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남주북병(南酒北餠)

BoardLang.text_date 2005.10.28 작성자 전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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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 12 - 남주북병(南酒北餠)

영조 38년(1762) 음력 9월 17일, 임금이 친히 숭례문에 나아가 남병사(南兵使) 윤구연(尹九淵)의 참형(斬刑)을 지켜 보았다. 당당한 수신(帥臣)을 참형에까지 이르게 한 것은 “금주령(禁酒令)이 시행되는 중에 술냄새가 나는 술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죄였다. 물론 윤구연이 금주령을 어긴 탓으로만 죽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뒷날의 사신(史臣)은 권극(權極), 남태회(南泰會) 등이 교묘한 방법으로 윤구연을 사지(死地)로 몰아 넣었다고 썼다. 먼저 사간 권극이 금주령을 위반하는 자는 효시(梟示)할 것을 청하여 비답(批答)을 얻었고, 이어 대사헌 남태회가 윤구연이 금령을 어기고 늘상 술에 취해 다닌다고 고발하는 한편 선전관 조성(趙峸)이 증거품으로 ‘술냄새 나는 병’을 찾아냄으로써 영조로 하여금 윤구연을 죽이지 않을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인류가 술을 발명한 이래로 ‘술’과 관련된 죽음은 아마도 전체 죽음에서 상당한 비중을 점했을 것이다. 술 취한 자에게 맞아 죽거나, 술 취해 해서는 안될 소리를 했다가 잡혀 죽거나, 술김에 다투다 죽거나, 겨울철 술 취해 밤길을 걷다가 얼어죽거나, 여름철 술 취해 징검다리를 건너다 실족해 죽거나, 아니면 술독이 올라 - 술이 요즈음처럼 흔하지는 않았으니 알콜성 질환에 의한 죽음은 극히 적었을 것이지만 -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본다면 ‘집에 술냄새 나는 병을 보관’했다는 이유로 죽은 윤구연이 특별히 억울해 할 이유는 없을 터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 권력이 술과 다투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결국 술이 이기기는 했지만, 그 다툼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옥살이를 하거나 심지어는 죽기까지 했다.

혹자는 술을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으로 꼽기도 한다. 술은 사람의 오감(五感)을 두루 자극할 뿐 아니라 예술적 충동을 불러 일으키고 나아가 관련 산업을 발전시킨다. 빛깔, 따르는 소리, 향기, 입안에서 느껴지는 감촉,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의 느낌, 뱃 속에 들어갔을 때의 감각, 취기가 오르는 속도, 술에서 깨어날 때의 기분이 술에 따라 다 다르다. 사람들은 그 감각 전부, 또는 일부를 즐긴다. 특히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는 있지만 ‘만취한 상태’는 ‘신들린 상태 = 미친 상태’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술은 사람을 초인(超人)으로 만든다. 확실히 술은 특별한 음식이요, 인간이 신(神)에 접근할 수 있는 보편적 - 술보다 훨씬 더 강하고 빠른 효과를 내는 것이 마약(痲藥)이지만, 이것이 보편화된 일은 거의 없었다. 덧붙여 마약(痲藥)의 중독성에 주목하여 담배를 마약의 일종으로 취급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중독성보다는 환각성이 더 큰 문제일 것이다. 김치나 커피 같은 음식에도 어느 정도의 중독성은 있게 마련이다 - 도구이다. 당연히 세계 어느곳에서나 가장 비싼 음식은 ‘술’이요 최고의 예술성을 지닌 그릇도 거개가 술과 관련된 것들이다. 밥그릇보다는 술잔이 좋아야 하고 물병보다는 당연히 술병이 비싸야 한다. ‘신성한 음식’을 담는 도구는 그 자체로 고귀해야 했다.

애초에 술이 ‘신성한 음료’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그를 만드는 원료에도 ‘신성’의 이미지가 따라 붙었다. 술의 원료는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그를 만드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같다. 모든 술은 발효, 숙성 또는 증류, 혼합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엄밀한 의미에서 발효주, 증류주, 혼합주(발효주 또는 증류주에 색소, 향료, 기타 천연약재나 꽃잎 등을 섞은 것) 외에는 술이 아니다 - 한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소주(燒酎)’는 인공적으로 뽑아낸 알콜에 물과 감미료를 섞은 것이어서 아무리 독해도 ‘알콜 함유 음료’일 뿐 ‘술’은 아니다. 여기에는 절대로 신성을 부여할 수 없다 -. 그런데 술의 원료가 되는 ‘신성한 곡식(또는 과일)은 대체로 ’주곡(主穀)‘과는 달랐다. 전세계적으로 본다면 보리, 포도, 수수나 사탕수수가 주로 술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이나 일본처럼 주곡(主穀) = 쌀을 바로 술의 원료로 삼는 경우는 드문 예에 속한다.



김득신(金得臣)의 신선도(왼쪽)과 김홍도(金弘道)의 군선도(오른쪽).

