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史호선] 정동 답사기

BoardLang.text_date 2018.02.17 작성자 정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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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史호선 정동답사기


 

정종원(근대사분과)


 




 

 

2017년 4월 중순. 한역연 근대사분과의 이름으로 단체이메일이 날아왔다. 노원청소년수련관에서 주관하여 만든 ‘지하철 史호선’이라는 프로그램의 강사를 모집하는 이메일이었다.

 

강사는 강의와 답사를 진행해야 했는데, 그중 한 주제가 대한제국을 다루는 것이었다. 나는 개화기를 다루는 전공자로서 내가 전공하는 시기에 대한 역사적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강사료도 받고, 이야기할 공간도 준다는 것에 마음이 끌렸다. 게다가 정동지역을 답사하면서 대한제국시기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인 이전에도 해봤던 일이라서 크게 부담스럽다고 느끼지도 않았다.

 

다만 약간 걱정되었던 것은 강의와 캠페인이었다. 해당 프로그램에 따르면 강사가 강의와 답사를 진행하고, 강의와 답사에서 배운 내용으로 청소년들이 직접 캠페인을 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한번도 강의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강의에 대해 약간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게다가 청소년이 직접 하는 캠페인이라는 것은 굉장히 낯설었다. 그렇지만 걱정만 하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걱정을 접고 강사를 해보겠다고 자원했다. 지나고나서 생각해보면 옳은 결정이었다.

 

답사강연을 하는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회의하여 일정과 프로그램을 결정하였다. 내가 맡은 대한제국시기를 살피는 정동답사가 첫 번째 답사로 선정되었다. 나는 1번타자라는 부담감과 흥분을 동시에 가진채 답사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답사에서 1번타자였기에 답사후기도 1번타자가 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답사의 코스는 배재학당- 구 러시아 공사관 - 중명전 - 덕수궁 (함녕전, 정관헌, 석어당과 즉조당- 석조전- 중화전)-서울광장으로 짰다. 이를 통해 대한제국시기에 있었던 민권운동, 외세의 활동,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 국권상실의 아픔 등을 설명하고, 마지막의 서울광장을 통해 대한제국과 현재를 연결시켜 학생들이 이 시기의 역사를 느끼게 되기를 원했다.

 

 

5월 27일 토요일 아침 10시. 마침내 지하철 史호선의 첫 번째 답사인 정동답사가 시작되었다. 답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서울역에 있는 회의실에서 먼저 오리엔테이션과 강의를 시작하였다. 노원청소년수련관의 청소년 지도사님들의 안전교육과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다음에 한 시간 정도 학생들에게 대한제국기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강의 덕분에 학생들이 답사지가 어떤 점에서 의미가 있는지의 맥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낮 12시즈음에 강의를 끝내고 서울역에서 시청역으로 이동했다. 이어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가서 학생들에게 배재학당이 개화기시기에 가졌던 역사적 의의를 설명해주었다. 역사관 자체는 개화기의 건물은 아니었지만, 내부에 개화기 시기의 배재학당에 대한 설명도 잘 되어있어서 설명이 수월하였다. 특히 주시경, 이승만 등 교과서에서 보았던 인물들이 배재학당에서 공부하였었다고 하니 학생들이 신기해하며 주목하는 분위기였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을 나온 후 점심식사를 한 학생들과 함께 약간 등산하는 기분으로 구러시아공사관으로 향했다. 정동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있는 구러시아공사관은 지금은 종탑만이 남아있지만, 과거에는 풍채가 당당한 건물로서 ‘요새’같다는 평을 들었던 건물이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당시의 위풍당당한 건물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아관파천에 대해 설명했다. 학생들도 아관파천은 아는 친구들이 많아서 설명이 꽤 수월했다.

 

사실 구러시아공사관은 아관파천이외에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건물이었다. 아관파천 이후에도 계속 러시아공사관으로 남아있었으며, 러일전쟁 이전까지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했던 대한제국의 정치에서 중요한 장소로 남아있었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러시아 영사관으로 격하되었지만, 여전히 러시아의 외교관이 상주하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이후에는 한동안 비어있었지만, 1920년대에 소련과 일본이 수교한 이후에는 소련 영사관이 되어서 사회주의를 열망하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소련의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엄혹한 일제시대에도 조선지식인은 소련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를 이곳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이 건물도 무너지고, 러시아의 역할도 한동안 종적을 감추었지만, 러시아는 지금도 무시할 수 없는 한반도 주변의 열강이자 이해당사국이다. 건물은 없어질 수 있지만, 대한제국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지정학적 환경은 여전히 현실의 실재로서 존재하고 있다.

