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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⑦] 장안대로의 만담_염복규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7 BoardLang.text_hits 22,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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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4월(통권 28호)

[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 

 

장안대로의 만담

 

<長安大路의 漫譚>, <<매일신보>>, 1931.3.15.~26.


 

염복규(서울시립대학교)

 

* 지난 연재 보기


오랜만에 <<매일신보>>로 돌아와본다. 1931년 3월 10회 연재한 <장안대로의 만담>이라는 기사이다. 이 연재물은 전형적으로 경성 시내 이곳 저곳의 경관을 스케치하고 인상비평한 기사이다. 근대도시로서 외관이 완연한 1930년대 초 경성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먼저 각 기사는 시내의 어느 지점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정리해둔다.
 

각 회차의 부제로 거리의 특징을 보여주는 짧은 표현이나 단어를 내세운 점이 재미있다. 이 가운데 몇 회만 살펴보자. 1회 종로는 꿈과 장사의 합이다. 종로는 상업가로라는 것이며, 지금 시대는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게 곧 꿈을 이루는 길이라는 의미이다. 종로의 특징으로 드는 것의 하나는 夜市이다.
 

싸구려 싸구려 골라잡아 두 가지에 15전 亂調를 듼 생활의 노래는 밤마다 종로에서 합주된다. 종로 네거리에서 단성사 앞까지 전개되는 夜市는 종로가 장사거리로 가지는 한 특색이려니와 이 야시는 다시 일전하여 무산대중의 밤저자로도 볼 수 있다. 야시 물건은 싸더라 이 한 말만으로도 가난한 시민의 발을 끌게 할 것이다. 골라잡아 두 가지 10전 담배 한모금을 빨려고 해도 5전이 있어야 하는 때에 이 소리는 가난한 시민을 부르는 처량한 노래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랴. (1회)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오늘날 도심부의 노점상을 떠올리면 비슷하다. 경성의 야시는 1910년대 초 일본인이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한 태평통에서 시작되었다. 도쿄의 야시를 본뜬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곧 이어 1916년경부터 태평통을 본따 종로 야시가 시작되었다. “종로 네거리에서 단성사 앞”이라는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대략 종로2,3가가 중심이었던 듯 하다. 1930년대 후반의 기사는 야시의 점포 형태를 “굵지 못한 기둥, 이것을 네 개쯤 세우고 우로 천정을 만들만한 가로지른 나무를 걸친 뒤에 여기에 전등 한 개쯤 달아놓고 물건을 벌려놓은 일렬종대의 진을 쳐놓”은 것으로 묘사했다. (동아일보, 1938.7.9.) 야시는 상업의 한 형태이면서 전등의 보급과 더불어 시작된 근대도시의 밤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1920년대 이래 경성 ‘관광’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되면서부터는 경성의 풍물을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되기도 했다. 1940년 총독부 철도국이 만든 기록영화에도 야시가 등장한다.


그림 1. 총독부 철도국의 기록영화 <경성>(1940) 속의 야시 풍경
 

지금부터 약 20년 전 황금정에는 쎄멘트가 우마차에 실리어 운반되었다. 동양척식회사는 건립되었다. 이어서 생명보험주식회사 삘딩 등 거리에는 양옥이 줄을 지어 서게 되었다. 모던 거리 황금정은 다시 아스팔트의 길이 되었다. 자동차를 타면 얼음 위를 미끄러져 가는 듯 인력거를 타도 졸음이 온다. (중략) 스톱! 교통순사의 오른팔은 들리었다. 모든 교통기관은 이 육체의 신호에 동작을 한다. 붕, 붕, 붕, 붕. 자동차와 전차는 狂騷스러운 경적 소리를 내인다. 가상의 무용가 교통순사는 팔과 다리를 놀리어 춤을 춘다. 이리하여 스피드 문명의 도시의 교통의 치안은 보장되어간다. (2회)


조선인 거리의 대표격인 종로에 이어 2회는 황금정(을지로)을 소개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황금정은 본정과 더불어 일제하 경성의 대표적 일본인 거리이다. 그런데 본정은 일본인이 처음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상징성이 큰데 비해 실제 주요 시설이나 회사 등이 많이 입지한 곳은 황금정이었다. 오늘날 도시계획학의 용어로 중심업무지구(CBD)를 조성하기 위해 조선시대 간선도로와는 거리가 멀었던 구리개(銅峴)을 1910년대 시구개수 과정에서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만든 도로가 황금정이다. “약 20년 전 황금정에는 쎄멘트가 우마차에 실리어 운반되었”다는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일제가 경성에서 최초로 조성한 신도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시구개수 전후를 비교한 지도를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림 2. 1910년대 황금정 시구개수 전후의 비교, 도로폭의 확장과 직선화가 확연하게 보인다. (위 – 1911, 京城龍山市街圖 아래 – 1913, 京城市街全圖)
 