신선의 필수 소지품은 다름 아닌 술 호로였다.

술은 신성을 담고 있는 유일한 음식물이었으니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을 주선(酒仙)이라 하기도 했다.

 

오누키는 일본인들에게는 쌀이 천황권(天皇權)과 직결된 것으로서 그 자체로 일본 민족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비록 대다수 일본인들이 쌀을 주식으로 한 기간이 100년 남짓 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 현재에는 이미지로만 ‘주곡(主穀)’인 상태에 머물러 있지만, 쌀은 그들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핵심 요소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라고 해서 사정이 다를까. 지금도 한반도 어느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살’과 ‘쌀’을 발음만으로는 구분하지 못한다.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쌀’ 이외의 곡식은 뭉뚱그려 ‘잡곡(雜穀)’이다. ‘잡스러운 것’을 들고 신에게 다가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정(精)’하고 ‘정(淨)’한 쌀로 술을 담그어야 했다. 한국에서 기타제제주인 소주(燒酎) 시장이 급속히 확대되는 데에는 박정희 정권의 ‘쌀막걸리’ 금지 조치도 한 몫 했다.

한 되의 제대로 된 소주(燒酒)를 만드는 데에는 대략 같은 분량의 쌀이 소요된다. 여기에 누룩과 물, 시간과 손길이 추가되어야 하니 증류주 한 되의 가치는 쌀 한 되의 가치를 멀리 뛰어넘는다. 귀한 음료인만큼 귀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했다. 귀한 것과 드문 것은 서로 통하는 법이니, 소주(燒酒)와 같은 좋은 술은 일생에 몇 번 - 19세기까지 한국인들의 평균 수명이 40살을 넘지 못했던 것과 어린아이와 여자에게는 술을 주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라 - 마실 수 없는 음료였다. 조상을 모시는 제사 때, 설날과 한가위 같은 축일(祝日) 때가 아니고서는 술을 입에 대기가 쉽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기껏 술 담그고 남은 찌꺼기에 물을 타서 - 술찌게미를 음식 대용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쌀의 미덕 중 하나이다 - 마시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술을 자주 마실 수 있는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특권 신분’임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김홍도의 “주막(酒幕)”.

18세기에는 술을 파는 주막이 도성 내외 도처에 들어섰으니 돈만 있으면 누구나 신선이 될 수 있었다.

다시 앞서 얘기한 사건으로 되돌아가 보자. 남태회, 권극 등은 윤구연이 “매일 술에 취하는” 사람인 것을 알고, 주금(酒禁) 위반을 빌미로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이 무렵 서울의 고관(高官)들 중에는 술을, 매일, 취하도록, 마시는 사람이 이미 적지 않았던 것이다. 비단 고관들 뿐이 아니었다. 그 친지들, 겸인(傔人)들까지도 함께 어울려 밤새도록 술 마시고 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루밤 잔치에 소 한마리 - 최근에는 이런 상호를 단 고기집도 곳곳에서 성업중이다 - 가 안주거리로 사라지기도 했다. 성문밖 동막(東幕)에는 수백동이의 술을 담가 두고 파는 ‘술도가’도 있었다. 쌀 한말로 지은 밥을 한 자리에서 먹을 수 있는 ‘대식가(大食家)’는 없다. 그러나 ‘두주불사(斗酒不辭)’의 호주가(好酒家)는 있다. 내 경험에 - 오해 마시길. 과거 어떤 친구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나에게 술 사는 일이라고 한 바 있다. 여기에서 경험이라고 한 것은 오직 ‘본 바’일 뿐이다 - 비추어 보면, ‘밥 배’와 ‘술 배’는 분명 다르다. 술의 원료로 소비되는 쌀은 ‘배 불리는 쌀’과는 다른 쌀인 셈이다.

18세기 중엽 서울에 반입되는 쌀 중 대략 1/3 정도가 양조용(釀造用)으로 쓰였다. 이 무렵 서울 주민들이 ‘밥’으로 먹는 쌀이 연간 100만석 정도였으니 ‘술’로 먹는 쌀은 그 절반인 50만석에 달했던 것이다. 굶주림을 참지 못해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서울로 밀려드는 거지떼, 땅꾼이 날로 늘고 있는데, 같은 도시 한 켠에서는 ‘밥 배’를 채우는 것으로 모자라서 ‘술 배’까지 가득 채우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왕정(王政)의 불인지심(不刃之心)으로 이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영조의 금주령(禁酒令)은 바로 “배 불리는 데 쓰이지 않는” 쌀 소비를 줄여 백성의 질고(疾苦)를 풀어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세계사상에서 금주령(禁酒令)이 끝내 성공한 예(例)는 없었다. 이 때에도 제사에 쓰기 위해서라거니 병자용 약으로 쓰기 위해서라거니 노인을 봉양하기 위해서라거니 하면서 갖은 예외 사안을 만들어 술을 만들고, 팔고, 마셨다.

