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두(天然痘), 구중궁궐이라도 마마를 피할 수 없네

BoardLang.text_date 2017.04.13 작성자 김동진
페이스북으로 공유 트위터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김동진(중세2분과)



6. 천연두(天然痘), 구중궁궐이라도 마마를 피할 수 없네


 

소와 함께 사람에게 온 또 하나의 질병이 천연두였고, 모든 사람의 삶은 천연두를 앓기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천연두는 평생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고, 치명적이었으며, 살아난다 해도 박색이 되었다. 또한 천연두에 걸린 이들은 시력을 상실하는 등 신체적 불구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곰보가 된 추한 모습을 피하기 어려웠다. 1) 바이러스(smallpox virus)에 의해 발병하는 천연두는 천연두, 손님, 마마, 포창(疱瘡), 호역(戶疫)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러한 천연두의 진행 과정을 윤기(尹愭, 1741~1826)는 그의 시 2) 에서

 

두역은 뱃속에 있는 열로 생기나니 :: 痘疫元從熱在腔
인생에서 한 번은 반드시 겪는 것 :: 人生一度必相撞
사흘 사흘 헤아려 열흘 닷새 되면 :: 三三日數排旬五
낱알 같은 반점들 쌍쌍이 뭉쳐지네 :: 箇箇顆斑有疊雙


라고 노래하였다.

 

 

Monkeypox7cfcab6eb7b4ed034e14482eb4e9c24f_1698396

[그림1] 천연두에 걸린 아이의 손(왼쪽, https://goo.gl/6wlGSf)


초상화에 담긴 천연두 흔적(오른쪽, 배한철, https://goo.gl/4L4GnG)


 

누구나 겪어야 하고, 치명적이기에 천연두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마비시키곤 하였다. 이현일(李玄逸, 1627~1704)에 따르면 향시에 두 차례 합격하고 서울에서 치러지는 대과에 응시하기 위해 조령에 왔던 한 인물은 도성에 천연두가 유행한다는 말이 거리낌 없이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천연두가 유행할 때에는 모든 문상(問喪)과 호상(護喪)에 참여할 수 없었고, 4) 은인의 죽음에도 “두창이 두려워 굳게 칩거하니 :: 畏痘牢蟄”라고 노래할 뿐이었다. 5)

 

나라에서도 천연두가 만연하면 사역을 중단케 하였고, 6)  천연두가 만연한다는 이유로 대군(大君)을 북경으로 보내라는 청 나라 칙사의 요구도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7) 임금이 앓은 적이 없는 데 천연두가 유행하면 중요한 정사도 중단되었다. 8) 관원들도 임지의 관사에서 천연두로 죽었다. 9)

 

천연두는 언제부터 유행하게 되었을까? 소에서 유래하여 사람에게 전염된 천연두는 소의 가축화의 역사와 함께 하는 것이었으며, 사람들의 왕래와 소 사육이 늘어나면서 찬연두 발생도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 발생한 천연두는 중국으로부터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중국의 의서 『의학입문』을 인용하여 천연두가 발생한 것이 주 나라(아마도 춘추시대) 말~진나라 초에 처음 발생한 것으로 보았고, 중국에서 한반도로 유입되었다고 하였다.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성호사설』이나 10) 18세기 후반 연행기인 『연행기사(燕行記事)』에 따르면 청의 만주족들은 대체로 천연두에 걸리는 이들이 많지 않다고 하였다. 11) 당시 이익이나 이신경은 바이러스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에 이를 일종의 귀신으로 묘사하고, 소금 등 특이한 요인을 천연두 발병의 원인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만주족의 역사를 살필 때 입관 전까지 중원 지역에서 군사활동을 통해 명의 북부 지역에 천연두를 심각할 정도로 만연시켰고, 청의 군대나 만주족의 진영에서 천연두가 종종 발생한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18세기 중후반 두 인물이 청에서 천연두가 흔치 않았다는 사실은 파악했으나 그 원인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청에서 황위 계승에서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을 기준으로 하거나, 인두법 등이 시행되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청의 소와 말, 돼지 등 많은 종류의 가축을 오랫동안 사육하며 살아왔기에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천연두에 대해 상대적으로 강한 내성을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벼농사와 밭농사 등 작물 농업이 경제활동의 중심이었던 조선에서 사육하는 가축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고, 이는 15~16세기에 천연두 발생이 특정 지역에 국한된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소와 인구의 밀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17세기 이후 천연두의 발병도 크게 늘어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기록에서 『삼국사기』에는 신라 선덕왕과 문성왕이 천연두를 앓았던 기록이 있고,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서는 ‘소아 완두창(豌豆瘡)’의 치료방이 있다. 12) 이는 16세기 이전에 천연두가 널리 만연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17세기 초 허준(許浚)에 의해 『두창집요(痘瘡集要)』라는 전문적인 천연두에 대한 의서가 편찬되고, 숙종∼영조시대에는 국왕의 건강을 돌보는 내의원에 천연두[痘科]의 치료를 전담하는 전문의원이 배치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천연두의 발생이 국왕이 사는 구중궁궐에 이르렀고, 일상화된 결과였다.

