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덕수궁 돌담길(1)

BoardLang.text_date 2006.09.29 작성자 전우용
페이스북으로 공유 트위터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서울이야기 20 - 덕수궁 돌담길(1)


내 가까운 지인(知人) 중에 오랫동안 중동(中東) 지사(支社)에서 근무한 사람이 있다. 그는 언젠가 우스개소리로 한국 주재원들과 현지인들이 한 테이블에 둘러 앉으면 외모보다도 먼저 안경 착용 여부로 국적을 판별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수시로 모래바람이 부는 땅에서 설마 콘택트렌즈를 주로 사용하지는 않을테니, 그쪽 사람들은 분명 한국인들보다 시력(視力)이 좋을 것이다. 몽골이나 알래스카 같은 초원지대에 사는 사람들도 먼 곳에 있는 사물을 한국인들보다 훨씬 잘 식별한다고 한다. 몽골에 갔던  다른 지인(知人)이 전해 준 이야기인데, 초원 위 먼 곳에서 가물가물 움직이는 점의 정체를 현지인에게 물었더니, 바로 말 탄 사람이라고 대답하더란다. 그는 심지어 말 탄 사람이 입은 옷의 색깔까지 맞추었다고 한다. 나 자신 몇해 전에 강의실에서 몽골 학생 몇 명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 중 안경 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79c2526c3f7fe05afe57df71a752e2a6_1698397
<사진 1> 원경(遠景)은 현대 도시의 일상 너머에 있는 경관(景觀)이다. 안에서든 밖에서든 사람들의 시야(視野)를 채우는 것은 모두가 근경(近景)인데 그나마 너무 많아 정신없이 ‘눈알을 돌려야’ 한다. 도시에서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눈이 빨라야’ 한다.


시력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자연광과 백열등, 형광등이 시력에 미치는 영향이 각각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같은 환경 속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시력은 천차만별이니까. 그러나 경향적으로 보자면 근시(近視)는 일종의 도시적 풍토병이다. 도시의 밀집된 물리적 환경과 도시 생활의 기계적 반복성은 지속적으로 시력을 갉아 먹는다. 한국처럼 산이 많은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평생을 가야 지평선을 볼 일이 없다. 그저 초점이 맺히지 않는 허공(虛空)을 바라보지 않으면 기껏 눈 앞 2~3㎞ 앞에 시선을 고정할 수 있을 뿐이다. 도시에서는 더 심하다. 오늘날 서울 사람들은 100m 전방의 사물을 응시하는 일조차 드물다. 거리에 나가면 불과 10~20m 앞에 육중한 건물이 막아 서 있고, 길을 걸을라치면 2~3m 앞의 간판들이 시선을 가린다. 복잡한 도심에서는 스칠 듯 가까운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대면해야 한다. 사무실이든 방 안이든 눈과 벽 사이의 거리는 길어야 3~4m이지만 일상의 시선은 그 벽에까지도 도달하지 못한다. 대개는 50cm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 모니터나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산다. 가까운 곳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곧 도시 사람들이다. 현대 도시보다는 훨씬 나았겠지만, 고대도시든 중세도시든 도시는 인위적 구조물들이 절대적 상대적으로 조밀하게 들어선 공간이었고, 그 탓에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근시로 만들었다.


