아의 바다에 도전한 신라, 일본의 두 지식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당에서 고국으로 귀국하였고, 귀국길은 바다에 도전하는 험난한 항해를 동반하였다. 이들이 바다를 건넜던 9세기는 대체로 7세기 후반 이후 유지되었던 당, 신라, 발해, 일본 사이의 동아시아 질서가 유지되는 동시에, 국가별, 지역별로 점차 혼란한 모습도 보이는 시기였다. 두 지식인은 바다를 통하여 이루어진 동아시아 국가들의 이동과 교류 속에서 각자의 신념과 학문을 위하여 바다에 도전하였다.
 
이들이 건넌 바다는 수백 년간 당, 신라, 발해, 일본의 지식인, 상인, 사신 등이 다양한 목적에서 도전하였던 공간이었다. 이 시기 바다는 동아시아 사람들의 활발한 이동과 교류, 교섭을 성공하게 해주는 중요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바다는 많은 사람에게 늘 평온한 통로가 되어준 것은 아니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9세기 신라와 일본의 지식인들은 순풍을 기다리며 한 계절을 포구에서 정박하여 보내기도 하였고, 각종 초자연적 믿음이나 종교의 힘에 기대어 목숨을 건 위험한 순간을 모면하기도 하였으며, 바람, 조류, 안개와 같은 자연의 움직임에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하고 머무르기도 하였다. 최치원과 엔닌, 그리고 이들을 태운 선박과 선원은 나름의 방식으로 동아시아의 바다에 도전하였고, 이러한 지식인들은 자신의 항해 경험을 기록을 남겼다.
 
최치원은 884년 10월경 중국 강남지역의 양주를 떠나, 885년 1월 이후 산둥반도 일대에 머무르다가 출항하여, 885년 3월에 신라로 완전히 귀국하였다. 엔닌은 847년 6월 초주에서 출발하여, 산둥반도 남쪽 연안의 포구들에 여러 차례 정박하였고, 9월까지 정비를 마친 뒤에 황해를 횡단하여 신라 먼바다 섬들을 지나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엔닌은 839년에도 귀국 시도를 하다가 당에 결국 체류하였는데, 당시 이동 경로도 847년 경로와 유사하였다. 결론적으로, 최치원과 엔닌은 약 40년의 격차를 두고, 중국 강남지역에서 산둥반도를 거쳐 신라를 지나는 비슷한 경로로 귀국 항해를 하였다.
 
이들은 산둥반도까지 대략 1~2개월 정도 항해하였는데, 순풍을 기다리면서 체류하는 시간까지 모두 합친 기간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황해를 횡단하는 항해를 위해, 상당 기간 여정을 준비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그 결과 안전하게 신라와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두 인물의 기록은 9세기 동아시아 지식인과 이들을 태운 선박의 선원들이 어떻게 바다에 도전하였는지 잘 보여준다. 먼저, 바람이 좋지 않은 경우, 선박은 순풍을 기다리며 최대 1~2달까지도 체류하였다. 또한 선원들은 가장 적합한 항로를 제안하거나, 출항지를 바꾸거나, 출항지에서 순풍을 기다리며 한 계절을 내내 체류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원들은 산둥반도 남안의 여러 산을 중요한 지표물로 활용하고 있고, 그 산의 주변에 위치한 유산포, 적산포 등의 포구를 활용하였다. 이들은 산둥반도의 포구에서 체류하면서, 신라, 일본으로 돌아갈 항해를 준비하였다가, 안전하게 황해를 횡단하여 항해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귀국 시점의 엔닌은 공식 일본 견당사와 동행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 승려 혹은 환속승의 처지에서, 민간 상선을 타고 귀국하였다. 민간 상선은 신라의 경내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본 승려를 태우는 것 등에 거리낌이 없었는데, 앞서 일본 견당사선의 신라 경내 통과에 대한 우려와 달라진 태도를 보여준다. 반면, 최치원은 신라인이자 당의 관리 신분으로, 모국에 귀국하는 처지였으므로, 두 인물의 상황은 다소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지식인의 기록은 9세기 동아시아 바다의 모습을 이해하는 좋은 참고자료를 제공해준다. 9세기 동아시아 바다는 이전, 그리고 이후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쉽게 도전할 수 있는 호락호락한 구조는 아니었으나, 최치원, 엔닌과 같은 동아시아의 지식인과 이들을 태운 선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바다에 도전하였다. 『계원필경집』, 『입당구법순례행기』는 두 지식인의 여정과 동아시아 바다에 도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끝으로, 동아시아 바다를 여행한 지식인의 기록은 이번 연재에서 살펴본 두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일본 승려의 ‘입당’과 ‘귀국’만 한정하여 살펴보아도 대략 7세기부터 그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확인되며, 이와 관련한 기록도 다양하게 확인된다. 최근 간행된 『승려와 불교의 동아시아 해역 교류』(정순일 엮음, 2024, 경인문화사)는 『입당오가전』이라는 기록의 역주와 더불어, 일본 입당승, 입송승 일람을 제시하고 있으며, 재당신라인의 활동을 포함하여, 동아시아 바다에 도전하였던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분석하고 있어 참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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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본 연재의 내용은 다음의 논문을 대폭 요약, 수정한 것이다(임동민, 2024 「『계원필경집』을 통해 본 최치원의 귀국 항로 -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엔닌 귀국 항로와 비교 분석을 중심으로 -」 『신라사학보』 62).
2) 김창겸, 2009 「당에서 신라를 다녀간 사신들의 항로와 해양경험 : 『태평광기』를 중심으로」 『신라사학보』 17
3) 『入唐求法巡禮行記』 卷1, 開成 4년(839) 4월 11일 ~ 4월 18일 ; 『入唐求法巡禮行記』 卷2, 開成 4년(839) 4월 19일 ~ 7월 23일
4) 『入唐求法巡禮行記』 卷4, 大中 원년(847) 6월 9일 ~ 8월 24일
5) 임동민, 2021 「고대 황해 교섭‧교류 항로와 경기만」 『백제학보』 38
6) 譚其驤 主編, 1982 『中國歷史地圖集』 第5冊, 中國地圖出版社, 지도 44-45를 재편집
7) 국토지리정보원, 2003 『한국지리지 수도권편』, 104~1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