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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철도에 투영된 근대의 욕망들 ④] 제국은 자본과 어떻게 밀착하는가? 조선 사설철도의 생존방식 ①_박우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10.31 BoardLang.text_hits 3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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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10월(통권 56호)
[일제시기 철도에 투영된 근대의 욕망들] 일제시기 철도에 투영된 근대의 욕망들 4
박우현(근대사분과)제국은 자본과 어떻게 밀착하는가? 조선 사설철도의 생존방식 ①1. 투기와 공황의 주인공, 철도그동안 3회에 걸쳐 식민지 철도가 특정 지역과 만날 때 부딪혔던 욕망과 결과들을 살펴보았다. 이야기를 되짚어 보면 지난 이야기의 주인공은 문경군 호서남면 점촌리에 놓인 철도역이었다. 조연이라면 종점의 기회를 놓쳤던 함창면의 함창역이나 문경군의 중심지였던 문경면이었다. 다시 말해 지역의 철도역과 주변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적 욕망의 분출과 결과를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욕망하는 주체를 조금 더 큰 단위로 끌어올려 보겠다. 식민지 조선에 놓였던 사설철도를 둘러싼 제국, 식민지 그리고 대자본의 이해관계 갈등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사설이라는 표현은 흔히 관설이나 국영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쉽게 말하면 국가나 국가에 준하는 공공기구가 관리하지 않고 민간자본이 운영한다는 뜻으로 지금은 소유구조가 복잡하긴 하지만 한때 민영화 문제가 쟁점이었을 만큼 다양한 철도 노선이 민영으로 운영되고 있다.1) 물론 우리들의 일반적인 관념 속에는 과거에는 철도청, 지금은 한국철도공사처럼 철도는 국가가 관리하는 공공의 영역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다. 세계사적으로 본다면 처음부터 철도가 국가의 관리가 필수적인 사회간접자본으로 자리 잡았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초 철도가 유럽과 미국에서 처음으로 부설될 당시 부설 주체는 모두 민간자본이었다. 철도산업은 대규모 고정자본의 투자가 필요한 동시에 오랜 시간이 지나야 수익이 회수되는 최초의 산업이었기에 주식회사와 각종 금융 상품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간자본이 규모를 키우는 데 제격이었다. 물론 수익 회수 기간의 장기화라는 특성은 자본주의적 투기와 공황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2) 정확히 말하면 공황의 주역이었다. 1820년대에 영국에서 증기기관차가 출현한 이후 철도산업은 대형 투기와 파국의 주인공이었다. 1844~1846년 영국 경제는 제국의 확장에 힘입어 최대 번영기를 누렸다. 낮은 이자율과 곡물값으로 철도 건설비는 낮아졌고, 철도회사의 순익은 급증했다. 철도회사는 통상 이자율의 3배가 넘는 10% 배당을 실시했다. 1945년 1월 16개 노선이 계획되었고, 4월에는 50개 신규회사가 등록되었다. 국가는 철도회사 설립 절차를 간소화시켜 거품을 부풀리는 데 동참했다. 8월까지 영국에서 3천㎞에 달하는 100개 노선이 인가되었다. 거품은 순식간에 꺼졌다. 철도회사가 미납자본금 입금을 청구했지만 10월 초부터 투기꾼들이 주식을 방매했다. 주가는 주저앉았다. 대형철도회사였던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의 주가는 8~10월에 60%나 폭락했다. 1846년 한 해 동안 100여 건의 철도회사 인수합병이 이루어졌다. 상당수 자본가들이 파산했다.3) 미국에서도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을 전후해 무계획적으로 부설된 여러 간선과 지선철도망의 중복건설이 허다하게 이루어졌다. 결국 과도한 요금경쟁과 부실경영으로 1873년 공황이 발생했고 대다수 철도회사들이 도산했다. 이 와중에 독점자본이 급성장했다. 1870년 록펠러(John D. Rockfeller)가 설립한 스탠더드 오일은 철도업체와 결합해 석유수송망을 장악했다. 이를 통해 미국 석유시장의 90%를 지배하며 가격을 농단했다. 이른바 반트러스트법이 제정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배경에는 철도가 있었다.4) 이처럼 철도가 만든 대형 투기와 공황은 대규모 고정자본이 필요한 인프라 구축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철도산업은 다른 상품들처럼 일반적인 경쟁을 상정하기 어렵다. 경쟁이 성립하려면 같은 구간에 복수의 노선(다른 회사)을 부설해야 한다. 하지만 철도는 같은 구간에 중복으로 부설하는 것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철도망에 수송량을 늘리거나 배차간격을 조정하는 것이 비용/편익 상 더 경제적이다. 자유경쟁에 맡겨진 철도산업은 오히려 비효율적이었다. 1850년대 영국에서 리버풀-리즈, 런던-피터버리 구간에는 각각 3개 노선이 중복 부설되었다. 대규모 고정자본의 중복투자였다. 반대로 공황을 거치며 스탠더드 오일처럼 독과점 기업으로 성장한 철도회사는 유통망을 독점하며 국가 재정과 정책까지 뒤흔들었다.5) 2. 제국이 식민지에 철도를 건설하는 방식자연스럽게 철도와 같은 인프라는 공공적인 통제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자본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혹은 국가나 기업의 파산을 막기 위해서라도 철도산업은 국가의 관리 및 규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19세기 후반 무렵부터 보편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6) 일본도 1906년 3월 공포한 「철도국유법」을 기점으로 17개 사설철도회사를 매수해 국유화했다. 물론 일본의 철도국유화는 청일전쟁을 겪은 육군 세력이 만주까지 침략하기 위해서는 수송 체계 일원화가 필수적이라는 군사적 목적이 강하게 작용했다.7) 이는 다른 주제에서 자세하게 다루겠다.