멀리 내다본다거니 근시안적이라거니 하는 말도 말 자체로는 사람과 그의 시선이 닿는 지점, 즉 공간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지만, 이 역시 - 이에 관해서는 앞의 “촌뜨기”에서 도시와 농촌을 얘기하면서 한 번 언급한 바 있다 - 실제로는 시간대와 관련된 말로 쓰이고 있다. 근시안적인 사람은 ‘눈 앞의 이익’만을 챙기다가 정작 더 큰 미래의 ‘보상(報償)’을 놓치는 사람들이다. 조선 후기 이래 ‘제 꾀에 제가 속아 넘어가는’ ‘서울 깍정이’의 속성으로 자주 거론된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도시적 삶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 앞의 사물에만 집중하고 그 뒤에 펼쳐진 경관(景觀)은 무시하게 만든다. ‘경박성(輕薄性)’이 도시적 삶에 외피처럼 달라 붙어 있는 본질적 구성요소가 된 데에는 이런 사정도 단단히 한 몫 했을 터이다. 하나마나한 이야기이지만, 도시가 ‘압축적으로 표현된 근대적 공간’인 이상, 근대인들의 삶 자체가 경박성을 면할 수 없는 것이요, 그런 점에서 “도시에서는 시감각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짐멜의 말은 도시인들의 표피적 사고에 대한 통찰의 소산이라고 할 것이다.


4e08c9764c74af99787fd73dca379df1_1698397
<사진 2> 현대 도시의 구조물들은 ‘초(超) 인간적’ = 비인간적 규모를 자랑한다. 이 엄청난 구조물들은 걷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자연을 빼앗아 가 버린다. 그러나 도시인들은 자신을 둘러싼 기계적 실체가 크면 클수록 더 큰 만족감을 느낀다. 초고층빌딩들이야말로 ‘도시적 분위기’를 만드는 일차적 공간요소들이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the Seeing is Believing 이라고는 하지만 보이는대로 믿는 성향은 도시 사람들에게 특히 심하다. 그리고 조금만 예민한 사람이라면 이런 집단적 성향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도시는 본래가 자연적 요소보다는 인위적 요소가 압도적 비중을 점하는 공간이다. 그런만큼 도시민들에게 주입되는 시각 정보는 거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 심하게 말하면 조작된 - 정보들이다. 공간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도시 공간을 분할하고, 요소요소에 전달하고 싶은 정보와 이미지를 담은 구조물을 세워 놓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오늘날 ‘권력’이라는 단어는 여러 함의를 가진 말로 쓰이고 있지만, 도시 공간과 관련해서는 ‘공간을 개조할 수 있는 힘’ 정도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내 경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평면공간은 책상 위의 1/3평에 불과하다. 거실 가구의 위치는 물론 책상의 위치조차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렇게 보면 내 아내가 나보다는 권력이 조금 더 많은 셈인데, 대다수 한국인 가정이 그렇게 공간 권력을 배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그만 땅이라도 가진 사람들은 그 위에 어떤 건물을 지을 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고, 더 넓은 땅을 가진 사람들은 공장이든 리조트든 시설물의 집적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최근의 일만 보더라도 시장은 복개했던 개천의 복원을 결정할 수 있고, 대통령쯤 되면 아예 도시 하나를 새로 만들 수도 있다. 공간 지배력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권력의 크기와 기하급수적 비례관계를 맺는다.


f1b7794cf33b0885e8ec9c6b721b26db_1698397


<사진 3> 개천을 덮고 그 위로 고가도로를 놓은 것도, 고가도로를 헐고 복개도로마저 뜯어낸 것도 모두 권력이 한 일이다. 개별 도시공간의 변천사는 어떤 의미에서는 특정한 공간에 대한 역대 권력의 변덕스러운 태도 변화를 추적하는 일이다. 물론 거기에는 권력의 배경과 기반, 행사방식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이해하는 것도 포함된다.