 

연대기 기록인 ‘실록’과 ‘일기’에도 천연두에 대한 기록의 빈도가 병자호란 전후, 경신대기근 시기를 거치며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후 18세기는 천연두에 대한 기록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noname01noname02

[그림2] 조선시대 천연두[痘疫] 기록 추이


 

연대기 기록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도 17~18세기에 천연두의 만연으로 인한 피해가 대규모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전염병 발생의 원인은 “풍기(風氣)가 순조롭지 않고 기온이 절기에 어긋났다.” 13) 라거나, “날씨가 따뜻해지자” 전염병이 더욱 창궐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종 5년(1664)에는 “두역(痘疫)이 매우 성해 집집마다 경계하고 있다.” 15) 고 하거나, “두역(痘疫)과 전염병이 다시 더욱 창궐하여 여염 사이에 두루 퍼져 있다.” 16) 라고 하였다.

 

17~18세기에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그 수가 엄청난 것이었는데, 이에 천연두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천연두로 인한 사망자의 수가 보고된 예를 보면 현종 10년(1669)에 함경도에서 9백여 명이었고, 숙종 19년에는 제주에서 1,950명이었다. 17)

 

누구에게나 일상적으로 다녀가는 ‘손님’으로 여겨졌던 천연두이기에 이로 인한 죽음은 헤아리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따라서 천연두를 앓고 살아난 것은 집안의 경사였고, 많은 이들의 축하가 이어졌다. 이런 까닭에 17세기 초에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이 “자네의 여러 손자들이 두역(痘疫)을 잘 치렀다 하니 매우 반갑소.” 18) 라는 안부를 전했던 것이다.

 

왕실의 일원이 천연두를 앓고 살아나면 나라의 큰 경사였다. 숙종 5년(1679) 청의 황태자가 천연두에서 앓고 회복하였다는 사실을 알리자 조선은 이간(李偘)과 오두인(吳斗寅)을 축하 사절로 보냈다. 19) 숙종 10년(1684) 왕이 천연두에서 회복하자 이 ‘경사’를 종묘(宗廟)에 고하고, 연이은 증광시를 시행할 수 없게 되자 인정전에서 정시(庭試)를 시행하였다. 20)

 

천연두를 앓는 왕실을 치료한 내의들은 출세가 보장되었고, 그 후손들에게도 은전이 이어졌다. 선조의 딸을 치료한 공로로 허준은 당상관에 올랐고, 21) 광해군의 아들을 치료한 조흥남(趙興男)은 숙마(熟馬) 1 필을 하사받았다. 22)

 

의관(醫官) 유상(柳瑺)은 왕실의 천연두 치료에 공을 세워 가문을 우뚝 세울 수 있었다. 숙종에 이어 세자까지 치료하는 공을 세운 후 두 품계를 초수(超授)받고, 즉시 지중추(知中樞)의 실직(實職)이 주어졌다. 23) 연령군(延齡君)의 두환(痘患)을 치료한 후에는 가자(加資)되었고, 얼마 후에 수령(守令)에 제수하였다. 24) 유상(柳鏛)의 공로는 손자(孫子)에게도 미쳤다. 25)

 




 

1) 『光海君日記』(중초본) 卷8, 光海君 卽位年 9月 甲午.
2) 『無名子集』 詩攷 1冊, 詩.
3) 『葛庵集』 卷26, 行狀, 誠齋洪公行狀.
4) 『葛庵集』 續集 卷, 書.
5) 『葛庵集』 附錄 卷5, 又柳後章.
6) 『世宗實錄』 卷63, 世宗 16年 1月 丁酉.
7) 『承政院日記』 5冊 仁祖 27年 2月 甲午.
8) 『肅宗實錄』 卷10, 肅宗 6年 9月 癸亥.
9) 『明齋遺稿』 卷38, 墓碣銘, 公山縣監鄭公墓碣銘.
10) 『星湖僿說』 卷6, 萬物門, 疫鬼.
11) 『燕行記事』, 聞見雜記, 雜記, 聞見雜記下.
12) 『鄕藥救急方』 下, 小兒雜方.
13) 『顯宗改修實錄』 卷10, 顯宗 5年 3月 癸亥.
14) 『顯宗改修實錄』 卷10, 顯宗 5年 3月 丁卯.
15) 『顯宗改修實錄』 卷10, 顯宗 5年 3月 癸亥.
16) 『顯宗改修實錄』 卷10, 顯宗 5年 3月 丁卯.
17) 『肅宗實錄』 卷25, 肅宗 19年 8月 庚辰.
18) 『旅軒集』 續集 卷2, 書, 與張泰來.
19) 『肅宗實錄』 卷8, 肅宗 5年 7月 壬子.
20) 『肅宗實錄』 卷15, 肅宗 10年 9月 己丑.
21) 『宣祖實錄』 卷25, 宣祖 24年 1月 辛丑.
22) 『光海君日記』(중초본) 卷26, 光海君 2年 3月 辛巳.
23) 『肅宗實錄』 卷33, 肅宗 25年 1月 丙申.
24) 『肅宗實錄』 卷50, 肅宗 37年 11月 丁未.
25) 『英祖實錄』 卷116, 英祖 47年 4月 庚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