하지만 모든 철도망을 관영으로 건설하고 운영할 수는 없었다. 결국 대규모 자본을 조달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무한정 재정을 투자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철도를 부설하는 지역이 식민지라면 어땠을까? 이 부분에서 유럽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와 일제의 식민지에 놓인 철도의 자금조달 방식이 차이를 보인다. 시기별로 차이는 있으나 영국의 인도 간선철도망 건설은 대부분 영국 민간 기업의 자금투자 즉, 사설철도로 이루어졌다. 앞서 철도에 대한 민간 투자가 위험하다는 게 밝혀졌지만, 식민지의 간선철도망은 민간자본을 유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부와 의회가 식민지로의 재정 투자를 꺼렸기 때문이다. 재정은 한정되어 있고, 가능한 자신의 지역에 더 많은 인프라를 유치하는 것이 의회 구성원의 자연스러운 욕망이었다. 부르주아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던 유럽 제국주의 국가의 의회에서 자신들이 낸 세금을 식민지 인프라에 투자하자는 주장이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았다. 재정투자라고 할 수 있는 공채 발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더 신속하고 많은 자본을 민간 투자로 충당했다. 인프라 구축의 외주화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에서 거둔 세금으로 충당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르겠다. 초기에 대규모 고정자본이 필요한 대형 인프라 사업은 그때나 지금이나 조세와 같은 수입으로 지출할 수 없다. 결국 정부가 빚을 내는 국공채 발행을 통해야 한다. 식민지에 필요한 공채 발행 등 예산의 결정 권한은 일본이나 유럽이나 모두 식민본국이 갖고 있었고, 의회 통과가 필요한 사안이었다.8) 간혹 유럽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정부에 재정 자치권을 준 것으로 오해하거나 심지어 일본도 그런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경제적 이윤극대화를 위해 침략한 식민지에 정치적 자유는 몰라도 경제적 자유는 허용할 수 없는 것이 제국주의의 본질이다.
어쨌든 이와 같은 문제와 결부되어 유럽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철도는 민간투자로 간선이 건설되는 사례가 많았다. 물론 19세기 초의 투기 과열을 낳았던 자유방임의 형태는 아니었다. 제국과 식민정부가 노선을 정하고 감독권을 갖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식민지는 투자가치가 적었기 때문에 민간자본이 쉽사리 투자를 결정하지 않았다. 산업화 이후 식민지에서의 이윤극대화가 필요했던 제국은 대자본의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혜택을 마련해야 했다. 자본주의 체제 확산의 핵심이었던 국가와 자본의 결합은 국가가 직접 구축하는 공공 인프라뿐 아니라 민간자본 유치를 통한 철도건설에도 적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영국은 인도의 간선철도망을 건설할 때 투자한 회사에 대해 자본 지출 대비 순이익이 어느 해든 보장 수익률인 5%보다 낮을 경우, 인도식민정부가 회사에 최대 5%의 차액을 보상해줬다. 수익률을 보증(guarantee)하는 제도였다. 즉, 자본금에 대해 5%의 이자를 보장받은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 보조금은 어디에서 충당했을까? 당연히 인도의 납세자에게 부과된 세금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보증에 필요한 비용은 인도 정부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초기 건설 비용은 예상치인 마일당 12,000파운드(£)를 넘어서는 20,000파운드에 달했다. 수익률도 수십 년 동안 5%에 이르지 못했고, 인도식민정부는 영국의 민간철도회사에 1869년까지 약 3천만 파운드를 지급해야 했다. 이 보증 비용은 오랫동안 인도 납세자들에게 부담을 주었고, 재정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여겨졌다.9) 산업화 이후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에 요구사항을 늘려갔다. 