주부들은 서너 평짜리 공간을 꾸미면서도 가구의 배치, 벽지나 커텐의 색깔과 재질, 바닥재의 종류 등을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 물론 작은 공간을 꾸미는 데에도 돈이 들어간다. 그런 점에서 장식에 대한 관심도 사회적 층위를 반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중산층 취향’이니 ‘호사가적 관심’으로 몰아붙일 수도 없는 일이다. 아무것도 갖지 못했던 구석기인들도 자기 삶의 공간에 그림을 그려 넣었고, 철없는 어린 아이들도 방 벽면에 예술적 감수성을 표현한다 -. 그는 깔끔하거나 우아하거나 화사하거나 세련되거나 아기자기하거나 클래식하거나 모던하거나 심플한 분위기 중 하나 또는 둘을 선택할 것이고, 그를 통해 자신의 교양과 품성, 덕목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 뿐 아니라, 그 공간에 같이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분위기에 맞추라고 요구한다. 아니 그럴 필요조차 없다. ‘분위기 하나 제대로 못맞춘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이렇듯 뭐라고 딱 집어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사람의 행동과 의식, 곧 삶 자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분위기는 문자 그대로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공간요소들에 대해, ‘안에서’ 주위를 느끼는 감각이다. 그런데 공간적으로 안과 밖의 경계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집 안과 집 밖이 나뉘되, 집 밖은 또 마을 안이고, 마을 밖에 나가도 한 도시 안이 된다. 어느 ‘안’에나 그를 둘러싼 공간 환경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게 마련이다. 물론 내부 공간의 규모가 커질 수록, 그 공간은 다시 여러가지 분위기를 가진 작은 공간적 단위들로 분할된다. 그래서 도시공간은 대체로 다채(多彩)롭다. 오늘날 대다수 서울 사람들은 종로, 신촌, 홍대입구, 청량리, 영등포, 압구정동, 청담동 등이, 혹은 강남구와 강북구, 양천구와 은평구 등이 서로 다른 분위기를 가진 지역이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그 차이를 구체적으로 짚어낸다. 한 번은 학생들에게 장난 삼아 서울 지도 위에 지역이 주는 느낌에 따라 색을 입혀 보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들이 만들어낸 지도의 색상배열은 대체로 비슷했다. 학생들은 서울 공간의 여러 지점들이 젊음, 활기, 음습, 화려, 낙후, 퇴폐 등의 이미지와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고 보았고, 그 지점들의 색상을 파란색, 노랑색, 남색, 주황색, 회색, 분홍색 등으로 나누어 표현했다.


현대의 대도시가 다채롭고 다양하며 다층적이고 다면적이라는 사실을 굳이 부언할 필요는 없을 터이다. 그러나 동시에 대도시에도 ‘중심적 이미지’가 있고 그와 관련하여 인지되는 중심적 분위기가 있다. 사람들은 파리, 런던, 뉴욕, 북경, 도쿄, 로마 등의 세계적 도시들에 대해서 나름대로 단일하거나 단순화된 이미지를 부여한다. 또 그 분위기의 중심에는 대개 그를 주도하는 랜드마크가 자리잡는다. 에펠탑, 빅벤, 자유의여신상, 자금성, 후지산, 바티칸 성당 등. 도시의 특징적 이미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도시적 삶의 특징과도 연결된다. 최근 화제거리가 되어 있는 ‘된장녀’ - 일반적으로는 ‘서울에서 뉴욕 사람 행세하는 젊은 여성’을 말한다 - 나, 오래 전 집중포화를 맞았던 ‘오렌지족’ - 역시 서울을 ‘오렌지카운티’로 착각하고 활보하는 젊은이들을 지칭한 말이다 - 은 글로벌화의 직접적 산물이지만 동시에 도시 서울의 전반적인 분위기에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 한마디로 ‘분위기 파악 못하는’ - 존재들이기도 하다.


c5c3d75165e150b2a106b23c084eb5c0_1698397


<사진 4> 건물 자체가 특정 가로 - 또는 골목 - 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중요 요소이기 때문에 건물의 내부를 지칭하는 interior와 그 밖을 지칭하는 exterior의 구분은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다. 과거 힘 있는 어떤 사람이 대학로의 건물들을 모두 붉은 벽돌조로 하자는 ‘튀는’ 아이디어를 내는 바람에 한동안 그렇게 추진된 바 있는데, 이 역시 건물들을 인테리어 요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아예 간판의 색조, 디자인을 동일 트렌드로 만들려는 시도도 나오고 있다. 어쨌든 오늘날에는 건물 안의 분위기도 그 밖 골목의 분위기와 가급적 연속성을 가져야 하게끔 되었다. 현대 도시는 건물에게조차 ‘분위기를 맞추도록’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사진의 “민들레영토”는 그 분위기의 상품화를 선도한 곳이다. 이 곳에서는 커피나 차를 파는 것이 아니라 ‘문화’로 표상되는 분위기를 판다. 그래서 요금도 ‘문화비’다.


