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개간 : 천방과 화전 ①

BoardLang.text_date 2015.04.29 작성자 김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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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중세사2분과)




천방과 화전 개발은 한국사의 전개에서 조선 성립 이전과 이후 삶의 방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일직이 지구생명체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가이아(Gaia)를 주장한 20세기 후반 영국의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은 생태환경의 변화를 야기하는 요인에 대해 이전의 연구자들과 다른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러브록은 이전의 대다수 연구자들이 환경파괴의 주범이라고 주목하던 각종 화학 물질이나 공장, 폭탄, 자동차, 컴퓨터,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하였다. 그리고선 오히려 농부와 목장주, 쟁기와 동력 쇠사슬 톱이 가이아라는 지구생명체를 위협하는 진정한 요인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15∼19세기 한반도에서 진행된 생태환경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이러한 주장은 가장 적절해 보인다.


  천방과 화전 개발은 조선의 생태환경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충분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천방은 냇가를 막아 관개함으로써 하천에 연한 저습지와 무너미(범람원, flood plain)를 논으로 바꾸었고, 화전은 산록에 위치한 숲에 불을 지르는 방법으로 광범위한 땅을 새로운 경작지로 개간하는 수단이 되었다.


  습지와 무너미, 완만한 산록의 숲은 오랫 동안 야생동식물이 번영을 누리던 영역이었다. ‘산림천택(山林川澤)’ 혹은 ‘산림수택(山林藪澤)’이라 불리던 이곳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왕실과 국가가 독점적으로 사용하던 공간에서 대다수 민인들이 새로운 삶의 토대를 마련하는 공간으로 전환되었다. ‘산림천택의 이익을 백성들과 함께 누린다[山林川澤與民共之]’는 새로운 국가 운영의 이념으로 채택한 결과였다.


  야생의 공간은 삶의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은 “개와 닭이 서로 호응하여 우짖고[鷄狗之聲相應]”, “사람과 밥 짓는 연기를 서로 바라보는[人煙相望]” 이전과 다른 경관에 놓여졌다. 인간중심의 세계가 번창하는 동안, 한반도에서 오랫 동안 번성을 누리던 야생의 세계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 고려 이전의 경작지 위치와 규모


  누군가, 얼마간의 땅을 개간하여 만들어지기 시작한 경작지는 오늘날 사람들의 주변을 둘러싼 가장 특징적 경관이다.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로 확인되는 한반도 최초의 농경 유적은 오창의 소로리에서 발견된 바 있다.


  아직도 논란 중이 이곳에서는 1990년대에 발굴된 유적은 벼를 재배하였고, 그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3,000∼15,000년 전으로 추정하는 증거들을 발견해냈다. 한반도에서 농경이 신석기 시대가 본격화하기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고, 특히 벼농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놀랍고,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다.


  논란의 여지없이 한반도에서 농업경제가 본격화한 것으로 보는 시기는 청동기 시대로, 충남 북부인 천안-아산 일대와 경남의 진주 남강 일원에서 많은 농경유적이 남아 있다. 이후 한반도의 농경 유적은 기원전 9∼8세기를 기점으로 이들 두 지역에서 급속히 줄어드는 가운데 송국리 유적이 있는 금강 중하류에 다시 집결하고, 동시에 영호남 여러 지역에서 새로운 유적이 대거 만들어졌다. 이들 유적에서는 공통적으로 송국리 유적과 마찬가지로 주로 벼농사를 지었다. 청동기 시대의 사람들은 샘이나 간단한 시설로 흐르는 물을 이용할 수 있는 곳에 논을 만들고, 인접한 구릉 지대에 밭을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청동기 시대가 끝나갈 무렵인 기원전 300년 경 중국에서 도입된 철기는 농업개발을 가속화하였다. 기원전 100년 무렵부터 한반도는 철기를 자체 제작하는 것을 넘어 수출까지 할 정도로 그 생산량이 많아졌다. 그 결과 한반도의 농경지는 더 넓어졌고,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면서 한반도 곳곳에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농업개발과 농지개간을 주도한 세력이 고대국가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농지개간에 가속도가 붙고 있었던 고대사회 역시 촌락과 촌락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촌락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백성들은 정복전쟁에 대비하고, 빈번하게 출몰하는 야생동물을 제어하기 위해 일정한 방어와 사냥의 시설을 마련하고 있었다. 아직 한반도의 광대한 야생의 공간에 비해 인구는 불충분했고, 농경지로 개간할 땅은 많았다.


  이른바 ‘촌락문서’로 알려진 고대 문서를 통해 고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이용하는 가용공간의 구체적 면모를 살필 수 있다. 당시의 도량형에 대한 연구성과를 고려하여 분석하면 촌락문서에 나타난 4개 촌락의 촌역 중에서 농경지 면적은 4.1%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된다.