공장이 늘어나면서 식량과 원료 그리고 노동력을 공급해주고, 대량생산되는 산업생산물을 소비해 줄 지역과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식민지에 요구사항이 늘어난다는 것은 곧 비용의 증가를 수반했다. 19세기 이전과 달리 식민지 영토 전체를 장악할 필요가 있었고, 신속한 유통망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10) 고비용 고효율 방식이다. 그러므로 제국은 가능한 한 식민통치에 따른 재정부담을 식민지의 납세자층에 돌리고 싶었다. 지배의 근간을 흔드는 수준의 폭력적 반발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까지만 비용을 전가해 제국의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이른바 식민지의 ‘재정독립’이다.11) 제국 입장에서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민간철도 유치를 통한 유통망 구축 역시 가능한 식민본국의 재정을 식민지에 투입하지 않는 당시 제국주의자들의 보편적인 식민정책이었다. 3. 조선에 놓인 사설철도는 무엇이 달랐나?일본이 식민지에 민간투자를 통해 철도를 부설할 때도 이와 같은 당대의 보편적 식민정책을 따랐다. 1914년 조선총독부 내규 지정 이후 1921년 4월 1일 조선사설철도보조법을 공포했다.12) 식민정부의 내규를 식민본국 정부와 의회의 통제를 받는 법률로 승격시킨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철도에 관해서는 식민본국이 통제하겠다는 의도와 투자자들에게 식민지 리스크를 줄여준다는 의도가 함께 담긴 양면적인 조치였다. 이 법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사설철도 운영에 따른 이익금이 회사가 투자한 자본의 연 8%가 될 때까지 보조금을 지급해야 했다. 인도와 마찬가지로 재원은 조선에서 거둔 세금이었다. 일본의 지방철도보조법이 연 5% 보조였던 것과 비교하면 식민지 투자 리스크를 고려한 고배당이었다.13)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 사설철도 건설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 비중 면에서 차이가 있다. 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는 민간투자 방식의 사설철도 건설이 식민지 철도의 중심이었다. 간선철도망도 민간투자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그러나 일본은 식민지의 간선철도망을 관영철도로 부설했다. 자금조달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일본 정부 대장성(한국의 기획재정부)이 조선사업공채를 발행해 마련한 자금을 조선총독부 재정을 통해 지출해 건설자금을 조달했다.14) 간선철도망뿐 아니라 주요 지선 역시 공채발행을 통한 관영철도 방식이 주를 이뤘다. 사설철도의 비율은 1924년 현재 조선 철도망 중 약 22.6%였고, 1945년에는 21.3%였을 정도로 작았다. 그림1 : 1938년 현재 ㈜금강산전기철도 노선 종점 내금강역 전경 출처 : 帝國大觀社 編, 1938 《躍進朝鮮大觀》, 帝國大觀社 왜 유럽과 달랐을까? 조선총독부 재정이 인도 등 다른 식민지보다 여유로워서? 절대 아니다. 재정이 여유로웠으면 공채도 발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총독부는 만성적인 세수 부족에 시달렸다. 추후 비교사를 테마로 다룰 때 자세하게 서술하겠지만, 일본의 주요 정치세력이었던 육군이 생각했던 조선철도망의 목적이 핵심적인 이유였다. 일본철도의 국유화와 같은 맥락에서 육군세력은 조선에서 만주로 연결하는 간선철도망 역시 동일한 수송 체계로 운영하길 원했다. 청일전쟁 당시 병참선 운용의 경험이 재정부담을 감수하는 관영철도 중심의 식민지 철도망 구축을 더욱 부추겼다.15) 이들에게 이윤극대화는 돈이 아닌 침략과 영토 획득이었다.
그렇지만 식민지의 모든 철도망을 관영철도로 부설할 수는 없었다. 제국 즉, 일본정부 입장에서는 식민지에 모든 철도망에 일본재정에도 사실상 마이너스로 잡혔던 공채발행을 허가할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의 상환능력도 고려해야 했고, 애초에 소화가 어려운 식민지 공채였기에 식민본국의 부담도 컸다. 제국이 필요한 노선만 최소한으로 허가하고자 했다. 특히 육군세력이 정권을 잡았을 때만 허가가 집중되었다. 이들은 재정 안정보다 제국 확대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국 아니 일본육군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조선의 유통망 개선에는 꼭 필요하다고 여겨졌던 구간은 다른 방식으로 자금조달이 이뤄져야 했다. 이에 대한 재원 조달을 조선총독부는 민간투자 방식으로 하고자 했고, 대략 20%대의 사설철도가 조선에 놓이게 된 것이다.
