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한 걸음 더] 한국 고대사 온전히 바라보기- 부여‧옥저‧동예‧말갈

BoardLang.text_date 2018.07.27 작성자 이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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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우리 연구회의 창립 30주년을 기념하여 준비하고 있는 <한국사연구의 현장>(가제)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 지난 2017년 9월 회원 여러분께 처음 말씀드리고 원고를 모집하기 시작된 뒤 짧은 집필 기간에도 불구하고 60명 가까이 되는 회원들이 약 70편의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사전 기획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분과별로 12~15편 씩 균형도 잘 맞추어졌습니다. 그 사이에 간행위원회를 구성하여 편집 원칙 등을 정하고 원고에 대한 일차 검토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푸른역사’와 출판 계약을 맺고, 연구회 3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2018년 9월 1일 간행을 목표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재 출판사의 초교를 마치고 필자들께 수정과 보완을 부탁드린 상태입니다.

<한국사연구의 현장>(가제)은 우리 연구회 회원들이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연구 주제를 드러내는 책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연구회의 연구 역량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향후 10년까지 한국사 연구의 방향을 가늠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논문 쓰기에 익숙한 우리 연구자들이 자신의 학문적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발표하는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를 시도함으로써 연구자 간 정보 교류를 촉진하고, 더 나아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의 출간을 통해 연구회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이 우리의 지난 발자취를 회고할 뿐 아니라 앞으로 미래를 전망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익주(한국역사연구회 회장, 중세1분과)








한국사연구의 현장


한국 고대사 온전히 바라보기- 부여‧옥저‧동예‧말갈


 

이승호(고대사분과)


 
명품 조연에게도 주연의 기회를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계는 국민국가 역사의 체계적 서술을 향하여 쉼 없이 달려왔다. 이는 일국사적 시각에 입각한 ‘한국사(국사)’의 체계를 만드는 과정이었고, 그 속에서 한국 고대사는 그 선두에 서야만 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이 옳았든 틀렸든 수많은 열정 어린 연구자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오늘날 우리 학계는 세밀하고 체계적인 한국 고대사상을 도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성공’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현재 학계가 서술하고 있는 한국 고대사상이 그만큼 합리적이라 믿어지며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학계의 성과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보태기를 하고 있는 후배 연구자로서 60여 년에 걸쳐 이룩한 학계의 ‘성공’에 대해 비판적 잣대를 들이밀기는 어렵다. 최근이라기엔 이미 오래된 ‘국민국가 역사 만들기’라는 회의적 시선 혹은 비판에서 필자 또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 지점에서부터 문제의식을 구체화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도 아니다. 여기서는 다만 국민국가의 역사가 체계화되어가는 과정 속에서마저 ‘부족한 사료’라는 멍에를 떠안고 고구려나 백제, 신라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물론 사료에 그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무수히 많은 고대인들도 존재한다. 여기서의 논의가 이름을 남기지 못한 그들의 역사까지 들추어 기억을 만들어내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역사학의 범주 안에서 그러한 작업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유의미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어렵다. 그러나 사료를 통해 그들의 역사적 궤적이 단편적으로나마 확인되는 종족들 가운데서도 끝내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고대인들도 있다. 역사 서술에서 언제나 조연으로 출연하는 고대인들. 이 글의 목적은 그동안 연구자들에게 홀대받았던 종족과 사람들에 대해 다시금 주목을 촉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명품 조연들에게도 한번쯤 주연의 기회를 주자는 것.