  촌역 중 경작지는 개략 2∼7% 가량이었고, 농경지의 비율이 낮은 신생촌은 3년 동안 농지개간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5소경의 하나인 서원경 인근의 정황이 이러했으므로, 당시 한반도 전체를 놓고 본다면 농경지는 4%보다 낮은 수준이었을 것이다. 서원경의 모촌을 오늘날 청주시 초정약수터 일원으로 비정한 이인철의 견해를 존중한다면, 모촌은 서원경과 마찬가지로 큰 산자락 끝에 놓인 분지성 평지에서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모촌과 비슷한 곳에서 발달한 취락의 모습은 신라 하대로부터 후삼국에 이르는 시기에 각 지방에서는 성장한 호족들의 중심지에서도 드러난다. 상주의 아자개나, 벽진 장군 이총언과 같은 이들이 성을 쌓은 곳은 큰 산이었고, 그 아래 펼쳐진 넓은 들에서 농경지를 일구었다. 큰 산과 평지가 이어지는 그곳에서 일상적으로 출몰하던 호랑이와 같은 맹수가 그들의 삶 속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전의 이씨의 시조가 되는 고려 개국공신 이도가 살던 ‘전의(全義)’ 역시 차령 산맥 바로 아래 넓게 펼쳐진 땅이었다. 흥미롭게도 전의 이씨 시조의 마을에도 호랑이와 호랑이 먹이의 전설이 전하고, 이는 경부선 철도의 개설 당시 커다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곳은 이인철이 신라 촌락문서에서 사해점촌으로 추정한 바 있다.


  당시 신흥세력으로 성장한 호족들은 고대사회 이래 개발이 집중되었지만, 아직 많이 남아 있던 큰 산 아래 펼쳐진 비교적 넓은 들을 개간하였다. 경주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이러한 땅에서 새로운 경제적 기반을 확충한 호족은 통일신라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주인공이 되었다.






 [그림1]  신라 촌락문서에 나타난 가용공간과 경관 참고문헌 : 김기섭, 「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村’의 입지와 개간」, 『역사와경계』 42, 2002; 이인철, 『신라촌락사회사연구』, 일지사, 1996.


 


▶ 고려 시기의 경작지와 농업경관


  고대 사회 이래의 경작지와 주거지의 입지 특성은 고려 시기에도 크게 변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송에서 고려를 찾았던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잘 나타나 있다. 서긍은 고려시대 경작지의 전형적인 모습을 산골짜기에 놓여진 ‘사다리 모양의 논과 밭[田]’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고려시기에도 마을과 마을 사이에는 숲과 늪이 펼쳐져 있었고, 그곳은 야생의 공간이었다. 대부분의 마을은 큰 산자락 아래 자리잡고 있었으며, 마치 서부 개척기의 미국의 모습처럼 숲과 야생동물에 의해 고립되어 있었다. 산비탈을 개간한 곳에서 농사를 지었고, 때로는 돌을 쌓아 다락 밭을 만들기도 하였다. 마을에 인접한 샘이나 계곡의 작은 시냇물은 벼농사에 이용되었고, 저수지를 만들어 산 자락 아래 펼쳐진 논에 물을 대거나, 섬 둘레에 둑을 쌓아 만든 개 바닥의 논에서는 벼농사를 지었다.


  이와 달리 넓은 들판이 농경지로 본격적으로 이용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호남평야와 같은 지역이 산자락에서 출발하여 바다를 향해 점점 개간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비하면 일부 지역이 경작지로 이용되었고, 농업의 중심지는 여전히 산 자락에 근접하였다. 황산벌로 불린 논산의 부적면 일대는 여우들이 뛰놀고 있었고, 여행자들은 갈대와 억새 숲을 지나 관촉사에서 쉬면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넓디 넓게 펼쳐친 평택의 들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 현종 12년(1021)에 세워진 봉선 홍경사 갈기비에는,


  처음 이 땅에는 전연 객주집이 없어서 사람의 집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그런데다가 갈대가 우거진 늪이 있어서 강도가 상당히 많으므로 비록 갈림길로서 중요한 지점이지만 사실은 왕래하기가 매우 어려웠으므로 태평성대에 이곳을 그대로 둘 수 없다.


  라고 기록하였다. 사람이 없는 평택의 들판에는 맹수들이 우글거리고, 그 사이에 강도들이 숨어 있었다.