4. 사설철도 선순환 구상의 이상과 현실군사적 목적으로 놓인 조선의 간선철도망은 일본에서 만주를 얼마나 빠르게 연결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조선 내 유통망 활성화는 고려사항이 아니었기에 식민지에서의 수익 극대화가 필요했던 식민정부는 철도망 증설이 필수적이었다. 초기에 투여되는 고비용에 비해 이윤추구가 어려운 교통인프라의 일반적 특징에 더해 식민지 리스크까지 극복해야 했던 조선사설철도는 매력적인 투자처가 될 수 없었고, 앞서 언급했던 고율의 보조를 보장해야 했다.
그림2 : 1936년 현재 ㈜조선경남철도가 운영했던 온양온천의 전경 출처 : 朝鮮總督府 鐵道局 編, 1938 《半島の近影》, 朝鮮總督府 鐵道局 하지만 언제까지 고율의 보조를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거두는 세입으로 충당할 수는 없었다. 앞서 인도처럼 재정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될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식민지로의 공채 발행을 되도록 피하고 싶은 일본정부(육군세력 포함), 철도망 증설은 필요하지만 가능하면 보조금 지출이 만들어내는 재정부담은 줄이고 싶은 조선총독부, 식민정부의 재정지원에 기대어 쉽게 이윤을 획득하고 싶었던 사설철도회사와 투자자들 간의 갈등으로 이해해야 전체상을 파악할 수 있다.
모든 권력 갈등이 그렇듯 조선총독부도 책임을 최대한 회피하면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자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정책적 절차를 구상했다. ① 우선 조선총독부가 보조금 지급을 약속하고 민간투자를 유치해 철도망을 부설한다. ② 그러나 언제까지 보조금을 지급할 수도 없고 총독부 소속 관영철도로 일원화 해 운영해야 손실을 분산시키고 이익을 공유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비용(보조금 지급보다 저렴하게)으로 해당 철도를 관영철도로 매수해야 했다. 총독부와 식민본국은 보조법을 만들던 1921년 시점에는 이 적절한 시기를 10년 후로 보아 보조기한을 10년으로 규정했다. 2년 후에는 이를 15년으로 늘렸다. 생각보다 철도가 수익이 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③ 매수를 하면 매수에 들어가는 비용(교부공채 발행에 따른 이자 지급)과 보조금 지출의 차액만큼 식민지 재정에 여유가 생기니 또 다른 사설철도 노선의 투자를 유도할 수 있다. 보조법은 사설철도에 보조할 수 있는 연 보조총액을 1930년 현재 500만 엔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 구상에서 여유분은 해당 법 규정의 총액 속 여유분을 의미한다. 정리하면 보조금 지급을 통한 민간투자 유치 → 15년 이내 총독부의 사설철도 매수 → 매수로 인한 보조금 여유분 만큼 새로운 노선 투자유치로 이어지는 선순환 정책 구상이었다. 이 구상대로라면 조선총독부는 식민본국의 재정 통제를 어느 정도 벗어나 민간투자를 통해 철도를 증설하고, 식민지 수익 극대화를 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구상을 이상적으로 구현하지 않는다. 1929년 세계대공황이 모든 구상을 붕괴시켰다. 보조법이 시행된 1921년을 전후로 조선에 들어온 사설철도회사 입장에서는 몇 년 후에는 법적으로 보장된 보조기한 15년이 임박한 시점이었다. 여전히 보조금이 없으면 배당이 불가능한 적자 운영이 지속되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공황이 터졌다. 총독부 구상의 허리에 해당했고, 식민본국의 재정지원이 필요했던 사설철도 매수가 불확실해졌다. 이상적인 시나리오가 모두 무너진 상황에서 식민정부, 자본가는 어떤 방식으로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을까? 식민본국은 일관되게 부담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대처했을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지만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해당 철도망을 이용했던 조선의 사람들은 교통을 통한 이동권을 정당하게 누릴 수 있었을까? 식민지라는 정치적 규정은 평소보다도 경제가 위기에 빠진 순간에 억압적인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다음 호부터 본격적으로 식민지의 사설철도를 둘러싼 서로 다른 권력의 욕망 충돌을 1930년대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미주>
1) 박흥수, 2013, 《철도의 눈물》, 후마니타스.