 
중심과 주변이라는 이분법적 시선

한국고대사 연구의 공간적 범위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중국 동북3성 지역, 즉 흔히 ‘만주’라고 명명되는 공간을 포함한다. 그동안 역사학계는 고대 한반도와 만주를 중심으로 동북아시아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종족들을 한국 고대사의 연구 대상으로 삼아 왔다. 하지만 연구가 거듭될수록 연구자들의 시선 밖으로 내몰리게 된 고대인들도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등장하는 부여‧옥저‧동예‧읍루 등은 모두 기원 후 3세기 무렵 고대 한반도와 만주를 누볐던 종족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 고대사라는 무대 안에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주변 혹은 변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들이 주목을 받지 못했던 첫 번째 이유로는 역시 사료의 부족을 들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부여‧옥저‧동예‧읍루는 모두 스스로의 역사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그런 탓에 후세인들은 타자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기록한 단편적인 사료를 통해 이들 역사의 흔적을 더듬을 수밖에 없다. 물론 타자에 의해 기록된 역사조차도 풍부하다 말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들을 온전히 주인공으로 한 역사 서술이 쉽지 않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과연 이들을 역사상 조연으로 위치하게끔 강제했던 요인이 오로지 ‘사료의 부족’만이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일단 위에서 거론한 종족들 중에 읍루를 제외한 부여‧옥저‧동예 등을 한데 묶어 개념화하려는 시도가 일찍부터 있었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초창기 한국 고대사 연구에 큰 족적을 남겼던 이병도는 삼국시대 이전 한국 고대사회를 서북행렬 사회와 후방행렬 사회, 남방행렬 사회 등으로 구분한 바 있다. 한국의 고대 문명이 서해안 지대에서 발생, 확산되었다는 전제 아래 고조선‧진번‧진국 등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 위치한 세력이 문화적 중심을 이루고, 부여‧초기 고구려‧동예‧옥저 등은 그 배후 지대에 속한다는 의미에서 이른바 후방행렬 사회로 분류했던 것이다. 여기서 고구려는 논외로 치더라도 부여와 동예, 옥저의 경우엔 관련 기록이 부족하다는 것과 별개로 이미 초기 연구에서부터 문명의 배후 지역으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병도가 부여‧초기 고구려‧동예‧옥저 등을 묶어 후방행렬 사회를 설정한 배경에는 지리적 조건이나 주변 지역과의 문화적 편차뿐만 아니라 이들 사이에 공유되었던 부여 계열의 동질적인 문화양식도 고려되었다. 이러한 시각은 부여‧동예‧옥저를 고구려와 같은 예맥족이 근간을 이루었던 사회로 인식하는 오늘날의 시선과도 상통한다. 이와 같은 경향 속에서 부여‧동예‧옥저의 역사는 고조선의 주변, 또 낙랑군과 현도군 등 중국 군현의 주변, 그리고 고구려의 주변이라는 언제나 타율적인 문법으로 서술되어 왔다. 물론 그 서술의 마지막은 하나같이 발전 일로에 있던 고구려에 복속, 통합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부여‧동예‧옥저에 대해 고조선에서 낙랑군, 고구려로 이어지는 중심 문화의 종속 요인으로 바라보았던 그간의 시선은 당연 이들만의 문화적 독자성이나 고유성에 관심을 기울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예맥 사회를 덮어버린 이름, 고구려

특히 고구려가 고대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해가는 3세기 이후부터는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게 된다. 이 시기에 들어 급속하게 세력을 팽창해 나가기 시작한 고구려는 차츰 예맥족의 중심 국가로 부상하였고, 자연 연구자들의 관심도 그런 고구려의 역사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부여‧동예‧옥저는 더더욱 역사 무대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만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보자. 아이러니하게도 연구자들에 의해 고구려의 역사상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갈수록 한때는 고구려와 병존했던 한반도 및 만주 일대의 여러 종족들은 역사적인 주체성을 상실하거나 역사상에서 타자화 되었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읍루나 말갈이 한국고대사에서 타자화된 대표적 사례라면, 부여나 옥저, 동예는 그 역사적 주체성을 상실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특히 옥저나 동예는 고구려사 중심의 연구 흐름 속에서 그 정체성을 상실한 채 고구려 발전 과정의 필요조건으로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옥저‧동예와 관련한 문헌 기록으로 유일무이하다 할 수 있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3세기 무렵 이들이 이미 고구려에 복속되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같은 사료를 통해 당시 옥저인과 예인이 고구려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그들 나름의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옥저와 동예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거꾸로 고구려가 어떤 방식으로 이 지역을 지배해나갔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그 결과 옥저나 동예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 형태가 이른바 ‘공납적 지배’를 통해 관철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그러한 지배 방식이 고구려사의 전개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등의 문제에 관심이 모였다.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격동으로 치닫던 3세기 중엽, 조위에게 항복하고 직접 그 수도에 찾아가 조공하고 책봉을 받았던 불내예왕不耐穢王(예의 왕이라면 ‘불내 예왕’이라 하는 편이 적절할 듯)의 경우만 떠올려 보아도, 이 시기 옥저나 예인의 국제 정세 인식과 외교적 대응에는 상당히 독자적인 면모가 관찰된다. 물론 이러한 대외활동 이면에는 분명 그들 나름의 주체적 고민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목에 관심을 주는 연구자는 그리 많지 않다.