보통은 술과 전혀 다른 것으로들 생각하지만 재료면에서나 기능면에서나 효용면에서 술에 상응(相應)하는 것이 ‘떡’이다. 우선 떡은 쌀, 그 중에서도 특히 좋은 쌀로 만든다. 또 떡은 술과 함께 제례에 사용되는 음식이며, 끝으로 ‘떡’ 역시 ‘밥’을 완벽하게 대체하지 못한다. 김유정은 오랫동안 굶주린 한 계집아이의 잔치집 식탐을 소재로 하여 단편소설 “떡”을 썼다(“중앙” 1935.6). 소설에서 열여섯 먹은 작은애기(소실)는 한없이 먹어대는 일곱살 계집아이의 식탐이 신기하여 먼저 이밥을 주고, 이어서 팥떡, 백설기, 꿀바른 주악을 내온다. 밥만 먹은 뒤에도 이미 ‘바람넣은 풋볼’처럼 배가 불러 있던 계집아이는 신기할 정도로 뒤에 내온 떡들을 우겨 넣는다. 김유정은 음식을 내온 순서가 반대였다면 그 계집아이가 결코 그를 다 먹지는 못했으리라고 단정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밥 먹은 뒤에도 ‘죽기 직전까지는’ 떡을 먹을 수 있었다. 떡 역시도 쌀을 과잉소비케 하는 음식인 것이다.



19세기말의 술도가.

바닥에 늘어 놓은 고두밥만으로도 쌀 한 석 분량은 넘을 듯 하다.

일제가 주세(酒稅)를 부과하기 전에는 이 정도 규모의 술도가가 도처에 있었다.

 



18세기 이후 서울에서는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남촌 사람들은 술 빚어 마시는 걸 즐겼고, 북촌 사람들은 떡을 잘 만들어 먹었다는 뜻이다. 다음에 장황히 쓰겠지만, 오늘날 종로 이북과 율곡로변의 여러 동네 - 계동, 재동, 가회동, 안국동, 경운동, 원남동, 와룡동 등 - 를 북촌이라 했고, 을지로 남쪽으로 충무로를 가로질러 남산 기슭 일대 - 필동, 남산동, 주자동, 묵정동, 저동, 인의동, 회현동 등 - 를 남촌이라 했다. 수질(水質)로만 따진다면 진흙이 섞여 들어간 남촌의 물보다는 백운동, 청학동 계곡의 화강암반을 타고 흘러내리는 북촌의 물이 더 좋았다. 남북촌을 술과 떡으로 갈라놓은 것은 재료가 아니라 소비자의 기호였다.

 

이 무렵 남촌에는 무반(武班)이 아니면 실세(失勢)한 남인(南人)들이 모여 살았고 - 윤구연 역시 남촌의 이현(泥峴), 즉 오늘날의 충무로 일대에 살았다 - 북촌에는 무시로 궁궐에 출입하는 노론(老論) 벌열가문이 모여 살았다. 아무래도 술에는 “주량(酒量)”을 사내다움의 정도와 동일시하는 무인(武人)의 ‘마초이즘’이나 불우(不遇)를 한탄하는 낙척서생의 ‘한(恨)’이 잘 어울린다. 사내들끼리 주량을 겨루는 일은 흔히 볼 수 있고, 대체로 그걸 비난하지도 않는다. 또 ‘쓸쓸한 심사’는 떡으로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반면 떡은 딱이 배가 고프지 않으면서도 무엇인가 궁금할 때 어울리는 음식이다.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세상 만사를 즐기면서 대청에 모로 누워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이 떡이다. ‘누워서 떡먹기’가 가능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북촌의 유력 인사들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떡메’ 소리를 하냥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17-18세기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기반하여 나타난 잉여미곡은 이런 식으로 자태를 변환하여 한계효용의 법칙을 돌파하면서 새로운 소비시장을 만들어 냈다. 서울뿐 아니라 지방의 소도읍지나 농촌에서도 술과 떡의 소비는 늘었을 터이다. 흔해지면 천해진다. 아니 적어도 더 이상 귀한 것으로 대접받기는 어렵다. 더구나 이 음식물에는 신분적 제한이 없었다. 집의 규모에도, 의복과 관대(冠帶)에도, 하다 못해 밥상에 올리는 반찬의 가지수에도 신분별 제한이 있었지만, 술이나 떡은 능력 - 오늘날 이 단어는 돈이나 재산과 완전히 같은 뜻으로 쓰인다 - 만 있으면 아무나 먹을 수 있었다. 술과 떡의 원료물자인 쌀이 특권적 지위를 잃고 베나 돈과 함께 등가교환의 세계로 휩쓸려 들어가면서 쌀, 술, 떡이 갖는 신성성과 더불어 도시 자체가 지녀온 신성성도 변화하였다. 조상신이나 산천신, 부처나 왕의 자리를 물신(物神)이 대체하기 시작했다. 남주북병(南酒北餠)은 서울의 남촌과 북촌이 만들어낸 물화(物化)된 신(神)을 이르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