 

다음 장소였던 중명전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장소이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2010년에 복원, 개방되었다. 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던 중명전의 회의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 한국을 40여년간 옭아맸던 일본제국의 쇠사슬이 내 몸을 칭칭감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소름이 끼쳤었다. 이제는 여러 번 가본 장소여서 그런 느낌은 덜하지만, 아직도 중명전의 회의실에 들어설때마다 서늘한 감각을 느끼곤 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을사조약’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것을 학생들이 중명전에서 감각적으로도 느끼길 바랐다. 그러나 아쉽게도 중명전은 당시에는 전시물 변화를 위한 공사중이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8월에 재방문 했을 때에는 다시 개방되어 들어갈 수 있었다. 중명전의 회의실 공간에는 ‘을사조약’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인형들과 동영상이 방영되고 있었다. 동영상은 내용이 충실하고 좋은 편이어서 ‘을사조약’을 잘 모르는 일반 관람객에게는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용을 이미 알고오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조용하게 ‘을사조약’의 의미를 되새기는데는 약간 방해가 되는 면도 있다.)

 

결국 중명전 앞의 도로에서 짤막하게 ‘을사조약’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을사조약’의 중요성에 대해 알고 있는 학생들이 많아서 꽤 숙연하게 내 설명에 귀를 기울여주었던 것 같다. ‘을사조약’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뒤를 돌아보니 미국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과거 미국 공사관이 있던 자리이며, 지금은 주한미국대사의 관저로 활용되는 공간이다. 고종 이하 개화파관료들이 정의의 나라라고 그토록 기대했던 미국 공사관의 바로 코앞에서 나라를 빼앗겼던 것이다.

 

덕수궁에서는 함녕전, 정관헌, 석어당과 즉조당, 석조전, 중화전 등 다양한 전각들을 중심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설명하면서 특히 중화전을 주목하도록 하였다. 중화전은 덕수궁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개조하면서 황궁의 중심건물로 설계된 건물이다. 원래는 경복궁의 근정전과 같이 2층건물로 설계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준공되었다. 그러나 제대로 사용해보기도 전에 1904년의 대화재때 불탔고, 이후 다시 만들어질때는 지금처럼 단층건물이 되어 그 위용이 예전과 같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중화전을 감싸던 행랑이 거의 모두 없어져버렸기에 황궁으로 설계할 당시의 구상은 찾기 어렵게 되었다. 행랑이 없는 전(殿)은 마치 부하병사들을 모두 잃은 채 덩그러니 남은 장군처럼 쓸쓸한 인상을 남길 뿐이다. 대한제국 시대에 국가예산의 많은 부분을 들여 공들여 지은 건물들이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물론 가장 큰 원인은 침략의 원흉이자, 전각들을 파괴하여 공원화 한 일본에 있다. 그러나 여러 세력과 힘을 합해 근대국민국가를 건설하기보다 대한국국제에서 보듯이 독재권력을 더욱 강화했던 고종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덕수궁에서 나와 서울광장으로 향하는데 무척이나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탄핵당한 박근혜 전대통령을 석방하라는 시위가 대한문 앞에서 열리고 있었다. 그 소란스러운 21세기의 왕당파들을 뒤로한 채 우리 답사단은 서울광장에 들어섰다.

 

서울광장은 본래 덕수궁과 원구단 사이의 공간으로서 대한제국의 현실권력(황궁)과 이념권력(하늘)이 모이는 매우 정치적이면서도 신성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이 상징적 공간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다. 광장 바로 옆까지 붙어있던 덕수궁의 전각들과 대한문은 새로운 도로를 내면서 잘려나가거나 위치가 이전되었다. 원구단은 그 원형을 되찾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광장은 당시로서는 큰 규모의 건물인 경성부청 건물로 내리눌러졌다. 권력의 의지는 서울광장의 모습을 형성, 변화시키면서 자신들의 의지를 투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공간에 나타난 그 권력의 의지는 시민들에 의해 재구성되었다. 시민들은 1897년 6월항쟁의 종지부를 찍었던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이곳에 모여들었고, 이후 이곳은 민주화운동의 성지가 되었다. 2002년이후 일어난 각종 촛불시위들의 주무대가 이곳이었고,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이어진 촛불혁명의 주요 무대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다. 권력이 공간을 설계하지만, 그 공간의 의미를 전유할 수 없다는 것. 결국 시민들의 의지가 권력을 뚫고 나와 자유와 평등의 문을 열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서울광장이다.

 

그리하여 이 서울광장에서 정동답사의 마지막 설명을 마무리 했다. 나는 이곳에서 정동답사 강연에서 내가 내세웠던 주제를 다시 한번 학생들에게 상기시켰다. ‘함께 만들지 못한 나라 그리고 함께 만들어갈 나라’.

 

함께 나라를 만들지 못했던 100년전을 반성하고, 함께 나라를 만들어온 지난 100년을 보여주려 했던 답사는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추신: 답사 이후 한 주가 지나고 학생들이 배운 내용을 가지고 스스로 판넬을 작성하여 캠페인을 벌였다. 캠페인에 나온 학생들의 판넬에서는 중명전과 서울광장을 주로 다루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가장 인상깊게 다가간 곳은 그 두 곳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