  12세기에 세워진 혜음원(경기도 일산 소재), 최루백이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때려잡은 곳 역시 큰 산과 평지로 이어지는 골짜기 부근이었다. 오늘날 골짜기를 가득 메운 논에는 당시 호랑이와 같은 야생동물이 사는 동물의 왕국이었다. 따라서 동물의 왕국을 지나려는 고려인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살아서 도착하고 싶다면 ……


  12세기 초 고려를 방문했던 송의 서긍은 “고려 영토는 동해에 닿아 있으며, 큰 산과 깊은 골이 많아서 험준하고 평지가 적다. 그 때문에 농사를 산간에서 많이 짓는데, 지형의 높고 낮음에 따라 힘써 갈고 일군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사다리나 돌계단과 같다[遠望如梯磴].”라고 하였다. 평지가 적은 까닭은 물론 구릉성 산지가 많은 한반도의 특성을 언급하는 것일 수 있지만, 넓은 들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지 않은 당시의 사정을 고려하는 것이 더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정도전 역시 우리나라의 땅을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 구릉수택 등 경작할 수 없는 땅이 10에 8·9에 이른다고 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 하삼도가 이러했고, 고려 말의 진황지가 모두 복구되고, 새로운 땅이 본격적으로 개간되는 태종 초의 전결수가 120만결 정도로 보고되었다는 점에서 고려 시기 최대 경작지를 개략 100만 ha로 추산할 수 있고, 이러한 땅은 주로 산골짜기 사이의 땅과 커다란 산자락 아래 펼쳐진 아담한 들판으로 볼 수 있겠다.


  ‘문전옥답’이라는 오랜 관용구처럼 고려의 마을은 산 자락 끝에 놓여 있었고, 자그마한 저수지나 마을 앞의 샘물은 논농사의 근원이었다. 골짜기 밖에 무너미 땅에 펼쳐진 넓은 들과, 드넓은 평원은 아직 야생의 세계였고, 그곳에 호랑이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어흥∼어∼흥∼∼


  
  [그림2]  좌: 봉선홍경사 사적 갈비(국보제7호) 우:봉선홍경사 위치와 주변 지형 ⓒ문화재청(좌), 구글지도(우, )




▶ 결부수로 파악할 수 없는 경작지 면적


  15세기 경 대략 1,000,000ha 전후였던 경작지는 19세기에 이러 4,500,000ha 이상으로 확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매우 거친 개략적인 추정으로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결부수를 중심으로 파악한 자료가 주로 남아 있는 조선시대 경작지 면적을 정량적으로 환산하여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양전사업을 통해 양안에 기재된 결부수로 경작지 면적을 기준으로 정량적 변화를 추정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 중 특히 결부란 일정한 소출이 있는 토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공법이 제정된 이후 6등급으로 구분되었고, 이는 등급에 따라 6가지 상이한 면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양전과 개량의 과정에서, 그리고 정기적으로 생산력이 변화함에 따라 소출을 근거로 면적을 직접 파악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균등한 조세 수취를 지향하고, 백성에 대한 가벼운 수취를 실천하려 한 조선은 엄격한 양전을 통해 결부제를 명실상부하게 확립하기보다는, 국가 재정을 축소하는 가운데 기존의 양안을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선에서 결부제를 운영하였다. 17세기 이후 총액제와 비총제가 공식적으로 활용되면서 전국에 걸친 양전사업은 시도되지 않았다. 계묘양전(1604)과 갑술양전(1634), 그리고 경자양전(1718∼1720) 정도가 그나마 대거 양전에 속하지만 몇 개 도에 걸친 일부 지역의 양전사업이었다.


  1898년부터 1904년까지 대한제국에서 시행한 광무 양전 사업 역시 개략 전국의 2/3 가량의 군현(218개 군현에서 완료)에서 양전 사업을 시행했으나, 전통적인 양전방식에 따라 시행됨으로써 절대면적을 파악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


  한반도에서 정량적 방법으로 토지조사가 시행한 것은 일제 강점기 총독부에서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이 처음이었고, 이 사업을 통해 토지대장과 지적도를 만들어냄으로써 한반도에서 개간된 경작지의 실상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한반도의 경작지가 얼마일지에 대해서는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혼선을 겪고 있듯이, 당시 총독부에서도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애초 총독부는 대한제국 시기까지 사용된 양안에 근거하여 결부제 원리를 적용하여 전국의 토지를 면적 단위로 환산한 바 있다.


  그 결과 1910년 전국의 농경지는 240만 정보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1918년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파악한 실제 경지면적은 1910년보다 8할이 증가한 432만 정보로 실측되었다. 이후 추가적인 조사를 통해 화전을 중심으로 40여 만결이 더 파악되었기 때문에 조선시기에 개간된 경작지는 450-470만 ha 전후에 이르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헌창은 이처럼 늘어난 토지 면적의 대부분이 이미 경작되던 토지를 삼각측량법으로 면적을 철저히 파악한 결과라고 하였다.