도시내 작은 구역에 대해서든 도시 전체에 대해서든, 또 세부적 이미지든 중심적 이미지든, 도시의 분위기와 이미지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강렬하게 인식하는 ‘공간 요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케빈 린치는 이를 길(path), 중심(node), 구역(district), 접경(edge), 랜드마크(landmark)의 다섯 요소로 정의함으로써 현대 도시계획학의 대가가 되었거니와 이야말로 콜럼버스의 달걀이다. 이 다섯 요소는 도시에 사는 어린 학생들이 자기집 약도를 그릴 때조차 거의 빼먹지 않는 요소들이다 또 한가지, 이 공간요소들은 모두가 인위적 요소들 - 간혹 자연적 경관 요소가 ‘접경’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조차 ‘순수하게’ 자연적이지는 않다 - 이다. 반복하거니와 농촌이 자연경관에 지배되는 공간임에 반해 도시는 인공경관에 지배되는 공간이다.


도시 공간은 인위적으로 배치된 가로와 구조물들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이 공간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시선(視線)과 동선(動線)의 흐름을 제약하고, 그들을 특정한 느낌과 분위기 속에 가두어 놓는다. 도시의 가로와 광장이 동선과 행위, 집합을 통제하는 것이라면, 도시내 건조물은 시선과 상징(Symbol)을 통제한다. 특정 공간에 ‘길을 새로 내거나 어떤 구조물을 새로 짓거나 하는 일은 결국 그 안에 살고 그 안에서 왕래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사고를 지배하는 효과를 낫는다. ’민감한 권력‘은 이 효과를 간과하지 않는다. 누차 강조한 바와 같이 권력은 적극적으로 공간 위에 자신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래서 도시공간은 그 위에서 살아가는 주민과 권력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고, 권력이 주민을 통제하고자 하는 방향을 나타내 준다.


도로는 방향과 너비, 길이를 갖는 공간요소로서 권력의 의지를 담기에는 가장 효과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애당초 한자의 도(道)는 ‘우두머리[首)]가 무리를 거느리고 천천히 행차하는[辵]’,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길이다. 여러 사람들이[각(各)] 편한대로 밟고 다닌 탓에[족(足)] 저절로 만들어진 길인 노(路)와는 그 형성 배경이 다르다. 도(道)는 곧 왕과 제후의 길이다. 도(道)의 방향은 왕권의 행사 방향을 상징하며 - ‘제왕남면(帝王南面)’이라 했으니 제왕은 북좌남면(北座南面)하여 만백성을 굽어 본다. 따라서 북(北)이 상위(上位)가 되고 남(南)이 하위(下位)가 된다. 동양의 중세 도시에서 왕궁 앞 도로는 남북간 도로가 되며 이 도로는 바로 왕과 백성 사이의 상하관계를 표현한다 - , 그 길이는 왕권이 미치는 범위를 상징하고, 그 너비는 왕권의 크기를 - 황제구궤(皇帝九軌)니 제후칠궤(諸候七軌)니 하는 말은 그 자체로 왕권과 도로폭 사이의 관계를 보여 준다 - 상징한다. 동양 중세 도시에서 남북으로 넓고 길게 뻗은 길은 곧 왕의 은덕이 천하 만백성을 ‘널리’ 포용하며 ‘멀리’ 궁벽한 곳까지 미침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db35e040a437a33c94f45d25ed05cd93_1698397
<사진 5> 경복궁 광화문 앞의 육조거리. 이 곳은 지금 기준에서도 도로라기보다는 광장에 가까운 곳이다. 조선시대 서울의 여타 도로와 비교해 본다면 규모의 압도성은 더 두드러진다. 이 거리는 애당초 ‘통행을 위한 길’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과시를 위한 장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예전에 대통령을 지낸 어떤 분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나 그 뒤에나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휘호를 즐겨 썼다. 이는 ‘크고 바른 길에는 거리낄 문이 없다’거나 ‘대도(大道)에 입문(入門)하는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푸는 것이 일단 맞지만, ‘왕화(王化)가 드나드는 데에는 문이 필요 없다’라는 뜻도 되고, ‘제왕무치(帝王無恥)’ - 제왕에게는 부끄러워할 일이 없다, 고로 제왕은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 와 같은 뜻이라 우겨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당장 우리나라에서도 왕조 시대에나 공화정 시대에나 많은 역대 권력자들이 ‘제왕다움’과 ‘후안무치(厚顔無恥)’를 혼동했던 바, 이를 그들의 인품 탓으로만 돌릴 일은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오히려 유교적 - 또는 한국적 - 정치문화 자체가 그들에게 발급해 준 면허 같은 것이었다.