 

한편 부여의 경우는 옥저나 동예와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우선 고구려 계통의 사료에서 부여인의 흔적을 일부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부여는 옥저나 동예보다 사료적 여건이 나은 편이었다. 또 일찍부터 부여는 예맥족의 조종적祖宗的 위치에 있었던 나라로 평가받았으며, 초기 고구려사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부여사에 대한 이해도 요구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부여사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은 옥저나 동예의 그것보다 컸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한국 고대사에서 부여사 서술은 주로 고구려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온전히 부여를 주인공으로 하는 체계적인 역사 서술이 있었다고 평하기는 어렵다. 흔히 부여는 고구려 건국 세력의 발원지로서 혹은 고구려 성장 과정에서의 극복 대상으로서 서술되었고, 종국에는 고구려가 종주국 부여를 밀어내고 예맥족을 통합하는 과정을 설명하여 고구려 발전을 증명하는 하나의 근거로 소비되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처럼 부여와 옥저, 동예는 고구려의 팽창 과정에서 복속된 세력으로, 그리고 고구려의 ‘발전’을 증명하는 피지배 종족으로 서술되어 왔다. 특히 4~5세기 무렵부터 나타나는 고구려의 독자적 천하관(고구려적 천하)에 대한 검토 과정에서 이러한 이해 방식은 더욱 구체화되어, 이들은 고구려의 천하 속에 새로이 편입된 백성으로서 혹은 부용附庸 세력으로서의 위치를 부여받게 된다. 즉 고구려의 침략을 받고 복속된 이들은 예맥족 통합 국가로 발돋움한 고구려의 ‘발전’을 증명하는 피지배 종족으로 묘사되곤 하였다. 고구려사가 진화론적이고 선형적인 서사 구조 속에서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갈수록 분명 고구려와 달랐을 이들의 정체성은 희석되거나 말살되었다.

 

결국 동북아시아라는 무대 위에서 그들 나름의 역사를 일구었던 이들은 고구려라는 거대한 이름에 덮여 천천히 사라져 갔다. ‘삼국시대를 향한 통합의 과정’이라는 역사 서술 안에서 그들은 고구려라는 주연에 가려진 채 조연으로만 남게 되었고, 한국사의 전개라는 거대한 서술 구조 안에서 끝내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부여‧동예‧옥저 등이 한국사의 주변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고구려사 중심의 편향된 시선과 이를 바탕으로 한 폭력적인 역사 서술 방식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한국사라는 강박의 틀 주변을 맴도는 타자他者

동북아시아 역사상 존재했던 많은 종족들 가운데 한국 고대사 연구 과정에서 타자화 되었던 가장 대표적인 종족은 숙신-읍루-말갈-여진으로 이어지는 고대인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을 과연 역사적 계승관계로 이어진 하나의 종족 계통으로 파악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여기서 이 문제는 일단 제쳐두기로 하고 서술의 편의상 말갈이라는 이름에 대표성을 두기로 한다. 한반도와 더불어 한국고대사가 전개되었다고 믿어지는 만주라는 공간에서 활동한 말갈은 앞서의 부여나 옥저, 동예와는 또 다른 이유에서 역사 무대의 주변으로 내몰렸다.