대부분의 사람은 배오개시장과 창경원과 대학병원으로 오고가는 사람이 점령하였다. 종로4정목에서 남으로 왼편에 큰터를 잡고 있는 것이 배오개시장. 기지는 3,141평5합. 이 가운데서 건물이 점령한 땅은 815간. 점방을 경영하는 사람은 120명이다. 이 시장의 특징은 소채, 생선, 미곡, 과실 등 우리의 실생활에 직접 소용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가물치 한마리에 3원 정가가 붙었다. 크기도 하다. (중략) 작년의 총입장자는 55만여명에 달한다. 한발걸음 옮기고 눈을 크게 뜨고 두발 걷고는 감탄하는 곳은 동물원이다. 獸類가 33종에 102마리, 조류가 125종에 442마리이다. (중략) 이 동물원이 창설되자 독일서 온 것이 하마와 코끼리이었다. 하마는 아홉마리의 자녀를 낳았고 코끼리도 여러 형제의 자녀를 보았다. (중략) 동물에게 제왕으로 군림하는 사자는 아프리카산으로 15년 전에 역시 독일서 두마리를 구입하였다. 번식이 드문 사자도 창경원의 대접이 후하여 네마리의 아들딸을 낳았다. 하루에 먹는 음식은 소고기 한관, 우유 두병, 이만하면 일류 여관의 손님의 대접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중략) 창경원 안에는 대개가 외국 손님을 많이 머물게 하는 근대의 호텔 비슷하다. (4회)


4회는 종로4정목이다. 종로를 이미 소개했음에도 종로4정목을 따로 소개하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보통 ‘종로’라고 말할 때의 인지적 한계는 대략 종로3가까지임을 알 수 있다. 종로4가부터 동쪽으로는 ‘종로’라기보다 ‘동대문’에 가까운 것이다. 이 곳은 배오개시장(동대문시장), 창경원, 대학병원으로 대표된다. 기사에서 당시 배오개시장의 규모를 다소 짐작할 수 있다. 창경원을 대표하는 동물이 주로 독일에서 온 것이라는 점도 재미있다. 대체로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산으로서 독일, 일본을 경유하여 들어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술과 에로는 근대도시인의 비타민A이다. 여기에 넌센스를 가한 신풍경은 세계를 풍미하고 있다. 애염과 추파를 다분으로 공급하는 거리는 신정유곽을 옆에 낀 본정4정목이다. 청등홍등의 조명― 레코드의 째즈― 貞操시장의 낭자군― 본정4정목의 정류장에서 동으로 향하야 걸음을 걸으면 1923년의 신경을 가진 사람도 어느덧 신도시에 橫溢하는 유혹에 도취한다. 본정4정목과 신정은 범과 사자가 술을 먹는 무서운 거리― (중략) 본정4정목 거리에 발을 들여놓으면 입구초부터 좌우에 무슨 카페, 무슨 식당 등의 간판이 얼굴을 갖추고 있다. 째즈의 음파가 길거리를 흘러나오는 문머구에 연지와 분에 얼굴을 파묻고 백색 에프롱을 걸치고서 미소를 분배하는 웨트레쓰. (중략) 본정4정목의 에로는 다시 연장되어 병목정과 신정의 유곽으로 전개하였다. 정조취인을 하는 여자는 873인. 이 취인시장에서 투기업을 하는 상인은 1년간에 1만7,076명. 들고나는 돈은 90만1,245원5전. 이 시장만에는 불경기의 바람도 침정을 지킨다. 신정의 신풍경 하나. 유리창문으로 노란 눈알을 반짝이며 서분 일본말로 조선말로 손님을 부르는 로서아 창녀 한명이 있음을 본다. 10전짜리 죠코레트 한갑에 50전을 빼앗기고 나온 피해담을 비롯하여 이 밖에 기이한 진담이 이 양키 창녀를 에워싸고 에로계에 떠돈다. 이 양키 창녀의 출현으로 신정은 일층 국제시장의 색채를 기분이라도 띠었다. (5회)


종로4정목의 뒤를 잇는 거리는 본정4정목이다. 일본인 거리의 상징성이 큰 ‘본정통’을 소개하지 않으면서 본정4정목을 별도로 소개하는 점이 눈에 띈다. 이 곳은 “애염과 추파를 공급하는” 전형적인 유흥가이다. 본정통에서도 가장 ‘변두리’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에 바로 이어지는 곳이 신정 유곽과 병목정 유곽이다. (현재 중구 필동과 쌍림동) 위에서 알 수 있듯이 1931년 현재 두 유곽의 성매매 여성은 873명, 1년간의 손님은 1만명이 넘는다. 신정 유곽은 통감부 시기 형성된 경성의 대표적인 일본인 유곽이며, 병목정 유곽은 신정의 영향으로 형성된 조선인 유곽이다. 두 곳은 붙어있지만 한편으로는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그림 3. 1931년의 신정 유곽 (매일신보, 1931.3.19.)
 