2) 앤드루 머리, 오건호 역, 2003, 《탈선 : 영국철도대란의 원인, 경과 그리고 해법》, 이소출판사, 44~46쪽; 허먼 M. 슈워츠, 장석준 역, 2015,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책세상, 283~288쪽. 3) 에드워드 챈슬러, 강남규 역, 2001 《금융투기의 역사》, 국일증권경제연구소, 192~204; 211~218쪽. 4) 정태헌, 2017, 《한반도철도의 정치경제학》, 선인, 186~187쪽. 5) 에드워드 챈슬러, 2001, 앞의 책, 228쪽; 케빈 필립스, 오삼교 역, 2004, 《부와 민주주의》, 중심, 482~484쪽. 6) 앤드루 머리, 2003, 앞의 책, 48쪽. 7) 老川慶喜, 2014, 《日本鉄道史-幕末・明治篇》, 中央公論新社, 190~191쪽. 8) 小林丑三郎, 1913, 《殖民地財政論》, 明治大学出版部, 21~23쪽; Ewout Frankema and Anne Booth, “Fiscal Capacity and the Colonial State: Lessons from a Comparative Perspective”, Fiscal Capacity and the Colonial State in Asia and Africa, C.1850-196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 12. 9) Dan Bogart and Latika Chaudhary, “Railway in Colonial India, An Economic Achievement?”, A New Economic History of Colonial India (New York: Routledge, 2016): 141-144; Ganeswar Nayak, “The Railways in Colonial South Asia”, The Railways in Colonial South Asia - Economy, Ecology and Culture (New York: Routledge, 2021): 28~34. 10) 이른바 거점형 식민지에서 영토적 식민지로의 지배방식 전환은 박상현, 2016 「식민주의와 동아시아 식민국가의 정치경제-통합 비교를 위한 시론」 《사회와 역사》111 참조. 11) Anne Booth, “Towards a Modern Fiscal State in Southeast Asia, c. 1900-60”, Fiscal Capacity and the Colonial State in Asia and Africa, C.1850-196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 36. 12) 「朝鮮私設鐵道補助法」, 《朝鮮總督府官報》 號外 1920.04.01. 13) 1921.03.11, 「第四十四回帝國議會衆議院 地方鐵道法中改正法律案外一件委員會議錄(速記) 第五回」, 12쪽; 鐵道時報局, 1923 《地方鉄道法令集》, 鐵道時報局, 53쪽. 14) 박우현, 2023, 《일제시기 조선사업공채 발행정책과 식민지 인프라 개발》,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6~9쪽. 15) 魏晨光, 2023, 《근대 일본 병참체제의 성립과 운영》,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43~163쪽. <참고문헌>
《朝鮮總督府官報》
小林丑三郎, 1913 《殖民地財政論》,明治大学出版部
鐵道時報局, 1923 《地方鉄道法令集》, 鐵道時報局 1921.03.11, 「第四十四回帝國議會衆議院 地方鐵道法中改正法律案外一件委員會議錄(速記) 第五回」 박우현, 2023, 《일제시기 조선사업공채 발행정책과 식민지 인프라 개발》,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박흥수, 2013, 《철도의 눈물》, 후마니타스 앤드루 머리, 오건호 역, 2003, 《탈선 : 영국철도대란의 원인, 경과 그리고 해법》, 이소출판사 에드워드 챈슬러, 강남규 역, 2001, 《금융투기의 역사》, 국일증권경제연구소 魏晨光, 2023, 《근대 일본 병참체제의 성립과 운영》,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정태헌, 2017, 《한반도철도의 정치경제학》, 선인 케빈 필립스, 오삼교 역, 2004, 《부와 민주주의》, 중심 허먼 M. 슈워츠, 장석준 역, 2015,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책세상 Dan Bogart and Latika Chaudhary, “Railway in Colonial India, An Economic Achievement?”, A New Economic History of Colonial India (New York: Routledge, 2016)
Ewout Frankema and Anne Booth, “Fiscal Capacity and the Colonial State: Lessons from a Comparative Perspective”, Fiscal Capacity and the Colonial State in Asia and Africa, C.1850-196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 Anne Booth, “Towards a Modern Fiscal State in Southeast Asia, c. 1900-60”, Fiscal Capacity and the Colonial State in Asia and Africa, C.1850-196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 Ganeswar Nayak, “The Railways in Colonial South Asia”, The Railways in Colonial South Asia - Economy, Ecology and Culture (New York: Routledge, 2021) 老川慶喜, 2014 《日本鉄道史-幕末・明治篇》, 中央公論新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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