 

우선 말갈은 부여나 옥저, 동예와 달리 한국 고대사의 연구 범위 밖에 자리한다. 지금까지 말갈족의 역사가 한국 고대사에 귀속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한민족’과 혈연적으로 관련이 없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상당히 격절된 북만주 일대에 존재했던 부여의 역사가 당연히 한국 고대사로 편입될 수 있었던 이유는 부여가 예맥족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부여는 일찍부터 예맥족의 조종적 위치에 있었다고 평가되었으며, 여기에 더해 고구려 건국 세력이 부여로부터 남하하였다는 고사나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에서도 보이는 부여 계승의식의 존재는 부여의 역사를 한국 고대사에서 떼어낼 수 없게 하는 연결고리로 작용하였다.

 

사실 부여뿐만 아니라 옥저와 동예의 경우도 모두 고구려와 같은 예맥족이 근간을 이루었던 정치체였다고 믿어졌고, 이를 아우르는 예맥족은 ‘한민족’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인정되어 왔다. 그리고 오늘날 역사학계에 의해 정립된 한국 고대사상에서는 이처럼 여러 갈래로 분지한 예맥족 사회가 고구려의 발전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다시 통합하게 되었다는 민족사적 서술로 귀결된다. 즉 ‘한민족’을 이루는 중요한 구성원 중 하나인 예맥족이 최종적으로 고구려에 의해 다시 재통합되었다는 서사구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정립된 한국 고대사상 안에서 예맥족은 ‘한민족’을 이루는 중요한 구성원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상의 확립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주변으로 밀려나며 타자화된 종족이 말갈이다. 부여나 고구려처럼 예맥족으로 분류될 수 없었던 말갈은 ‘한국사’라는 강박의 틀 밖으로 밀려나 끊임없이 주변을 맴돌았던 종족이다. 그렇다고 한국 고대사 연구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전연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고구려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그 세력권 내에 위치한 종족 혹은 부용 세력 정도로 치부되는 것이 한국고대사 속에서 말갈이 맡은 배역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말갈 내부의 사회적 진전이나 정치적 독자성에 관심을 주는 연구는 많지 않았다. 요컨대 말갈은 한국 고대사와 깊은 관계성을 맺으면서도 한국 고대사상의 정립 과정에서 주변화‧타자화 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필자의 문제제기가 읍루 혹은 말갈의 역사를 한국 고대사의 서술 체계로 편입할 것을 주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서는 다만 한국 고대사의 서술 과정에서 언제나 타자로 분리되었으면서도 필요와 욕망에 따라 한국 고대사상의 정립 과정에서 소비된, 특히 강대한 고구려를 수식하는 데에 이용되었던 말갈의 역사 또한 그 자체로 온전히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주변이 된 역사 온전히 바라보기

한국 고대사상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갈수록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나름의 역사를 일구었던 여러 종족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주체성을 상실하고 주변을 내몰렸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한국 고대사의 서술 구조 속에서 ‘주변’으로 내몰린 고대인의 역사를 온전히 바라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주변으로 밀려난 종족들의 역사를 온전히 바라보기 어렵게 만들었던 첫 번째 시선, 중심과 주변이라는 이분법적 시선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리고 한국 고대사가 그와 같은 굴절된 시선 속에서 서술되어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부여‧옥저‧동예‧말갈의 역사가 고구려라는 ‘중심’ 역사의 발전에 종속적 요인으로 묘사되곤 하지 않았던가. 종국적으로 ‘한국사’라는 강박의 틀에서 한 걸음 벗어나 고대 동북아시아를 누볐던 수많은 종족들에 대한 개별 역사를 하나하나 구체화해나갈 때, 비로소 ‘주변’이 된 이들에게 온전한 그들의 역사를 찾아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보다 선명한 한국 고대사상의 정립을 위한 새로운 모색도 가능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