신마치는 언덕 아래가 미로 비슷한 조선인 매음굴이고, 언덕 위가 일본인 유곽과 요릿집이며, 언덕 중간에 그 두 부류가 뒤섞여 있었다. 일본인 유곽은 위생적인 느낌이 들었고, 조선의 갈보 거리는 남루한 느낌이 들었다. (다나카 히데미츠․유은경 옮김, <<취한 배>>, 소화, 1999.)

 

“자, 그러면 여기서 헤어지기로 할까. 나는 이쪽이고, 자넨 저쪽으로. 그럼 잘 가게……” 후루야는 그렇게 말하고는, 경태의 어깨에 걸쳐 놓았던 팔을 풀어 조선인 사창가 쪽을 가리킨 다음, 자기는 일본인 유곽 쪽을 향하여 비틀비틀 걸어갔다. (김달수․김석희 옮김, <<현해탄>>, 동광출판사, 1989.)


일제말기 조선에서 활동한 소설가 다나카 히데미츠(田中英光)과 재일한국인 소설가 김달수의 작품은 공간적으로 붙어있는 일본인 유곽과 조선인 유곽이 당시인에게 어떻게 구분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술에 취해 어깨동무를 하고 걷다가 자연스럽게 이쪽, 저쪽으로 헤어질만큼 몸에 익은 것이었다.

한편 위 기사는 1931년 현재 신정 유곽에 러시아 여성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조선으로 건너온 이른바 백계 러시아인 출신이다. 1920년대 초 주로 연해주 일대의 백계 러시아인이 한반도로 도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산에서는 한때 이들을 위한 수용소도 운영되었다. 러시아인 대부분은 조선을 거쳐 상하이, 홍콩,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캐나다 등지로 흩어졌다. 하지만 소수 조선에 남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러시아 접경지인 함경북도 주을에 마을을 형성했다. 1930년대 주을의 러시아인 마을에는 보리스 브린너라는 사람도 있었다. 후일 헐리우드에서 대스타가 되는 율 브린너의 아버지이다. 어머니와 블라디보스톡에 남았던 율 블린너는 방학 때 주을에 와서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그림 4. 원산의 백계 러시아인 수용소와 주을 러시아인 마을의 율 브린너, 주을의 러시아인 마을에 대해서는 EBS에서 2010년 방영한 <1935년 코리아, 스텐 베리만의 기억>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다룬 바 있다. 스텐 베리만은 스웨덴의 동물학자로서 1935년 조선에서 와서 몇 달 간 탐방한 기록을 남겼다. 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주을의 러시아인 마을도 여러 날 취재했다.
 

경성에 남은 러시아인도 있었다. 어차피 달리 갈 곳이 마땅치 않다면 최대한 대도시에 남아야 먹고살 길이 열릴 것이었다. 1920년대 말 현재 2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 중에는 본정에서 이국적인 상점이나 제과점 등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위 기사와 같이 성매매에 종사하게 된 여성도 있었던 것이다. 별다른 연고가 없는 젊은 여성에게 놓인 가장 쉬운 선택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직접적인 성매매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비슷한 경우는 더 찾아볼 수 있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은 1932년경 처가가 있는 함경북도 경성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당시 쓴 수필에는 경성 읍내에 있는 “러시아 여급”이 있는 술집을 다닌 이야기도 나온다. 변혁기 역사에서 잊혀진 자의 流轉은 고달프고 때로는 잔인하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남성의 시선으로 포착한 여성의 모습으로 많이 드러난다. 위 기사처럼.

“가정불화, 실연, 병고, 생활난” 등으로 작년 1년간 49명의 “목숨이 사라진” 한강교를 소개하는 7회와 “경성의 번화를 축도”한 “떼파트멘트”의 거리 조선은행앞을 소개하는 8회에서는 자본주의 도시 경성의 빛과 그늘의 대비가 전형적이다. 조선은행앞, 이른바 센킨마에(鮮銀前)는 도시 경성의 화려한 번성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일본인 거리인 본정의 입구에 해당한다. 한 연구에서는 조선은행앞이라는 공간의 이미지를 경성의 이상과 현실을 매개하고 또 구분짓는 결절점이라고 표현했다. 화려함의 이면에 한강교에서 몸을 던지는 고단한 현실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림 5. 조선은행앞의 백화점와 한강교의 대비되는 이미지 (매일신보, 1931.3.22., 23.)
 