동양의 옛 도시에서 왕궁 전면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뻗은 단방향의 길을 ‘주작대로(朱雀大路)’ - 주지하다시피 주작(朱雀)은 남방을 관장하는 신수(神獸)이다 - 라 불렀다. 이 길이 바로 왕의 길이요, 왕권을 상징하는 길이었다. 조선 개국 후 경복궁 앞에서 혜정교 앞까지 광폭으로 닦아 놓은 도로 - 오늘날의 세종로 - 도 주작대로였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 타 없어진 뒤, 그 앞의 육조거리가 갖는 상징성은 크게 흔들렸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았다. 대원군이 자신이 세운 공을 모두 까먹을 만큼의 타격을 받으면서도 굳이 경복궁을 중건(重建)한 것은 이 상징성을 온전히 되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원군이 애 쓴 보람도 없이, 이 도로의 상징성은 한 세대 후 형태를 바꾸어 다른 장소로 옮아 갔다.


3dd80e068facf369a80581526011140e_1698397


<사진 6> 도성도(都城圖). 1860년대. 19세기 서울 도성의 도로망이 상대적으로 잘 표시된 지도이다. 붉은 선이 도로인데, 동서로 뻗은 종로를 줄기로 하여 남북방향으로 잔가지가 이어지듯 도로망이 형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경복궁 앞과 남대문에서 종로로 이어지는 도로가 ‘국중(國中)의 대로(大路)’, 곧 왕도(王道)였다.


중세 서울에는 육조거리와 종로, 남대문로의 J자형으로 이어진 3대 간선도로를 제외하면 넓은 도로도, 쭉 뻗은 도로도 없었다. 개항 이후 서울 거주 외국인들이 집중적으로 불만을 표시한 것도 바로 이런 도로사정이었다. 그런데 서울의 도로 문제에 대한 비판이 외국인에게서 먼저 나온 것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에 중국 사정에 상대적으로 밝았던 지식인들도 치도론(治道論)이나 용거론(用車論)을 펴면서 도로의 재정비 문제를 제기한 바 있었다. 다만 이 때 그들이 문제로 삼은 것은 도로의 경제성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들의 시야는 보고 듣고 배운 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이 본받고자 한 도시 도로는 같은 철학 위에 구축된 북경의 도로 뿐이었다. 개항 직후 박영효가 치도국(治道局)을 설치하고 도로 개수에 착수하려 했을 때에도, 주로 생각한 것은 도로를 평탄하고 넓게 하여 경제성을 높이는 문제였다. 그러나 박영효, 김옥균 일파의 도로 개수 구상은 그들의 다른 모든 구상과 함께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서울에서 도로 개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