모든 것은 진보한다. 관리가 권력을 가진 계급이었다는 것은 옛이야기. 시대의 여명은 새로운 선언을 높이 들었다. 인간의 모든 것은 먹고살기 위하여. 아침과 저녁 定律的으로 광화문 거리로 발을 옮기는 관리 그들은 어느덧 노동계급의 하나인 사라리맨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구시대의 교양과 신시대의 생활이 합류되는 속을 이들은 어떻게 헤엄을 칠 것인가. (중략) 총독부, 도청, 체신국 등 큰 관청을 가지고 있는 이 거리는 하루에도 두 때 아침과 저녁에 사람의 홍수를 만난다. 총독부 1,700명, 도청 200명, 체신국 400명, 전화국 420명, 이 2,700여명의 사라리맨들은 아침은 여덟시부터 아홉시까지 저녁은 네시부터 다섯시까지 광화문 거리에 나타나 가두 풍경의 하나를 이룬다. (6회)

 

동경 神田區의 고물서적점을 보고 일본의 문명을 구가한 서구의 학자가 있다. 안국동 네거리에는 언제나 학생의 떼가 지나간다. 이 학생의 거리를 보고 축복하여줄 이는 누구인가. 책을 옆에 끼고 씩씩하게 발을 옮기는 남녀학생. 이들은 지평선 저쪽까지 뻗은 희망에 약동하는 젊은 용사들이다. 신조선의 생명은 무럭무럭 자라난다. 예술가, 교육가, 실업가, 종교가, 학자 등 어찌 조선의 일군이 이 학생들이 아니랴. 학생의 거리 안국동은 조선의 위대한 어머니 거리이다. (9회)


6회의 광화문과 9회의 안국동도 재미있는 면이 있다. 광화문은 관리의 거리이다. 기사에 따르면 아침, 저녁 그 곳을 오가는 관리는 3천여명에 가깝다. 그런데 그들은 “권력을 가진 계급”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하여” “발을 옮기는” “노동계급”이다. 그저 “랏슈아와(러쉬아워)”을 이루는 “사라리맨”에 불과한 것이다.


그림 6. 경복궁 총독부청사에서 광화문 네거리까지의 관청가, 1. 보험관리국 2. 순사강습소(1+2 현재 정부서울청사 블럭) 3. 위생시험실 4. 전화국 5. 위체저금관리국 6. 체신국 7. 경기도청(현재 의정부터 발굴지) 8. 경찰관강습소(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주한미대사관) 9. 경성법학전문학교 10. 간이보험국 (1933, 京城精密地圖)
 

그런가 하면 안국동은 학생의 거리이다. 이는 단지 학교가 모여있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그곳을 오가는 학생은 “희망에 약동하는 젊은 용사”이며 “신조선의 생명”이다. 그리하여 “안국동은 조선의 위대한 어머니 거리이다.”


그림 7. 안국동 중심 북촌 일대의 학교들 1. 중앙고보 2. 경성제일고보(경기고등학교, 현재 정독도서관) 3. 보성전문학교 4. 근화여학교(현재 덕성여고) 5. 경성여고보(경기여고) 6. 휘문고보 ※ 근화여학교 아래 창덕궁별궁은 보통 안국별궁이라고 불린다. 1944년 이 자리에 풍문여학교가 설립되었다. 현재 서울공예박물관 (1933, 京城精密地圖)


총독부 관리는 일개 월급쟁이일 뿐이며, 학생은 앞으로 조선의 희망이다, 라는 진술은 서로 전혀 다른듯 보이지만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식민지성이 휘발된 순수한(?) 근대 도시로서 경성을 표상한다. 전반적으로 <장안대로의 만담> 속의 경성은 슬픔도, 아픔도 있는 도시이지만 그것까지 포함하여 근대 자본주의 도시의 경로를 순조롭게 밟아가고 있는 도시로 보인다. 1930년대 초 경성에서 이는 현실이기도 하고, 또 현실을 그렇게 유도하기 위한 <<매일신보>>의 매체 전략이기도 할 것이다.

 

참고문헌

권영란, <근대 도시 야간경관의 태동과 변화 양상>,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8.
김백영, <<지배와 공간>>, 문학과지성사, 2009.
박현, <일제시기 경성의 창기업 번성과 조선인 유곽 건설>, <<도시연구>> 14, 2015.
성효진, <경성의 결절점 – 선은전>, <<미술사와 시각문화>> 28, 2021.
한국영상자료원 KMDB(https://www.kmdb.or.kr/)
황동하, <식민지 조선의 백계 러시아인 사회>, <<향토서울>> 83,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